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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artist Jul 25. 2017

Part 1. 1 어린이날

흙에서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병을 일으킨 사명대사 생가지가 있는 조용한 농촌 마을이다. 이곳의 주된 농산품은 청양고추인데,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하여, 9월부터 준비하여 겨울부터 한참 더워지는 여름 전까지 생산, 판매를 한다.


 이곳에서 고추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은 언제나 바쁘시다. 시골에 친척이나 가족이 있는 분들은 알겠지만 농사는 농부의 부지런함과 상관없이 일손이 언제나 부족하다. 그래서 주말이건 공휴일이건 어리지만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셨다. 한참 어릴 때는 자연의 품 안에서 뛰어노는 것이 즐거웠다. 비닐하우스 근처 개울가에서 개구리, 물고기도 잡고 메뚜기를 비롯한 작은 곤충들을 잡아 거미줄에 걸어주어 거미가 곤충들을 어떻게 먹는지 관찰하기도 했다. 하루하루 성장하는 고추나무를 보는 것이 신기했다.


트랙터를 따라 하는 동작으로 엎드려 두 다리로 땅을 갈기도 하고, 하루종일 흙을 파내어 두 꼬마를 위한 비밀 기지를 만들기도 했다. 자연 속에서 부모님과 함께 한다는 것 자체가 마냥 좋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일터로 따라가는 것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는데, 사춘기에 들어서는 중학교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철저히 내가 어린이가 아니라 믿었다. 부모님의 도움으로 밥을 떠먹지도 않았고, 100m를 14초에 뛸 수도 있었고,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 지도 구별할 수 있었다. 가끔이었지만, 부모님의 입에서 나오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책망과 비난은 농업에 대한 인식을 서서히 바꿔 놓았다.


티브이 속 학생들을 유원지에서 놀고, 부모님과 함께 외식을 하는 모습이 줄곧 방송되던 어느 어린이날이 기억에 남아 있다.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하야, 샘아 오늘 일 좀 도와줄래?"

"네, 알겠어요."

'오늘 어린이날인데....'

일하러 가자고 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에 속으론 금세 시무룩 해졌지만, 어쩔 수 없이 대답을 했다.

비닐하우스를 향해 나섰다. 낡은 트럭에서 바라보는 날씨는 그날따라 어찌나 좋은지, 어디 소풍이라도 가는지 하늘도, 땅도, 나무도, 꽃도, 모두 화창한 드레스를 입었다.

 일터에 도착하여 비닐하우스에 들어서니 후끈한 바람이 우리를 맞았다. 밖은 한참 봄이지만, 안의 온도는 이미 여름인 듯했다. 어린이가 아니라고 자부하던 중학생인 나의 어린이날의 일손 돕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일을 시작하고, 그것이 조금 익숙해질 쯤 잡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같은 반 친구들은 뭐하고 있을까? 분명 시내에 나가 놀고 있을꺼야! 흠.. 나는 여기에서 이렇게 일하고 있는데..., 도시의 꼬마녀석들은 부모님의 손을 잡고 놀이공원에 놀러 갔겠지..'


어린이날까지도 일을 시키는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왜 나의 부모님은 이 직업을 택하셨을까? 조금 더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살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 아버지가 울산 현대자동차의 근로자 생활을 계속했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뚝뚝 떨어지던 땀도 머릿속 한가득 채워진 원망들을 씻어 내지 못했고, 시곗바늘 돌리는 공장장 아저씨도 소풍 갔는지 시간은 느릿느릿 흘러갔다.


비닐하우스 안을 열심히 뛰어다니며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흙 묻은 옷을 후다닥 벗어던지고, 샤워를 마치니 어머니의 돼지고기와 검은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가 기다리고 있었다. 낮 동안 나를 지배하던 불평들은 노릇노릇 한 고기와 함께 배속으로 그렇게도 쉽게 잊혔다.


그 이후 얼마나 지났을까? 그날의 그 원망들을 알아차리신 것일까? 아니면 아침식사를 하며 일하러 가자고 하실 때마다, 숨긴다고 숨겼지만 내 표정이 너무 확실히 말하고 있었을까? 아버지가 어느 주말 아침, 집에서 공부나 하라며 먼저 일터로 나가셨다. 그 이후로는 우리를 웬만해서는 일터로 이끌지 않으셨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얼마나 철없는 아들이었나 후회가 된다. 어느 부모가 어린 자식을 힘들게 일하게 만들고 싶을까?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그러신 것인데...  몸뚱이는 커져 어른을 닮아가고 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직 어린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시기였다. 내 삶을 결정권자 아버지에 대한 오이디푸스적 갈등이 청소년기에 발현 된 것일 수도 있겠다.


나이가 조금 더 들고, 대학생이 되고, 군대를 거쳐, 서른을 넘긴 나이가 되었다.

그동안 육체노동을 바라보는 시선은 많이 바뀌었다. 부모님의 일을 도움으로서, 노동, 땀의 가치를 놀이공원에서 솜사탕을 먹으며 놀던 또래 친구들 보다 먼저 체험할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을 갈고닦는 것은 요가 수행만이 아니다. 농사 행위 역시 수행이 된다고 생각한다.

 더위를 참고, 추위를 이겨내고 일을 한다. 자신의 생물학적 본능을 거스르며 이성적 자아의 선택을 따른다.

더 높은 차원에선 농업은 예술이다. 자연물을 대상으로 시간과 환경을 고려해 잘 성장시켜야한다. 태양, 온도, 습도 등 이 다양한 조건들은 예술 활동의 준비물이다. 적절한 시기에 품질 좋은 고추를 많이 생산하는 일, 이것이 부모님이 바라는 최고의 경지였으리라.  어떤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인내하고 부단히 노력한다는 것은 농사가 예술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경지에 이르기 위한 수행의 과정이 아니었을까?


세상에 사람이란 동물이 아낌없이 줄 수 있는 대상은 자신과 자식밖에 없다고 한다. 아버지, 어머니 역시 나에게 사랑을 주시려고 했을 것이다. 밀려있는 농사일을 감당 못해, 주말이건, 공휴일이건 아들을 불러내셨지만, 행복한 삶을 누리길 바라셨을 것이다.

'하우스(일터) 가자'라고 말씀을 꺼내실 때 큰아들의 표정을 보시고 갈등에 빠졌을 것이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스스로를 질책하셨을 것이다.


 어린이날, 그때의 기억은 시간이라는 숙성과정을 거쳐 육체를 움직이며 얻는 기쁨을, 원하지 않는 상황을 견디는 법을 가르쳐줬다.

회색빛 아파트의 시멘트, 아스팔트 도로 보다는 역동적으로 숨쉬는 붉은 흙과 세상을 지키는 녹색의 아름다움을 알게 해줬다.

실컷 놀지 못한 어린시절의 기억은 다양한 여행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렇게도 산과 자연을 찾아다니는 것은 어릴 적 나를 포근히 받아주고 보살펴준 자연에 대한 그리움 아니었을까?


가정은 나의 토양이다. 삶에서 어떤 나무가 될지, 어떤 꽃을 피울지는 내외면적으로 받은 가족의 사랑에 달려 있다. 그대여 무슨 일이 있던 가족의 가치를 지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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