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BC라디오 '여성시대' 22. 4월 1일자 방송]
아내는 금년에 일흔 두 살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잔병 치레도 없이 건강만큼은 늘 자신이 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잠시라도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고 무슨 일이든지 만들어서 바쁘게 움직이는 매우 활동적인 사람이다.
그렇게 건강하기만 하던 아내가 작년 5월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며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날도 아내는 들판으로 미나리를 뜯으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온 뒤부터 갑자기 심한 두통 때문에 매우 고통스러워 쩔쩔 매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그런 적이라고는 전혀 없던 사람이다.
그러나 난 워낙 건강한 사람이니까 그러다가 말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우선 타이레놀을 한 알 먹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다행히도 두통이 개운하게 나았다며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그런데 그다음 날에도 또다시 어제처럼 다시 두텅이 심해지고 있었다. 타이레놀을 또 복용해 보았지만, 이번에는 효과가 없었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두통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다시 재발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이번에는 동네 병원을 찾아갔다. 의사는 두통의 원인은 대부분 90% 이상이 편두통이나 긴장성 두통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약을 처방해 주었다.
그러나 병원에서 처방해 준 약을 복용해 보았지만, 전혀 차도가 없었다. 두통 때문에 오히려 전보다 더욱 고통스러워하며 쩔쩔매고 있었다.
그다음 날에는 급한 마음에 한의원을 찾아가게 되었다. 한의사는 틀림없이 감기 기운이 온 것이라며 지어준 약을 먹고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쓴 다음 땀을 흠뻑 흘리며 나면 곧 개운해질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한의사의 말대로 한약을 복용하고 땀을 흠뻑 흘리게 해보았다. 그러나 그 역시 아무 효과도 없었으며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내에게 더욱 깜짝 놀랄만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식사 준비를 하기 위해 식탁에 수저며 젓가락을 주섬주섬 차려놓고 있는 나의 모습을 거실에 누운 채 바라보고 있던 아내가 두 눈이 휘둥그렇게 된 채 나를 바라보며 엉뚱하게 묻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무얼 하려고 그래요?”
“아무리 아파도 아침은 먹어야 할 게 아니야?”
그러자 아내가 이번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아니 바로 조금 전에 아침을 먹었는데 무슨 아침을 또 먹느냐며 펄쩍 뛰며 소리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난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리고 번개처럼 이런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아하, 저 사람이 결국 치매 초기 중세가 오고 있는 게 틀림없다는 생각을……. 그런 생각을 하게 되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난 불안한 마음에 슬며시 아내 곁으로 가서 어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오늘 날짜, 요일 등, 이런저런 것들을 천천히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답하는 것마다 모두가 맞지 않고 횡설수설이며 동문서답이고 마이동풍이었다.
난 불안한 마음을 견디다 못새 자식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놀란 자식들이 여기저기서 달려왔다. 그리고 자식들이 아내와 조심스럽게 대화를 해보더니 하나같이 혀를 내두르며 치매가 온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2,3일 뒤, 자식들이 큰 병원에 예약해놓았으니 우선 가보자고 나보다 더 서두르고 있었다. 다른 병원들은 몇 개월 뒤에나 겨우 예약할 수 있어서 그나마 가장 빠른 병원을 예약해 놓았다는 것이다.
마침내 2, 3일이 지나자 큰 병원으로 달려갔다. 두통을 호소하기 시작한 지 9일 만이었다. 예약한 시간은 오전 11시였다.
진료실로 들어가자 의사가 아내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아내는 무슨 말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그렇게 불과 3,4분 가량 의 문진 끝에 결국 MRI 촬영부터 해보자고 하였다.
그런데 이런 낭패가 또 있나?
난 그날 바로 MRI 촬영을 하고 결과까지 알게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촬영 날짜가 앞으로 40일 뒤로 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그 결과는 다시 한 달 후에나 나온다고 하였다.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이렇게 당장 위급한 환자를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다니……!
난 조급한 마음에 조금 더 앞당겨 빨리 촬영해 줄 수 없느냐고 사정을 해보았다. 간호사는 그렇게는 절대로 안 된다며 딱 잘라 거절하고 말았다.
큰 병원에만 가면 급한 일이 시원스럽게 해결될 줄 알고 큰 기대를 했었는데 결국 실망과 불안감만 더 풍선처럼 커지고 말았다.
결국, 그날은 어쩔 수 없이 허탈한 상태로 그대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했다. 앞으로 MRI 촬영을 하기 위해 40일에 가까운 날을 이대로 집에서 견딜 수는 없었다. 이렇게 우물쭈물하다가는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크게 벌어지고야 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러다가 문득 번개처럼 머리에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과거 오래전에 내가 가끔 찾던 곳, 바로 방사선과 전문의원이었다.
방사선과로 곧 통화를 해보니 모레 오전 11시에 오면 바로 MRI 촬영올 해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반갑고 고마운 일이 또 어디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마침내 이틀 뒤, 서둘러 한국영상의학과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 MRI 촬영이 끝나고 12시쯤에는 바로 판독 결과를 듣을 수 있게 되었다.
결과는 치매가 아니라 뇌출혈이었다
판독실로 들어가자마자 원장이 다짜고짜 언제 머리에 충격을 받은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내는 전혀 그런 적은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원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MRI 화면을 가리키며 심각한 표정이 되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현재 뇌출혈이 너무 심해서 출혈된 피의 양이 너무 많아 뇌가 한쪽으로 쏠려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출혈된 피가 조금만 더 뇌를 압박하면 뇌의 손상이 와서 바로 사망하게 된다는 놀라운 설명이었다. 그리고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뇌는 손상되지 않은 것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바로 진료의뢰서를 써주더니 지금 시간이 급하니 어물어물하지 말고 급히 큰 병원 응급실로 가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치매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뇌출혈이라니?
이런 청천벽력같은 일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어찌 됐든 원인이라도 확실하게 발견하였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그러나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입안이 바작바작 탈 지경이었다.
우리는 조급한 마음에 서둘러 그 길로 바로 대학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응급실에는 대기하고 있는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종일 응급실에서 기다리다가 겨우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야 8층에 입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입원실이 아닌 임시 대기실이었다. 어제 코로나 선별검사를 했는데 그 결과가 오늘 낮 1시가 되어야 나온다고 하였다. 그리고 음성 판정을 받은 다음에야 정식으로 입원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오후 1시쯤에 예정된 코로나 음성 판정이 나왔다. 그러자 바로 7층으로 입원을 시켜주었다. 그 뒤부터는 일사천리로 검사와 치료가 병행되고 있었다. 오후 4시에는 다시 MRI 촬영, 그리고 5시경에는 바로 수술이 진행된다고 하였다.
오후 4시가 되자 MRI 촬영이 끝나고 5시에 수술실로 들어갔다. 수술은 6시 20분이 되어서 끝나고 회복실로 옮겨진 다음 드디어 다시 입원실로 옮겨졌다.
수술은 매우 성공적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아내는 수술실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의식도 회복이 되어 정상적인 대화도 가능했다.
수술할 때 삭발을 하지 않았지만, 머리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구멍에 투명호스가 삽입되어 있었으며 호스 끝에는 작은 튜브가 매달려 있었다. 그 호스를 통해 아직도 피가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피가 나오는 양을 시간마다 체크해 달라는 간호사의 주문을 받았다.
그렇게 약 10여 일간 입원한 뒤에 드디어 완치가 되어 퇴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부터는 약 1개월이나 2개월에 한 번씩 외래로 CT나 MRI 촬영을 하며 진행결과를 살펴보곤 했는데 지난해 11월 15일 결과 이젠 약을 복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결국 완치가 되었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이제 수술을 한 지 오늘로 어언 8개월이 지났다. 아내의 상태가 지금은 모두가 예전처럼 정상으로 돌아왔다.
누구나 뇌출혈을 하게 되면 반신불수가 되기가 쉽다는데 다행히도 그런 것도 전혀 없이 지극히 정상이며 전처럼 다시 건강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참으로 불행 중 다행이며 감사한 일이었다.
누군가가 ‘건강에 대해서는 아무리 많이 강조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건강은 누구나 자신할 수 없다’는 말도 있다. 모두가 맞는 말이다.
이번 갑작스러운 아내의 일은 조금만 어물어물하고 방심했더라면 정말 큰 불행으로 이어질 뻔했던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이 방송을 애청하고 계신 전국의 여성시대 가족 여러분, 새해에는 모두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