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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Apr 24. 2022

등잔불, 그리고 전깃불

[등잔불에서 전깃불이 들어오기까지]

 며칠 전에는 등잔불의 추억란 제목으로 등잔불을 사용할 때에 여러 가지 불편한 점들을 생각이 나는 대로 소개해 보았다.      


지금부터는 등잔불 이후에 어둠을 밝혔던 우리 조상들의 갖가지 지혜와 슬기를 생각이 나는 대로, 그리고 내가 아는 대로 열거해 보기로 하겠다.    

 

등잔불을 켤 때는 갖가지 불편함이 많았지만, 그나마 석유값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밤에 별로 할 일이 없을 때는 석유를 아끼기 위해 등잔불도 마음대로 켜지 못하며 컴컴한 어둠 속에서 생활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기만 하다.      

 

그 후, 6.25란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어른들은 여기저기서 휘발유를 구해오기도 하였다. 그렇게 구해온 휘발유를 석유 대신 등잔불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나는 직접 휘발유를 구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긴 하지만, 어른들의 말에 의히면 미군 부대 쓰레기장이나 비행기가 폭격을 했을 때 떨어진 잔해에 고여있던 휘발유를 얻어오기도 하였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러나 휘발유를 등잔에 넣고 켜면 위험할 때가 많았다. 지나가다가 혹은 실수로 등잔불을 조금만 툭 건드려도 휘발유 기체가 방바닥의 사방으로 튀어나가며 삽시간에 불이 나곤 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그렇게 불이 나게 되면 온 식구가 그야말로 비상이었다. 방바닥에 훨훨 타오르고 있는 휘발유 불을 꺼야 하기 때문이었다.     


불을 끌 때는 주로 담요나 포대기를 사용하곤 하였다. 불이 난 곳을 향해 담요나 포대기로 덮으면 바로 끌 수 있었다. 그리고는 한바탕 불을 끄는 소동을 벌인 끝에 다시 등잔에 불을 켜며 생활하곤 하였다.    

 

그럼 등잔불이라도 켜지 못한 그 이전에는 어떻게 살았을까?


그건 보나마나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밤에 밖에서는 나무나 풀 같은 것을 태우면서 불을 밝힐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방에서는 별 도리없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불편한 대로 그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만, 소나 돼지 등, 갖가기 짐승을 잡아먹고 난 뒤에 거기서 나온 짐승의 기름 찌꺼기나 생선에서 나온 기름을 접시 같은 그릇에 담아 놓고 심지로는 실을 꽂아 불을 밝히기도 하였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도 실제로 어느  집에서는 그렇게 불을 밝히고 살아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등잔불보다 훨씬 더 밝은 양촛불     


집집마다 대부분이 그렇게 등잔불을 켜고 살아가고 있던 어느 날 밤, 어느 이웃집에 마실을 가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집 방안이 대낮처럼 밝고 환해서 정신이 번쩍 날 정도였다. 알고 보니 그 집은 양초를 켰던 것이다.

양초가 이토록 밝다니! 그러나 양초는 석유를 켜는 것보다도 훨씬 더 비쌌기 때문에 살림이 넉넉지 못한 우리 집에서는 감히 양초를 켜고 살아갈 수 있는 형편이 안 되었다.      


양초보다 더 밝은 남포등      


한동안 석유 등잔이나 양초에 의존하며 밤에 불을 밝히던 시대가 가고 어느 날 남포등이 새로 등장하게 되었다.      


남포등이란 등잔처럼 역시 석유를 넣고 쓰는 등인데 그 겉에 바람이 불 때 불이 꺼지지 않도록 유리로 된 관을 씌워서 사용하게 된 편리한 등이었다. 그 유리로 된 관을 흔히 등피라고도 하였다.      


이처럼 남포불은 바람에도 잘 꺼지지 않고 벽에 걸어서 사용할 수도 있으며 필요에 따라 불을 켠 채 부엌이나 밖으로 들고 다닐 수도 있어서 여간 편리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양촛불보다 훨씬 더 환하고 밝아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 경우나 다 그렇듯 편리하면 편리한 대로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불편하면서도 어려운 점도 많았다.     

  

첫째, 남포등은 등잔불보다 심지가 굵고 크기 때문에 등잔불보다 우선 석유가 많이 들어간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석유가 아까워서 등잔불도 마음대로 못 켜던 시절이었다. 그러기에 편리하고 밝은 남포등이 새로 나왔어도 여전히 등잔을 켜는 가정이 많았다.      


둘째, 남포등은 하룻밤만 써도 겉에 씌운 유리관에 그을음이 너무 끼어서 불이 어둡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한번 쓰고 난 뒤에는 반드시 유리를 물로 닦아야 하는데 유리관이 너무 얇기 때문에 관을 닦다가 조금만 실수를 해도 깨드리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닦을 때마다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다.     


유리관을 깨뜨렸을 때마다 별수 없이 새로 사다가 써야 하는데 그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곤 하였다. 그래서 나중에는 좀더 두꺼운 유리관으로 된 남포등이 나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넉넉지 못한 가정에서는 남포등의 장점은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등잔불을 켜고 살아가는 집들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앞에서도 잠깐 설명했듯이 남폿불은 필요에 따라 불을 밝힌 채 밖으로 들고 다닐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서 제등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제등이란 쉽게 말해서 어두운 길을 갈 때 들고 다닐 수 있는 조명기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제등으로는 청사초롱을 꼽을 수 있겠다.      


다시 말해서 제등은 지금의 랜턴과 비슷한 역할을 하였는데 이 청사초롱은 밤길을 다닐 때, 그리고 예식을 할 때 많이 사용되었던 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등의 종류로는 청사초롱 외에도 초롱 등롱, 홍사초롱 등이 있었다.      


제등을 만드는 방법으로는 우선 대나무 같은 것으로 뼈대를 만들고 그 겉에 종이나 비단 헝겊을 씌워 바람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등이 모두 완성되면 등에 손잡이를 매달아 들고 다니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다음 그 속에 초를 켜서 넣든가 등잔을 넣으면 된다. 이때 초를 넣은 등을 '초롱'이라 하고 그 속에 등잔을 넣으면 '등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옛날에는 조족등이라는 제등도 있었다.      


조족등역시 제등의 일종으로 등 안에 넣은 초가 여간해서는 흔들리지 않게 고정해 놓은 등으로 주로 옛날에 순라군들이 사용했던 등을 말한다.     

 

순라군이란 조선시대 때 야간에 도둑이나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도성 내외를 순시하던 군인을 일컫는 말이다.       

또한 순라군들이 들고 다니던 조족등은 그 생김새가 박과 모습을 닮아서 박등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옛날에도 벽에 걸어놓고 쓰는 등이 있었는데 나무로 만들어진 육면체의 틀에 유리를 끼워 만든 등으로 괘등이라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괘등의 종류로는 ‘요사등’과 ‘발등거리’가 있었다고 한다. ‘요사등’은 보통 투명하는 유리 대신 오색의 유리를 끼워 화려한 불빛을 내게 하는 등으로 주로 궁중에서 사용하는 제등이었다. 그리고 발등거리

사람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대문 앞에 걸어두는 데 쓰이는 등의 이름이었다.      

   

이처럼 등잔불은 양초로, 그리고 남포등으로 발전을 거듭하다가 전기의 공급으로 인해 전등을 사용하면서터 등잔불과 남포등은 그 자취를 완전히 감추게 된 것이다.      


내가 살던 고향인 시골만 해도 1971년 12월까지만 해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등잔불이나 남폿불에 의존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971년 12월에 마침내 전기가 들어오면서 그 뒤부터 등잔불과 남폿불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전깃불이 들어오면서 처음에는 백열등을 켜고 사는 게 아닌가 했는데 우리 시골에는 처음부터 형광등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때부터 텔레비전도 차츰 보급이 되기 시작하였다.     

      

전기가 들어오던 그해 12월 마침내 우리 집에도 전기 기술자가 와서 전기 설치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술자의 입을 통해 그때 마침 불행하게도 지금 한창 서울의 대연각 호텔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던 이야기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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