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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Jul 06. 2022

옛날의 땔감과 물

[옛날에는 연료비와 물세 걱정이 전혀 필요 없었다]

한국 전쟁 직후인 1950년대 중반     


그 시절에는 어느 집을 막론하고 가난하여 먹고 살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36년이나 되는 긴 세월을 일제의 탄압으로 농산물은 물론이고 그 외에 필요한 일용품들을 이른바 공출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일본에게 착취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농촌에서 가장 많이 공출을 하게 된 것은 곡식은 물론이지만, 짚으로 짠 가마니였던 것 같다.   

   

그러기에 어느 집이나 틈만 나면 식구들이 모여 번갈아 가며 가마니 짜기에 열을 올렸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기만 하다.       


그렇게 오랜 세월 일본의 압박과 설움 속에 숨도 마음 놓고 쉬지 못하는 세월을 살아가다가 1945년 마침내 몽매에도 그리던 해방을 맞게 되었다. 하늘에서는 B29 비행기가 날아다니며 해방을 알리는 이른바 삐라를 뿌리기도 하였다.    

 

이에 우리 민족은 그제야 겨우 일본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기쁨과 환희에 목청껏 만세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과 자유 역시 오래 가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가뜩이나 헐벗고 어려운 형편에 1950년에는 또다시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6.25 전쟁이란 동족상잔의 한국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한국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기까지 정확히 3년 1개월 2일간이나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쟁이 지속되었다.     

 

그 결과 우리 민족은 북괴가 저지른 뜻밖의 비극으로 인해 집과 건물, 그리고 온 나라가 모두가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한마디로 전 국토가 하루아침에 쑥밭으로 변해버렸으며 그로 인해 국민들의 가난은 더욱 극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헐벗고 배고픈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땔감 걱정만큼은 별로 하지 않았다.   


땔감(연료)     


요즘에는 집에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통장에 들어있는 잔고가 결재 날짜만 돌아오면 어김없이 다달이 빠져나가곤 한다.    

  

모든 냉난방 시설이나 세탁기 등, 그 모든 것이 손으로 버튼 하나만 누르면 해결되는 매우 편안하고도 꿈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가만히 앉아서 한달 동안 편안히 사용한 전깃세상하 수돗세도시가스비난방비 등그 밖의 각종 세금들이 통장에서 어김없이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잠을 자지 않고 매일 늘어만 가는 것이 이잣돈이란 말이 있다. 그처럼 매달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생활비 역시 잠도 자지 않고 여지없이 빠져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지출 종목이 주택의 유지비 즉, 관리비와 그리고 난방비와 에어컨을 가동시킬 때마다 필요한 도시가스비와 전깃세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자동차 유지비 또한 만만치 않다.      


문명이 매우 발달한 문명의 이기를 편안히 즐기는 대신 그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는 그만큼 쉬지 않고 돈을 벌어야만 하는 노력 또한 필요한 것이 요즘 세상인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웬만한 경비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었다.    

  

우선 곡식을 떨고 남은 짚단들이 모두 훌륭한 땔감으로 한몫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볏짚은 가장 쓸모가 많은 자원 중의 하나였다. 볏짚만 있으면 땔감은 물론, 여러 가지 농촌에서 필요한 웬만한 일은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재료로 쓰였기 때문이었다.      


볏짚의 쓰임새로는 우선 땔감으로서의 훌륭한 역할은 물론, 가마니 짜기, 섬 짜기새끼줄 꼬기멍석 만들기둥구미종댕이멱서리초가지붕의 이엉 엮어 올리기, 소의 여물외양깃 등, 안 쓰이는 곳이 별로 없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다하였다.      


볏짚 외에 그 밖의 땔감으로는 보릿짚밀짚호밀짚콩짚수숫대 등, 아궁이에 넣고 불을 지필 수만 있다면 그 모두가 땔감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바짝 말린 쇠똥도 훌륭한 땔감이 되기도 하였다.       

여름철에는 아궁이에 불을 때면 방이 뜨겁기 때문에 주로 화덕이란 걸 사용하는 집들이 많았다. 화덕이란 뒤꼍이나 앞마당에 큼직한 새우젓 깡통 같은 것을 이용하여 아궁이와 굴뚝을 만들고 그 위에 양은솥단지 같은 것을 올려놓고 밥을 짓곤 하였다.      


그리고 곡식들을 떨고 난 짚만 가지 한 해의 연료를 충족하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하였다. 겨울철에 화롯불을 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장작이 필요하였으며 다림질을 할 때 역시 참나무 장작 필요하였다.      


그러기에 좀 귀찮고 힘이 들기는 해도 그때는 누구나 틈만 나면 나무를 하기 위해 지게를 걸머지고 산으로 올라가곤 하였다.     

 

나무를 하러 산으로 갈 때는 갈퀴와 낫, 그리고 새끼줄을 가지고 가곤 하였다. 때로는 등걸을 하기 위해 도끼를 가지고 가기도 하였다.      

갈퀴는 주로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낙엽이나 가랑잎을 긁어모을 때 사용하였다. 은 나뭇가지를 벨 때, 그리고 등걸을 하기 위해서는 도끼를 사용하곤 하였다.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낙엽이나 가랑잎은 겉에 나뭇가지나 청솔가지를 대고 을 쳐서 새끼줄로 단단히 묶은 다음 지게에 지고 운반하곤 하였다.   


전을 치는 일 역시 대단한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전을 잘 칠 줄 모르면 힘들여 나무를 했다 해도 운반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자들이 나무를 했을 경우에는 지게가 이용하지 않고 전을 친 나무를 한 단씩 머리에 이고 오곤 하였다.    


요즈음에는 어느 산엘 가나 나뭇잎들이 켜켜이 쌓여 흔하게 나뒹굴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가지 치기를 하여 여기저기 쓸모없이 나뒹굴고 있는 나뭇가지들도 그렇고, 베어버린 큰 통나무 토막도 그렇다. 그런 광경은 옛날 같으면 어림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렇게 산마다 쌓인 나뭇잎이나 나무 토막들은 일단 산불이 낫다 해도 산불을 진압하기도 어렵고 곧 화염에 뒤덮혀 사방으로 번지기도 한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렇게 쌓인 나무들도 없었지만아무 산이나 가서 마음대로 나무를 할 수도 없었다   

  

어느 산이나 산 주인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남의 산에 가서 나무를 하다가 들키게 되면 해놓은 나무까지 빼앗기고 쫓겨나는 일이 빈번했다. 그리고 해방이 되기 전까지는 이른바 산림간수라는 사람이 수시로 돌아다니며 나무를 하는 사람들을 단속하여 벌금을 물리기도 하였다.     

그러기에 내 소유의 산이 없으면 나무를 하는 일 역시 요령껏 몰래 하거나 임자가 없는 산에까지 멀리 가서 해오곤 하였다. 그런 걸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이 세상에 쉬운 일이란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지금은 모든 식수를 일일이 배달시켜 사 먹거나 약수터에 가서 길어오기도 하지만, 옛날에는 수돗물 세나 하수도세 걱정도 전혀 없었다.      


마실 물이 필요할 때마다 마을의 공동 우물에서 물동이로 길어다 큰 질그릇 독에 가득 부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 사용한 물은 이른바 시궁창에 부으면 해결되기 때문에 하수돗세 같은 걱정도 전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나마 조금 형편이 나은 집은 앞마당에 우물을 파놓고 멀리 공동 우물까지 동이를 이고 가지 않고 두레박으로 퍼서 물을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앞마당에 우물이 있는 집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밥을 짓거나 설거지그리고 세숫물이나 목욕비 등물 걱정도 전혀 없었다     


세탁기가 전혀 없던 그 시절에는 빨래 역시 아낙네들이 빨랫감을 큰 자배기 같은 것에 담아 머리에 이고 공동 우물에 가서 빨랫방망이로 두드려 빨곤 하였다. 빨랫비누 역시 귀해서 대부분 집에서 잿물로 만든 비누칠을 해서 빨곤 하였다.     

 

빨래를 다한 다음에는 집집마다 마당에 긴 줄을 매고 중간에 긴 바지랑대를 받쳐 햇볕에 말리곤 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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