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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Jul 03. 2022

신발에 관한 추억

[신발 ; 발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신고 다니는 것]

  ❉ 짚세기   

  

내가 아주 어렸을 때만 해도 도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태어나고 자란 시골에서는 고무신이 아주 귀했다.


그러나 고무신이 없다고 하여 맨발로 다닐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대부분이 짚세기란 것을 삼아서 신고 다녔다.


집세기란 볏짚으로 만든 신발을 말한다. 집세기를 다른 말로 짚신이라고부르기도 하였으며 내가 살던 시골에서는 주로 집세기란 말을 사용하였다.    

  

짚세기는 짚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신고 다니다 보면 고장도 많고 바닥도 쉽게 닳아버리곤 하였다. 그래서 어른들은 시간만 나면 가족들이 신고 다닐 짚세기를 열심히 삼느라 늘 바빴다.     

 

 신발이란 원래 발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신고 다니는 것인데 짚세기는 발을 보호하기는커녕 불편한 점이 너무나 많았다.      


첫째, 아무리 정성을 들여 잘 만들었다고 해도 발에 잘 맞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짚세기 오래 신고 다니며 길이 들기 전에는 발에 꼭 끼게 되어 발가락이나 발바닥이 부르트는 일이 많았다.      


그렇게 불편한 짚세기였지만, 그런 고통을 견디어내며 신고 다니다가 겨우 길이 들만하면 바닥이 다 닳고 해져서 또 다른 짚세기를 삼아서 신고 다녀야 하는 일이 반복되곤 하였다.


그렇게 불편한 신발이어서 웬만하면 차라리 짚세기를 벗어서 손에 들고 맨발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러기에 옛날에 지방에서 한양이나 한성으로 과거 시험을 보러 가는 선비들은 여러 개의 짚신을 새끼줄에 꿰어 어깨에 매달고 가다가 짚신이 다 닳으면 새 짚세기로 갈아 신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짚세기‘는 약한 짚으로 만든 것이어서 비만 오면 바로 빗물이 바닥으로 스며들어와서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비가 오는 날이면 차라리 맨발로 걸어 다니는 아이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결국 신고 다닐 수도 안 신고 다닐 수도 없는 골칫덩어리가 아닐 수 없었다.   


 나막신과 게다      


 나막신비가 와서 물이 고였거나 진흙길에서 신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그 시절에는 그나마 고급 신발을 가리키는 말이다.  

    

 나막신이란 통나무를 끌이나 칼로 마치 고무신 모양과 흡사하게 파고 깎아서 만든 고급 신발이다. 그러기에  나막신은 바닥에 물이 샐 염려도 없으며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점잖은 어른들이 품위를 지키기 위해 주로 나들이할 때 보란 듯이 신고 다니곤 하였다.    

 그러나 이 나막신 역시 아무리 고급이라고는 하지만, 고무신처럼 늘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특정한 사람의 발의 크기에 맞추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오직 그 사람만 신고 다닐 수 있는 신발이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은 신고 다니라고 해도 발에 맞지 않으면 거저 주어도 신고 다닐 수 없는 화중지병 즉, 그림의 떡과 같은 존재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막신은 역시 고급 신발이기에 신고 난 뒤에는 댓돌이나 마루 한쪽에 마치 신주라도 되는 듯 귀하게 모셔두곤 하는 것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짚세기 나막신이 이토록 신고 다니기가 불편하자, 그다음에 생겨난 것이 게다였던 것 같다.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게다란 원래 일본의 나막신을 일컫는 말이었다.   

   

짚세기를 신고 다니기가 몹시 불편하자, 그다음에는 널빤지를 자신의 발바닥 크기에 맞게 자른 다음 널빤지에 끈을 달아 신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신발을 ’게다‘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이 ’게다‘가 인기를 얻으며 대유행을 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게다란 요즘 실내화(슬리퍼)와 비슷하게 만든 신발이었다. 그러나 널빤지도 구하기가 그리 쉽지 않은 시절이어서 게다도 마음대로 만들어 신고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그나마 게다를 신고 다니는 사람들이 몹시 부럽기도 하였다.      


검정 고무신      


짚세기나막신, 그리고 게다를 한창 신고 다닐 때 읍내 장에는 갑자기 고무신이 새로 등장했다. 처음에는 흰색이 아닌 검정 고무신이었다. 그때부터 너도나도 모두 앞다투어 검정 고무신을 사서 신고 다니게 되었다.      


고무신은 짚세기와 게다에 비해 신고 다니기가 여간 편안한 게 아니었다. 그러기에 고무신 하나만 손에 넣게 되면 보물 1호라도 되듯 자랑스러웠으며 혹시나 흠집이라도 날 게 두려워 여간 아껴 신은 게 아니었다.  너무나 아끼는 마음에 잘 때도 가슴에 꼭 껴안고 자는 아이들도 있었다.

  

또한 고무신은 아이들이 소꿉놀이를 할 때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소중한 놀잇감이 되기도 하였다.

흐르는 개울물에 고무신을 띄우며 배가 되기도 하고,   고무신에 모래를 잔뜩 담고 손으로 밀며 노는 트럭이 되는 등, 여러 가지로 놀이기구로 마음껏 즐기며 노는 놀잇감으로도 아주 그만이었다.     


이처럼 고무신은 여러 가지로 쓰이는 편리한 신발이지만 고무신을 아끼는 마음 또한 대단했다. 그러기에 어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고무신에 대한 애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일례로 아이들은 시오리 길이나 되는 학교에 등굣길이나 혹시 볼일이 있어 읍내 장에 갈 때에도 사람들이 보이지 않을 때는 고무신을 벗어서 손에 들고 맨발로 걸어가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사람이 눈에 띄게 되면 얼른 고무신을 신곤 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고무신이 조금이라도 닳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한번 닳아버리면 여간해서는 다시 사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어서 그만큼 고무신 바닥이 닳는 것을 미리 알아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신고 다니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만일 고무신이 찢어지거나 바닥이 닳으면 바느질 실로 몇 번이고 꿰매 신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동안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니다 보니 그다음에는 읍내 장에 흰 고무신이 새로 나오게 되었다. 검정 고무신에 비해 우선 보기에도 그렇게 고급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흰 고무신이 나오자 어느새 검정 고무신이 사라지면서 너도 나도 모두가 흰 고무신을 사서 신고 다니게 되었다.      


고무신은 남녀의 구별이 뚜렷이 구별되었다. 남자는 흰색 한 가지였지만, 여자 고무신의 색깔은 점차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나오기도 하였다.

흰색 고무신, 그리고 옥색 고무신, 꽃무늬를 박은 고무신 등, 선택의 폭이 넓어지기도 하였다.    

  

그래서 여인들은 어쩌다 한번 나들이를 할 때 버선에 옥색 고무신 하나를 자랑스럽게 신고 나서는 모습을 보면 거기서 더할 바 없는 그 이상의 멋쟁이가 없었다.     


엿장수와 고무신


그 시절, 시골 마을에는 매일 지게에 엿 목판을 진 엿장수가 자주 등장하기도 하였다. 엿장수는 으레 엿가위로 찰그랑 찰그랑 요란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나타나곤 하였다.

    

엿장수의 가위 소리가 온마을에 울려 퍼지게 되면 어느덧 아이들의 마음도 덩달아 설레면서 엿장수에게로 앞을 다투며 몰려들기 시작한다. 먹을 것이 부족하여 늘 배가 고팠던 그 시절에는 아이들의 주전부리로 엿보다 더 좋은 것이 없었 때문이다.   

  

엿장수가 지고 온 엿 목판에는 으레 가래떡처럼 생긴 길다랗고 먹음직스러운 엿이 하얀 가루를 뒤집어 쓴 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엿장수는 누군가가 헌 고무신을 가지고 나오면 엿 가위로 엿가락을 인심 쓰듯 엿을 뎅겅 잘라 주곤 하였다.      


엿장수는 고춧가루도 받고 여자들의 긴 머리카락도 받았다. 찌그러진 헌 냄비와 젓가락, 그리고 숟가락 같은 각종 쇠붙이도 모두 받았다. 안 받는 것이 없었던 것 같다.      


헌 고무신이나 쇠붙이를 주고 엿가락을 받아들고 나면 아이들은 침을 흘리며 부러운 눈으로 그 아이의 주변으로 우르르 모여들며 졸졸 따라다니곤 한다. 그러면 인심 좋은 아이는 엿을 조금씩 떼어서 나누어 주곤 한다.


그렇게 얻어서 입에 넣은 엿은 입안에서 살살 녹는 맛이란 그야말로 꿀맛에 비할 바가 아니다.     

 

엿장수가 다녀 간 그날 저녁이면 으레 이 집 저 집에서 아이들이 야단맞는 소리가 들려오곤 하였다. 꿰미고 또 꿰매 신던 고무신을 어른들 몰래 가지고 나와 엿을 바꾸어 먹긴 하였지만, 어른들은 더 꿰매 신을 고무신을 왜 미리 엿과 바꾸어 먹었느냐고 불호령을 내리는 소리들이었다.     


그러나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그렇게 야단을 맞는 소리는 여전히 그칠 날이 없었다. 비록 야단이나 매를 맞을망정 엿이 그만큼 먹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검정 고무신과 흰 고무신의 시대가 가고 이번에는 운동화가 또 새로 나오게 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검정색 운동화였다.      


나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처음으로 검정 운동화를 신어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운동화가 문제였다. 모처럼 새로 사온 운동화가 약간 작아서 불편하긴 했지만 그런대로 신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아서 신고 다니게 되었다.     


처음에는 맞는 것 같았지만 오래 신다 보니 엄지 발가락이 몹시 아프기 시작했다. 더구나 시오 리나 되는 학교를 오고 가다 보니 발가락이 몹시 아파 가끔은 벗어들고 맨발로 걸어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일단 신던 운동화를 바꿀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집안이 넉넉하지 못하니 다시 살 수도 없었다. 그래서 별 수 없이 그렇게 여러 날을 참고 다니다 보니 양쪽 엄지발가락의 색깔이 새까맣게 변하고 말았다.  

    

그래도 운동화가 단 한 켤레뿐이니 고통스러움을 참으며 신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결국 새까맣게 변한 양쪽 엄지 발톱이 모두 빠져나가 버리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몹시 미련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요즘에는 각 가정마다 신발이 넘쳐흐르고도 남는 듯하다. 더구나 발에 맞지 않아 신고 다니면 고통스러운 신발까지 신발장에 진열해 놓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각종 유행에 따라 겨울 신발, 여름 신발, 등산화, 골프화, 축구화, 슬리퍼, 샌들, 각종 구두 운동화 등…….  그러다가 유행이 지나면 멀쩡한 신발을 아무 망설임 없이 버리는 세상.  

  

게다가 유명 메이커의 상표가 붙은 운동화는 몇백만 원을 호가한다니 옛날에 비하면, 그리고 돈만 많으면 참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닐 수 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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