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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펜팔’( 4 )

[처음 찾아간 아가씨네 집에서 하룻밤을 묵다]

by 겨울나무

난 아가씨의 어머니와 동생이 힘을 합쳐 나일론 뽕을 치자고 적극적으로 붙잡는 바람에 다시 못 이기는 척하고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니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나 자신이 은근히 마음이 쏠렸기 때문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인지 모를 일이었다.


결국 나일론 뽕 판은 벌어지고 말았다. 아가씨를 포함하여 모두 네 명이 벌인 판이었다. 그 집 식구들은 말대로 시간이 나는 대로 나일론 뽕을 많이 해봐서 그런지 나일론 뽕을 잘 치는 편이었다. 나 역시 직장에서 숙직을 할 때마다 시간이 나는 대로 마을 사람들과 많이 쳐봐서 다른 것은 몰라고 나일론 뽕만큼은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 그렇게 나일론 뽕의 분위기는 무르익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었다.


밤이 이슥해지도록 나일론 뽕을 치다가 결국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되는 걸까? 그래서는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난생처음 찾아간 아가씨의 집에서 그만 잠을 자게 된 것이다. 내가 생각해 봐도 여간 뻔뻔한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나는 안방에서 같이 잠을 자고, 아가씨는 혼자 건넌방으로 건너가서 잠을 자게 되었다. 정녕 이래도 되는 것일까! 난 만감이 교차하는 바람에 잠이 제대로 올 리가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 경우도 없는 철면피가 또 있을까?


솔직히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난생처음 찾아간 아가씨네 집에서 잠까지 자게 되다니 이건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없는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갑자기 염치가 없어진 바보가 된 것인지, 아니면 전혀 예의를 모르는 철면피가 된 것인지 나 자신도 분간할 수가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어쨌거나 그런대로 하룻밤을 자고 그 이튿날이 되었다. 부엌에서는 벌써부터 아가씨와 그녀의 어머니가 같이 아침을 차리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뒤에는 또다시 정성껏 차린 밥상이 들어왔다.


난 다시 염치는 없지만 그 집 식구들과 같이 아침밥을 잘 먹었다. 밥을 먹고 나니 다시 나일론 뽕이나 하며 놀다가 또 점심을 먹고 가라고 하였다.


난 집으로 돌아갈 길이 멀기도 했지만 그래서는 절대로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놀다가 가라는 것을 뿌리치고 이번에는 아침밥을 먹자마자 길을 나서게 되었다. 내가 길을 나서자 그녀의 어머니는 몹시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아가씨를 바라보며 그럼 읍내까지 배웅을 해주고 오라고 하였다. 아가씨는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선뜻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마도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라는 어머니의 배려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난 혼자 가겠다고 극구 거절을 하였지만, 아가씨는 결국 나를 따라 기꺼이 나섰다. 그래서 2키로나 되는 읍내까지 나오면서 모처럼 아가씨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읍내까지 배웅을 해준 아가씨는 내가 버스에 오를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다가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서로 아쉬운 마음으로 손을 흔들어 주는 것을 미지막으로… ….


난 집으로 돌아와서 이삼일 있다가 다시 아가씨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 당시에는 일단 편지를 써서 보내면 답장을 받을 때까지는 적어도 일주일 이상은 기다려야 했다. 내 편지를 보고 답장을 바로 답장을 써서 보낸다 해도 편지가 가는데 3일 이상, 그리고 오는데 3일 이상 걸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편지를 보낸 지 열흘이 지나도록 기다렸지만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아마 바쁜 일이 생겨서 답장을 보낼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내 나름대로 생각했다. 어쩌면 배달 사고가 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그때는 등기 편지가 아닌 이상 배달 사고도 가끔 일어나곤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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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불안한 마음으로 며칠을 더 기다려보다가 다시 편지를 써서 보내게 되었다. 답장이 없는 편지를 다시 써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두 번째 편지를 보냈지만 그 뒤로는 아무리 기다려보아도 답장이 없었다.


왜 답장이 없는 것일까?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을까? 그 집에서 지내는 동안 아가씨의 태도를 보아도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내게 관심을 보이며 성의를 다해 예의를 다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왜 전혀 답장이 없는 것일까? 그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갑자기 좋은 사람이 나타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간단한 이유라도 밝히고 포기하겠다는 말이라도 하는 게 예의가 아니었을까?


난 또다시 답장이 없는 편지를 쓰고 싶기도 하였다. 그러나 체면이나 자존심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결국, 난 시쳇말로 ‘닭 쫓던 개’가 된 기분이 되어 맥이 빠지고 말았다. 요즘 말로 채인 것이 분명하였다. 뒷맛이 씁쓸하고 맥이 빠졌다. 원망스럽기도 하고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찌 됐건 그 뒤부터는 나 역시 완전히 포기할 수밖에 별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세 번째 도전


두 번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미 전국에서 보내온 약 40여 명 안팎의 아가씨들과 오랫동안 펜팔 경험을 하였다. 그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아가씨네 집까지 찾아가서 염치없이 하룻밤까지 자고 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녀와 헤어진 뒤로 두 번이나 편지를 보냈지만 어쩐 일인지 아무 답장도 오지 않았다. 왜 답장이 오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고 요즘처럼 답답한 마음을 문자나 카톡을 보내서 확인해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난 맥이 빠지는 바람에 다시는 펜팔을 하지 말아야 되겠다고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그나마 알량한 자존심까지 송두리째 잃고 말았다. 큰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시작했던 펜팔이 과연 이런 것이구나 하는 마음에 펜팔 자체가 갑자기 시들해지고 나 자신이 한없이 위축되기도 하였다.


그토록 식두들 모두가 반가이 맞으며 성의를 다해 나를 대했었던 것으로 믿었는데, 그리고 그 집에 찾아갈 때는 솔직히 전혀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잠까지 자고 가라고 막무가내로 붙잡아서 잠까지 자고 왔는데 무슨 까닭으로 두 번이나 편지를 보냈음에도 아무 답장이 없는 것일까? 한마디로 배신을 당한 느낌에 원망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렇게 몇 년동안 재미없는 나날을 보내다 보니 너무나 심심하고 무료했다. 그래서 다시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펜팔을 다시 시작해 보기로 마음 먹었다. 결심이 무너진 것이다 .역시 간사한 것이 인간이라더니 그게 맞는 말인 것 같았다.


난 서둘러 다시 편지를 써서 바로 우체통에 넣고야 말았다. 그리고 며칠 뒤 운이 좋게도 이 편지 내용도 다시 방송으로 나갔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전국에서 20여 명의 아가씨들로부터 편지가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전처럼 다시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점심 때가 가까운 무렵이었다.


직장에서 한창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누군가가 밖에서 나를 찾는다는 전갈을 받고 무심결에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는 예쁜 양산을 쓴 아가씨 하나가 나를 반기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놀랍게도 나와 그동안 열심히 펜팔 편지를 주고받던 아가씨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 먼 충청도에서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미리 온다는 말도 없이 그 먼 길을 이렇게 찾아오다니! 뜻밖이어서 몸둘 바를 모르는 마음에 더욱 반가웠다. 다시 가슴이 뛰면서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난 두말할 것도 없이 바로 조퇴를 하고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마땅히, 갈만한 곳이 없었다. 내가 근무하고 있던 곳은 워낙 시골이어서 그 부근에 음식점도 다방도 없었다. 그런 곳에 가려면 버스를 타고 적어도 8키로 이상은 나가야 했다.


초라한 볶음밥


할 수 없이 그녀에게 내가 자취를 하고 있는 집으로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묻게 되었다. 그녀는 대뜸에 좋다고 하였다. 하지만 난 여전히 걱정이었다. 자취방에 간다 해도 마땅히 대접할 거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난 급한 대로 몹시 시장하실 텐데 볶음밥이 어떻겠느냐고 묻게 되었다. 그녀는 한마디로 대뜸 좋다고 시원스럽게 대답하였다.


난 그녀에게 방에 앉아 편히 쉬고 있으라고 한 다음 바로 부엌으로 들어가서 프라이팬을 꺼냈다. 그리고는 프라이팬에 깡통에 보관해 두었던 돼지고기 기름을 한 숟깔 떠 넣었다.


지금은 돼지기름은 지방분이 많다고 모두 버리지만, 60년대에는 그것도 귀했다. 그래서 돼지고기를 구워먹고 난 뒤에 나온 지방 덩어리를 밥을 볶아 먹을 때 많이 이용하였다. 그나마 시골에서는 돼지고기 기름도 없는 집이 많아서 돼지고기 기름을 한 숟갈만 달라고 이웃집으로 얻으러 다니기도 하던 가난한 시절이었다.


난 돼지비계를 한 덩어리 넣은 프라이팬에 밥을 김치도 잘게 썰어 넣었다. 그리고 연탄불에 볶아서 프라이팬째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다행히도 그녀는 볶음밥을 한 숟갈 맛을 보더니 너무 맛이 있다며 자꾸 먹어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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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볶음밥을 어느 정도 배불리 먹었는지 너무 맛있게 먹었다며 집에 가서 먹고 싶으니 남은 것을 조금 싸주면 안 되겠느냐는 주문까지 하였다. 아가씨의 그처럼 맛있게 먹었다는 말에 난 그나마 마음이 놓이며 기분이 좋았다.


볶음밥을 점심으로 때운 난 그녀에게 멀리서 여기까지 왔으니 임진강 구경이나 하고 가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직장에서는 임진강이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임진강 구경을 하고 가면 너무 늦어서 안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일단 그나마 조금 번화한 법원리로 나가기로 하고 일단 시발택시에 올랐다(1950년대에 지프를 개조해서 만든 택시)


법원리에서 내리자 해가 긴 여름이어서 여전히 해는 중천에 높이 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극장에 가서 영화 한 편 관람해 보는 게 어떠나고 물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고개를 흔들었다. 영화관람을 하고 나면 너무 늦어서 서울에 살고 있는 언니네 집을 찾아가야 하는게 초행길이라소 그것도 어렵다고 하였다.


난 영화관람을 끝내도 나도 해가 많아서 서울까지 가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더니 그녀가 이번에는 못 이기는 척하고 순순히 극장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때 어떤 영화를 감상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영화가 다 끝나고 밖으로 나와도 여전히 해는 높게 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아직도 해가 저렇게 높이 떠 있으니 이제 서둘러 서울로 올라가도 늦지 않았다며 아쉽긴 하지만 여기서 그만 헤어지는 게 좋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녀의 태도가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변했다. 지금 서울로 올라간다 해도 곧 어두워지기 때문에 언니네 집을 찾아갈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아직도 해는 저렇게 높직하게 떠 있는데 왜 그렇게 마음이 변한 것일까. 그래서 아직도 해가 넉넉하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해도 그는 막무가내로 못 간다고 하였다.


그래서 몇 번 더 서울로 올라갈 것을 권했지만 여전히 안 된다고 하였다. 난 난처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했더니 일단 오늘 저녁은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떠날 생각이니 지금부터 이야기나 나누다가 헤어지자고 하였다.


그녀의 말대로 우린 그 근처 수양버들이 늘어진 조용한 개울가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둡기 시작하자 여관을 찾아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여관이 있는 곳을 찾아가고 있는데 그녀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흥, 어느 틈에 여관까지 미리 봐두셨네요.”


난 그말 한 마디에 그만 정이 똑 떨어지면서 기분이 상하고 말았다. 사실 난 법원리에 직원들과 같이 가끔 나갈 기회가 있어서 어디에 어떤 건물이 있는지 미리부터 대강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말을 듣기에는 마치 내가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할 때마다 이용하기 위해 미리 여관이 있는 곳을 파악해 두었던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그녀를 일단 여관에 데려다주고 여관비까지 지불해 준 다음 나는 다른 여관을 잡았다. 그때는 밤 12시만 되면 통행 금지 시간이 있던 때여서 내가 근무하는 곳까지 가는 차편도 이미 일찍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날 저녁 그녀가 묵을 여관 집에서 그녀는 나한테 뜻밖의 추태를 부리고 있었다. 그녀가 그런 추태를 부릴 줄은 전혀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그녀의 추태는 너무나 민망하여 자세히 밝히기조차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직접 만나기 전까지 편지 내용으로 보아서는 절대로 그럴 여자 같지는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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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도 그때의 생각을 하면 너무나 창피해서 기억조차 하기 싫었다. 괜히 쓸데없이 펜팔을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동안 펜팔을 통해 약 오십여 명의 아가씨들과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 받았다. 하지만 인연이 닿지 않았는지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도 결실을 맺지 못했다. 결국 난 그 뒤로 서른다섯 살이 되어서야 그것도 겨우 중매로 늦은 나이에 한 여자를 만나 늦게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마을 친구 중에 한 사람은 내가 펜팔을 통해 많은 아가씨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보고 몹시 부럽다고 하였다. 그리고 어느 틈에 그도 라디오에 투고하여 방송이 되더니 충청도 아가씨와 펜팔을 한동안 하다가 그녀와 바로 쉽게 결혼을 하여 지금도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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