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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는(15)

[옛날 학생들의 교육 환경]

by 겨울나무

나의 중학교 때의 성적은 졸업을 할 때까지 줄곧 바닥을 면치 못했다. 그러기에 누군가가 나의 성적을 물어본다면 앞에서부터 몇 번째라고 하기보다는 뒤에서부터 몇 번째라고 대답하는 편이 훨씬 쉽고 빨랐다. 교과 성적이 항상 그 모양이다 보니 선생님이나 친구들한테는 늘 공부를 못하는 돌대가리라는 조롱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변함없이 그처럼 바닥 성적을 면치 못하며 겨우 중학교를 졸업하자 바로 고등학교입학 시험을 보게 되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은 그나마 다행히도 경쟁률이 좀 낮기도 했지만 아마 운이 따랐기 때문인지 겨우 턱걸이로 합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여간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오직 책 읽기와 그림 그리기에만 매달린 채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학과 성적은 늘 바닥을 면치 못하고 운 좋게 그때마다 겨우 낙제만 면하면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부모님들의 교육열


동족상잔의 비극이 휴전으로 정전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50년대 중엽, 그때는 대도시를 제외한 어느 지방이나 대부분 가난한 사정은 비슷했으리라.


우리 집 역시 가난하기는 다른 집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겨우겨우 목구멍에 풀칠을 하는 정도였으니 그런 상황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고는 하지만 오죽했으랴.


집에서 초등학교까지의 거리는 시오리나 되는 먼 길이었다. 그리고 몸이 워낙 허약해서 저학년 때는 등에 업혀 다니기도 하였다. 그런데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초등학교보다 조금 더 먼 이십 리가 넘는 거리였다. 그래도 그건 좀 나은 편이었다. 심지어 삼십 리가 넘는 길을 매일 걸어서 다니는 친구들도 적지 않았다.


자동찻길이 제법 넓은 국도에는 버스가 하루에 한두 번씩은 왕래했지만 그 외에는 버스조차 전혀 다니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학생들 모두가 오직 두 다리에 의존한 채 걸어서 통학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다 걸어서 다니지는 않았다. 그나마 집안 형편이 조금 괜찮은 학생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그리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은 자전거를 살 여유가 없어서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는 것은 엄두조차 내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기에 자전거를 타고 통학을 하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그림의 떡처럼 몹시 부러워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집안 형편이 부유한 집에서는 중학교 때부터 자식을 서울로 보내는 경우도 한 마을에 한두 명씩 가끔 나타나곤 하였다. 집에서부터 학교까지의 거리가 너무 먼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가 하면 그와는 반대로 집안이 몹시 가난하거나 특히 여자의 경우 아예 중학교 입시조차 포기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여학생의 경우, 대부분 부모님들이 학교를 못가게 말렸던 것이다. 집안에 가만히 틀어박혀 밥을 짓거나 바느질하는 방법, 그리고 살림살이만 잘 하다가 시집을 가면 그만이지 여자가 그까짓 공부는 해서 어디에 쓰겠느냐며 부모들이 진학을 못하게 적극적으로 말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심지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멀리 식모로 보내는 가정도 많았다.


그 정도로 부모님들의 교육열이 부족했기 때문에 같은 형제라 해도 아들만 중학교에 보내고 딸은 아무리 머리가 명석한 머리를 가지고 공부를 잘한다 해도, 그리고 공부를 더 하고 싶은 향학열이 있다 해도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남학생들도 가령 열심히 입시 준비를 하여 어렵게 중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을 했다 해도 진학을 포기하는 남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그것은 중학교 입학등록금을 마련하기가 그만큼 어려울 정도로 살림살이가 가난했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러기에 그런 친구들에 비하면 난 그나마 행복한 편이었다. 우리 집 역시 가난하기는 다를 바 없었지만, 그나마 부모님의 허락 아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마음 놓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편안한 마음으로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통학 거리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가 먼 거리였지만 나는 학교가 멀어서 걸어다니기에 너무 지겹다거나 힘에 겹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의 경우 등하굣길에 특히 책을 손에 들고 다니면서 마음껏 읽을 수 있어서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학교와의 거리가 이십 리가 넘는 것은 그나마 양호한 편에 속했다. 심지어는 오십 리가 넘는 학생들도 있었다. 학교가 그렇게 먼 것은 그때 우리 지방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오직 단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학교까지의 거리가 오십 리가 넘는 학생들은 별수 없이 학교 근처에 방을 하나 얻어 자취를 하면서 다니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리고 1주일이나 2주일에 한 번씩 집으로 갈 때는 대부분 그동안 밀린 빨랫감을 가지고 가곤 하였다. 그리고 일요일 저녁이면 쌀이나 반찬거리를 가지고 자취방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유학이나 다름없는 힘겨운 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가사 돕기


1950년대, 그 당시 시골(지방)에서는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농번기인 오뉴월만 되면 집안에 있는 부짓깽이도 한몫을 한다고 했던가. 그러기에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기가 무섭게 누구나 논이나 밭으로 가서 일손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겨울철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집에서 편히 쉬거나 공부할 틈이 없었다.


공부할 틈이 없이 왜 그렇게 바빴는지!


봄이 되기가 무섭게 틈이 나는 대로 논을 갈고 밭을 일구며 씨앗을 뿌리기 위해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들판에 가서 살아야 한다.


일단 씨앗을 심고 나면 웬 잡초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지…….


옛말에 의하면 참고로 쇠뜨기 같은 잡초는 어찌나 잘 자라는지 아침나절에 김을 매고 나면 저녁 때 주인이 집으로 돌아갔는지 아직도 김을 매고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고개를 쓰윽 내밀고 올라올 정도로 풀이 잘 자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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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에 씨앗을 심고 나면 각종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 호미로 김을 매기 위해 하루 종일 밭에서 살아야 한다. 콩밭이나 동부, 녹두 팥밭 매기, 그리고 지게에 지고 집으로 운반하기 등, 여름철이면 잠시도 쉴 날이 없이 집안일을 돕느라고 학교에서 내준 숙제조차 할 틈이 전혀 없었다.


곡식들이 다 자란 뒤에는 일일이 낫으로 보리와 호밀 베기, 그리고 감자와 고구마 캐기 등, 그리고 지게에 지고 집으로 운반하기를 하느라 그렇지 않아도 무더운 여름철이어서 온몸에 비지땀이 마를 날이 없었다.


보리와 호밀, 밀 등 모든 곡식들을 일단 집으로 운반하고 나면 마당에 깔아 놓고 잘 말려야 한다. 그리고 다 마른 곡식들의 짚을 도리깨로 손이 부르트도록 털고나면 다시 키나 바람개비란 농기구로 낟알을 골라내야 하고 또 멍석을 깔아놓고 그 위에 곡식을 널어놓은 다음 햇볕에 잘 말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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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그뿐이랴.


나의 경우 공부는커녕 농사 일 돕느라고 잠시도 마음 놓고 편안히 쉴 날이 없었다.


소와 돼지, 그리고 닭 같은 가축을 기르는 집에서는 매일 소의 꼴 베기, 호크로 외양간이나 돼지우리 똥을 긁어모은 다음 두엄으로 운반하기, 볏짚이나 잡초를 베어다 외양깃과 돼지 우리에 깔아주기, 닭 모이 주기, 그리고 갑자기 비가 내리는 날이면 비상이 걸리곤 하였다. 마당에 널어놓은 곡식이나 열어놓았던 장독대 뚜껑 덮기 와 빨래 걷어들이기 등으로 잠시도 마음 놓고 쉴 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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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집안 일 도우랴 학교도 다니랴 참으로 바쁜 학창시절을 보낸 것 같다. 나의 경우, 부모님들은 숙제 같은 것을 해결할 시간조차 내주지 않았으며 그런 것은 전혀 염두에도 없었다. 물론 어느 가정이나 다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런 걸 생각하면 지금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들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조성에 세심한 배려와 신경을 써주고 있는 부모님 밑에서 너무나 행복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냥 부럽다는 마음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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