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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Jan 05. 2023

내가 어렸을 때는(14)

[개인적으로 두 번째 맞이한 해방]

제법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나는 신바람이 나서 마치 내 세상을 만난 것 같은 착각에 그처럼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속이 시원스럽고 후련하기도 하였다.       


내가 이토록 기분이 좋은 것은 우수한 성적으로 입시에 합격을 해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우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심한 매로 다스렸던 6학년 때의 그 무서운 담임 선생님에게서 벗어나 완전히 해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네 살 때 해방(광복)을 맞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또다시 두 번째 해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6학년 때 얼굴을 보기만 해도 그 넌덜머리가 나던 담임 선생님의 얼굴을 더 이상 만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아니 앞으로 평생 만나도 싶지도 않았다. 이제부터야 말로 내 세상이 된 것이다.   

   

중학교에 들어가니 신기한 것이 많았다. 우선 교과 시간마다 다른 선생님이 들어와서 가르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도서실이 있어서 마음대로 책을 빌려다 볼 수 있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고등학교와 건물이 같은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전쟁 직후여서 그런지 중학교는 건물 자체가 아직도 임시로 지은 가 교실이어서 어딘가 모르게 허술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한 학급의 교실이 군데 군데 따로따로 서 있었다. 교실 바닥은 흙바닥 그대로였으며 출입문도 양쪽에 하나씩 있었다.


유리창 역시 방충망처럼 생긴 창문에 밖이 전혀 보이지 않는 간유리 같은 것을 입혀서 밖이 전혀 보이지 않아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때와는 달리 분위기가 매우 변했다. 일정한 교복, 그리고 가운뎃 중(中)자가 달린 교모와 운동화를 처음으로 신고 다릴 수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천막 교실에서 배우던 때를 생각하면 마치 천국처럼 그처럼 편안하고 행복할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만 해도 대부분 보자기로 된 책보나 고작 어쩌다 군부대 쓰레기통에서 얻은 탄알 가방을 책가방 대신 들고 다녔지만 중학교에서는 학교에서 지정한 어엿한 책가방도 새로 들고 다닐 수 있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앉아서 공부할 수 있는 책상과 걸상이 있어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이 행복했다. 


그러나 어쩌다 고등학교 건물을 지나가다 보면 중학교와는 달리 매우 고급스러워 보였다. 비록 목조 건물이긴 하였지만, 교실 안이 환하게 들여다보이는 유리창 문이 달려있어서 매우 고급스러워보였다. 교실이 길게 하나로 붙어 있었지만 복도는 없었다.


 어쩌다 다른 교실에  일이 있을 때는 누구나 출입문을 통해 밖으로 나와서 다시 다른 교실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하였던가.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런 교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고등학생 선배들이 너무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중학교 때 가장 무서운 선생님은 체육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체육 시간만 되면 으레 야구방망이 하나를 들고 나타나서 빨리 운동장으로 집합하라고 소리소리 지르며 으름장을 놓곤 하였지만 실제로 그 방망이로 학생들에게 매를 가하는 것을 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니까 6학년 때 선생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중학교에 입한한 뒤부터 나에게는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너무 공부에 나태해졌기 때문에 성적이 나날이 뒤처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학년 말에는 과락 점수로 인하여 불명예스럽게 재시험을 보기도 하였다. 특히 수학과 영어, 그리고 물상 등의 점수가 두드러질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 당시에는 학년말 시험 성적에서 과락이 되면 따로 재시험을 보게 되어 있었다. 재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수험료를 지불하게 되어 있었다.    

  

재시험을 보았음에도 여전히 성적이 안 좋으면 낙제(유급)제도가 있어서 별수 없이 1년 후배들과 함께 같은 교실에서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매우 수치스러우면서도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난 재시험 대상자가 되면 그때마다 기어이 낙제만은 면해햐 되겠다는 각오로 며칠 밤을 꼬박 새워서라도 열심히 공부를 하여 번번이 낙제만은 면하곤 하였다. 낙제를 면하기는 했지만 재시험을 보기 위해 끌려다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렇게 부끄럽고 창피할 수가 없었다.      

 

나의 성적이 이처럼 곤두박질을 치게 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첫째 중학교에 도서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책 구경이라고는 별로 할 수 없었던 환경에서 자란 나는 중학교에 입학해 보니 도서실이란 게 있었다. 몹시 반가웠다. 그래서 그때부터 소공자, 소공녀, 암굴왕, 걸리버여행기, 톰소여의 모험, 15소년 표류기, 돈키호테 등, 세계명작동화소설책 등, 그 많은 책들을 마음대로 그것도 공짜로 빌려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공부시간에도 선생님 몰래 책상 밑에 명작동화책이나 소설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읽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기에 공부는 늘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공부 시간에 책을 읽다가 선생님에게 들켜 꾸중을 들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책을 읽는 것은 학교뿐만이 아니었다. 이십 리가 넘는 등하굣길이 오히려 고마웠다. 늘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심심한 줄도 몰랐고 등하굣길이 먼 것도, 그리고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책 읽기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 그리기에 취미를 붙이게 된 나는 중학교에 입학한 뒤부터는 특별활동 시간에 미술부에 들어가서 틈만 나면 그림 그리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공부는 늘 뒷전이고 늘 명작동화나 소설책 읽기, 그리고 그림 그리는 일에만 매달리다 보니 학과 성적은 늘 바닥을 면치 못한 채 공부를 못하는 학생으로 낙인이 찍힌 채 겨우 중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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