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우가 오랜만에 다시 꽃 가게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섰습니다. 꼭 한 달 만이었습니다.
한창 화분에 물을 주고 있던 꽃집 아주머니가 몹시 반가운 목소리로 맞이하였습니다.
인제나 그랬듯이 민우는 대답 대신 고개만 조금 끄덕였습니다.
민우는 이번에도 여전히 아무 대꾸가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예쁜 꽃들이 가득한 진열대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날씨는 매서운 겨울 못지않게 춥습니다. 하지만 꽃 가게 안은 그 옛날 마냥 아늑하고 포근했던 엄마의 품처럼 따뜻합니다. 제법 넓고 아담한 꽃 가게 안에는 갖가지 꽃들이 뿜어내는 독특하고도 진한 향내가 코를 찔렀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백합꽃 앞에 서서 서성거리는 민우를 보자 꽃집 아주머니가 활짝 핀 함박꽃 같은 웃음을 보내며 물었습니다.
"날씨가 이렇게 추울 땐 생화보다 조화가 어떻겠니? 얼어 죽을 염려도 없지만, 생화보다 값도 훨씬 싸고 오래가거든.”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민우는 이번에도 대답 대신 고개만 약간 약간 끄덕였습니다.
아주머니는 곧 예쁜 조화 몇 송이를 골라 민우에게 내일었습니다.
아주머니가 골라 준 조화는 민우의 마음에도 쏙 들었습니다.
민우는 서둘리 꽃가게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곧 시외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운전사 아저씨가 버스에 오르는 민우를 보자 반갑게 아는 체를 하였습니다.
민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약간 숙여 인사를 하더니 곧 빈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자리에 앉은 민우는 조금 전에 산 조화 다발을 아주 조심스럽게 무를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운전사 아저씨는 이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다시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무릎에 놓인 꽃다발만 바라보고 있던 민우가 문득 고개를 들고 어딘가를 바라보았습니다. 민우가 앉은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통로 왼쪽에는 웬 아저씨가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아저씨의 눈길이 민우와 마주쳤습니다.
민우는 저도 모르게 얼른 그 아저씨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돌렸습니다.
헙수룩하고 초라한 차림에 모자까지 푹 눌러 쓴 아저씨의 인상이 왠지 마음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아저씨는 전혀 표정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가끔 흘금흘금 민우를 바라보곤 하는 바람에 왠지 마음까지 움츠러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한동안 달리던 버스가 제법 넓은 벌판 한가운데에 멈춰 서는가 했더니 운전사 아저씨가 민우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사람이 사는 집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이었습니다.
민우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모자를 쓴 아저씨를 겁먹은 멀굴로 흘끔 바라보았습니다.
이번에도 또다시 아저씨의 눈길과 마주치게 되자 얼른 고개를 돌렸습니다.
민우는 운전사 아저씨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기가 무섭게 급히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은 민우 혼자뿐이었습니다. 버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속력을 내며 멀리 사라져 가는 버스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민우는 곧 발길을 서둘렀습니다.
어느새 넓은 들판 길을 지나 낮은 산들이 옹기종기 정답게 이마를 맞대고 있는 산기슭에 다다랐습니다. 그리고는 곧이어 산기슭에 난 가파른 오솔길을 따라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오솔길은 흡사 지렁이라도 기어간 자국처럼 이리 꼬불 저리 꼬불 산꼭대기를 향해 뻗어 있었습니다. 어찌나 힘들게 올랐는지 추운 날씨였지만 민우의 이마와 등에서 어느새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저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민우는 발길을 멈춘 채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민우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면서 더럭 겁이 났습니다. 정말로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지금 조금 전에 버스에서 만났던 바로 그 수상한 아저씨가 민우의 뒤를 급히 따라오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민우는 이상하다는 듯 여전히 겁이 난 얼굴로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었습니다.
아까 아저씨는 분명히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출발했던 걸 민우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금방 여길 오게 된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민우가 넋이 나간 듯, 그리고 약간 겁먹은 얼굴로 멍하니 아저씨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아저씨가 숨을 헐떡이며 민우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민우는 잔뜩 겁먹은 얼굴이 되어 고개를 약간 끄덕이고 있었습니다.
무슨 까닭인지 모를 일입니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니 모자를 쓴 아저씨는 까까머리였습니다.
아저씨는 이렇게 민우를 일단 안심시킨 다음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민우는 아저씨 고향이 밤골이라는 말에 조금 안심이 되면서 반갑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민우 자신도 및 해 전까지만 해도 엄마와 같이 그 마을에서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습니다.
그러자 문득 엄마와 같이 살던 때가 또 다시 그리운 기억으로 되살아났습니다.
비록 가난하긴 했지만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즐겁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추억들이 새삼 가슴이 시리도록 그립기 그지없었습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민우는 밤골에서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밖에 없는 엄마와 단둘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민우가 아빠를 찾을 때마다 엄마는 좀 더 기다려 보라고 이렇게 얼버무리곤 하였습니다. 민우의 얼굴조차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그런 말을 하고 있는 엄마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기운이 없어보였습니다.
그러나 민우는 날마다 아빠가 어서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꼭 돌아오실 것이라는 부푼 기대를 버리지 못한 채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부터 엄마는 시름시름 않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슨 병에 걸린 것인지 일어나 있는 시간보다는 누워서 지내는 시간이 차츰 더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약 5년 전, 그렇게 자리에만 누워 지내던 엄마는 결국 민우만을 남겨 놓은 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길을 떠나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엄마를 잃은 큰 충격에 민우는 그 뒤부터 차츰 말수가 줄어들었습니다. 아니 줄어든 게 아니라 마치 말못하는 벙어리처럼 전혀 말이 없는 아이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 세상에 의지할 곳이라고는 전혀 없는 민우는 그나마 다행히 지금까지 읍내에 사시는 이모님 댁에 얹혀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가파른 오솔길을 오르고 산등성이를 넘어 엄마가 쉬고 있는 곳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저씨가 다시 물었습니다.
민우는 여전히 아무 대꾸도 없이 엄마의 무덤 앞으로 다가가더니 공손히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무덤 앞에는 민우가 한 달 전에 꽂아놓은 백합꽃 세 송이가 흉한 모습으로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민우는 시든 꽃을 뽑아낸 다음 새로 사 온 조화를 정설껏 꽂았습니다. 새로 꽂은 꽃의 모습은 마치 그 옛날 엄마의 웃는 얼굴처럼 밝고 아름답기 그지없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민우는 무덤에 엎드리며 두 번 공손히 큰 절을 올렸습니다. 민우의 두 눈에 어느새 굵은 눈물방울이 맺히고 있었습니다.
민우가 그만 터져나오는 슬픔을 이기지 마침내 어깨를 들먹이며 울기 시작합니다. 마치 살아 있는 엄마 품에라도 안기듯 갑자기 두 팔을 벌려 무덤을 꼬옥 얼싸안고 엎드렸습니다. 다시는 절대로 엄마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더욱더 있는 힘을 다해 꼭 껴안았습니다.
지금까지 민우의 곁에 서서 그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아저씨의 눈가에도 어느새 긁은 이슬이 눈물이 맺히면서 양쪽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아저씨는 불쌍해서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는 듯 무덤 위에 엎드려 있는 민우를 두 팔로 와락 껴안으며 소리 내어 덩달아 흐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저씨의 갑작스런 태도에 민우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엄마를 꼭 껴안은 채 움직일 줄을 모르고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아저씨는, 아니, 민우 아빠는 민우를 더욱더 힘주어 꼭 껴안았습니다.
두 사람은 한 덩어리로 엉긴 채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습니다.
어디선가 또다시 찬바람 몇 가닥이 몰려오면서 두 사람의 등을 번갈아 어루만져 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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