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깊고 깊은 산골짜기입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좀처럼 닿지 않는 그 산골짜기에는 갖가지 크고 작은 나무들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울창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전나무, 가문비나무, 상수리나무, 아까시나무, 떡갈나무, 수백 년씩 묵은 늙은 소나무 등 종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나무들이 어우러져 평화롭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사철을 가리지 않고 갖가지 산새들이 찾아와 저마다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나무들을 즐겁게 해 주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요리 꼬불 조리 꼬불, 산골짜기 여울마다에서는 수정처럼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며 맑고 고운 소리로 노래를 부릅니다.
여울물 소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산새들의 노랫소리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토록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 그러나 그런 곳이라 해서 모두가 살기 좋고 평화롭기만ㄴ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산골짜기에는 떡갈나무 한 그루가 오래전부터 수많은 나무들 틈에 끼여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비록 나이는 많았지만 다른 나무들에 비해 유난히 키도 작고 볼 품이 없는 나무였습니다. 하지만 얼른 보기에도 아주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란 떡갈나무였습니다.
굵고 육중하게 자란, 그리고 밑동이 위로 올라가다가 두 갈래로 뻗은 떡갈나무의 모습은 영락없이 아이들이 흔히 좋아하는 고무줄 새총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오늘도 부지런한 산새들의 노랫소리와 함께 어김없이 아침이 밝아 왔습니다.
"와아, 잘 잤다. 벌써 날이 밝았나?"
산새들의 노랫소리에 단잠에서 깨어난 나무들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습니다.
나무들의 기지개 켜는 소리에 떡갈나무는 자신도 모르게 이맛살이 찌푸려졌습니다. 나무들의 비웃음과 놀림이 지겹도록 듣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나무들은 눈을 뜨기가 무섭게 이른 아침부터 떡갈나무를 힐끗힐끗 바라보며 비웃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오늘 아침에도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아까시나무였습니다.
”야, 땅딸보 게으름쟁이야! 넌 아직도 자고 있는 거냐? 으이구, 생긴 대로 눈고 있다니까. 하하하…….“
떡갈나무는 자는 척, 그리고 못 들은 척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전나무가 끼어들었습니다.
"잰, 도대체 뭘 먹고 살기에 남들 자랄 때 자라지 못하고 늘 저 모양 저 꼴이지?”
전나무가 비웃자, 그다음에는 다른 나무들도 재미있다는 듯 덩달아 하나둘씩 앞을 다투며 끼어들었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저렇게 못생긴 나무는 보다 보다 처음 본다니까. 하하하…….”
"그렇다고 예쁜 꽃을 피우길 하나, 탐스럽고 맛좋은 열매가 달릴 줄 아나. 으이구 병신 같으니라구.“
"누가 아니래. 저럴 거라면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니까. 낄낄낄…….”
순간, 떡갈나무는 가슴속이 온통 갈기갈기 찢어져나갈 것처럼 괴로웠습니다. 분하고 야속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채 못 들은 척할 뿐, 어쩌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아아, 난 왜 이처럼 못나게 태어난 걸까? 언제까지 이런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지!‘
떡갈나무의 입에서는 저절로 한숨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늘 그랬듯, 그때마다 아주 오래전에 엄마가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지금까지 떡갈나무는 엄마가 해준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나우들
한테 업신여김을 당할 때마다 엄마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아무리 괴로워도 참곤 하였
니다.
"쳇! 아무리 참아도 이렇게 괴롭기만 한데, 대체 언제 무슨 큰일을 할 수 있다는 거야?”
떡갈나무는 자신을 낳아 준 엄마가 미웠습니다. 이 세상 모두가 원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외롭고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어느 해 여름이었습니다.
그해 여름엔 장마가 시작되기가 무섭게 유난히도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마치 긁은 장대 줄기처럼 퍼붓는 빗줄기는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게다가 거센 바람까지 무섭게 몸아치고 있어서 말 그대로 물동이로 퍼붓듯 여러 날을 그렇게 쉬지 않고 무섭게 퍼붓고 있었습니다.
나뭇가지를 꼭 잡고 매달린 나뭇잎들마다 거센 바람에 떨어져 나가지 않기 위해 연신 애처로운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바람과 벼락에 맞아 여기저기에서 쉴 사이 없이 육중한 나무들이 통째로 부러져 나가는가 하면, 나뭇가지들이 무참하게 부러지고 찢어지며 땅비닥 밑으로 나뒹굴었습니다.
나무들은 너터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눈을 꼭 감은 채 모두가 젖 먹던 힘을 다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너와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며 오직 비바람에 쓰러지지 않기 위해 젖뭑은 힘을 다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평화롭기만 하던 산골짜기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기지를 혼드는 거센 바람 소리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자지러지는 비명소리로 시끄럽기 그지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요, 생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습니다.
난 데 없이 이번에는 떡갈나무 바로 곁에서 잔뜻 겁에 질린 듯한 다급한 신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떡갈나무는 겁에 질러 꼭 감고 있던 눈을 번적 뜨고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곳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신음 소리는 다름 아닌 바로 아카시아나무의 입에서 질러대는 신음 소리였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그처럼 튼튼해 보이기만 하던 아까시나무가 지금 힘없이 쓰러지고 있었습니다.
"어, 어어! 나. 나 좀 살려줘!’
그처럼 키 크고 늘 기세 당당하기만 하던 아까시나무는 결국 뿌리까지 뽑힌 채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삽시간에 나뒹굴고 말았습니다.
"으으윽, 으아악!“
아까시나무가 쓰러지는 순간, 떡갈나무도 덩달아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다시 두 눈을 꼭 감고 말았습니다. 아까시나무가 떡갈나무를 향해 쓰러지면서 하필이면 떡갈나무를 덮쳐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까시나무는 그나마 운이 꽤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 육중한 몸뚱이를 떡갈나무의 몸에 기댄 채 쓰러져서 땅바닥에 완전히 쓰러지는 불행만은 피할 수 있었으니까요.
아까시나무는 마침, 고무줄 새총처럼 양쪽으로 뻗은 떡갈나무의 기둥 한가운데에 육중한 몸뚱이를 편안하게 의지한 채 더 이상 쓰러지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덕분에 송두리째 뽑혀 나갈 뻔했던 뿌리도 절반 정도는 땅에 박혀 있었습니다.
떡갈나무 덕분에 목숨까지 영영 잃은 뻔했던 끔찍한 불행은 막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으, 으으음.…….”
떡갈나무는 여전히 두 눈을 꼭 감은 채, 양쪽 어깨가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을 참느라 연신 신음을 토해 내고 있었습니다. 육중한 체구의 아까시나무가 고무줄 새총처럼 생긴 떡갈나무의 양쪽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한동안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아카시아나무가 마침내 정신이 들자 떡갈나무를 향해 입을 열었습니다.
"어디 다친 데는 없니? 내가 늘 너를 그토록 업신여기고 괴롭혔더니 아마 벌을 받은 거 같구나. 그런데 네가 생명의 은인이 될 줄이야.“
‘아아, 그렇게 늘 눈만 뜨면 괴롭히기만 하던 아까시나무의 입에서 잃게 따뜻한 말을 듣게 될 줄이야!’
떡갈나무의 눈에서는 어느새 지금까지의 미웠던 마음보다는 고마움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이토록 감격해 보기는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아네요. 너무 미안해하지 마세요. 힘은 좀 들지만 그런대로 견딜만 한걸요. 그보다도 이렇게 목숨을 건지게 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떡갈나무는 문득 오래전에 엄마가 들려준 목소리가 다시 생생하게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아카시아나무가 너무 미안하다는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아 이렇게 마음씨가 고울 수가! 그동안 너를 괴롭혀 온 나를 용서해 줄 수 있겠니? 으흐흑…….”
아까시나무는 지금까지 떡갈나무를 업신여기고 괴롭혔던 지난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있었습니다.
"용서해 드리고말고요. 그런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마시고 어서 전처럼 건강하게 몸이나 추스르세요.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린 서로 이웃사촌이잖아요.“
"으흐흑, 고맙다, 내가 너를 볼 면목이 없구나!“
너무나 마음씨 고마운 떡갈나무의 대답에 아까시나무는 그만 흐느끼지 시작하였습니다.
어디들 용케 숨어 있었는지 그동안 잠잠했던 산새들의 고운 노랫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날씨가 활짝 개면서 산골짜기에 다시 전과 같은 평화가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