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춤법 익히기]
마지막 생일

by 겨울나무

새벽 5시,


갑자기 간호사실에 ’엘리제를 위하여'곡이 조용히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입원실에서 부르는 벨 소리였습니다.


오늘도 803호실에서 부르는 호출 소리였습니다.

박 간호사가 불안해진 목소리로 급히 인터폰에 대고 물었습니다.


"네, 간호사실입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 보세요?“

"미안합니다. 빨리 좀 와 주셨으면 해서요."


곧 기운이 다 빠져 버린 듯한 할아버지의 가녀린 목소리가 되돌아왔습니다.


803호실이라면 할아버지 한 분이 벌써 2년 전부터 병상에 누운 채 투병을 하고 있는 병실이었습니다. 암이었습니다. 게다가 요즈음 할아버지의 병세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어서 언제 어떻게 될지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할아버지였습니다.


"할아버지! 어디가 불편하세요?“


급히 병실로 달려온 박 간호사가 침실에 누워 있는 할아버지의 표정부터 살펴보며 물었습니다.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할아버지는 오늘따라 더욱 기운이 없어보였습니다.


잠깐 머뭇거리고 있던 할아버지가 겨우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바쁜 사람을 불러서 정말 너무 미안해요. 몸이 안 좋아진 게 아니라 어려운 부탁이 한 가지 있어서…….“


박 간호사는 그제야 겨우 안심이 된 듯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물었습니다.


"무슨 부탁인데요? 어서 말씀해 보세요.”

"미안하지만, 파인애플 세 개만 좀 사다 줄 수 있어요? 크고 탐스럽게 생긴 놈으로 말이오. 도무지 심부름 시킬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네에?“


박 간호사는 하도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 사람을 불러서 쓸데없는 없는 심부름이나 시키고 있는 할아버지가 못마땅하다 못해 짜증이 났습니다. 그래서 톡 쏘듯이 대꾸하였습니다.


”할아버지, 저 지금 몹시 바쁘거든요. 그런 심부름을 해드릴 시간이 없는 사람이라고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아까보다 더 미안해진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바쁘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내가 갑자기 파인애플 생각이 나서 그래요.“

”……?“


박 간호사는 더욱 못마땅한 표정이 되어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할아버지의 마음을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까보다 더 퉁명스러워진 목소리로 딱 잘라 대꾸하였습니다.


"할아버지, 옆에 할머니가 계시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심부름은 이따가 할머니한테나 부탁하셔도 되잖아요.“


박 간호사의 토라진 목소리에 할아버지는 화들짝 놀란 얼굴이 되어 손가락을 급히 입에 갖다 대며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쉿! 조, 조용히 해요. 바쁜 건 잘 알고 있다니까요. 할멈은 어젯밤에 나 때문에 꼬박 새우고 조금 전에야 겨우 잠이 들었어요. 그리고 할멈이 깨어나기 전에 파인애플이 꼭 필요해서 그런다니까요.”

”……?“


박 간호사는 더 이상 상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

다. 그리고는 기분이 상한 얼굴로 곧 병실 밖으로 뛰쳐나오고 말았습니다.


"쳇! 살다 보니까 정말 이상한 할아버지를 다 보겠다니까!“


병실을 뛰쳐나온 박 간호사는 왠지 마음에 걸렸습니다.


짜증이 나기는 했지만, 할아버지의 간절한 부탁을 쉽게 거절하고 나니 마음속이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결국 매점까지 급히 달려가서 파인애플 세 개를 샀습니다.


박 간호사는 조금 전에 몹시 기분이 상했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다시 병실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할아버지 앞에 파인애플을 내밀었습니다.

할머니는 간이침대에 누운 채 아직도 곤한 잠에 취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여기 파인애플 가지고 왔어요. 그리고 심부름은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아셨죠?”

"아, 고마워요. 정말 수고 많았어요.“


할아버지는 활짝 밝아진 얼굴로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가며 고마워하였습니다.

그릭 간호사가 다시 막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였습니다.


”어이, 잠깐만!“


할아버지가 급히 병실 문을 나가려던 박 간호사를 또 다시 급히 불렀습니다.


”기왕 수고한 김에 이 파인애플을 좀 보기 좋게 벗겨 주면 안 되겠소?“

”네에엣?“


박 간호사의 표정이 다시 일그러지면서 어두워지고 말았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었더니 보따리를 달라고 한다더니 할아버지가 바로 그런 염치없는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거에요. 염치없는 일인 줄은 알고 있지만, 알다시피 난 손을 잘 쓸 수가 없어서 그래요. 그리고 어디서 좀 예쁜 접시 하나만 빌려올 수 없어요?”


"접시라니요? 그건 또 왜요?"

"기왕이면 잘 벗겨놓은 파인애플을 예쁜 접시에 보기 좋게 올려놓고 한번 먹어보려고 그래요.“


박 간호사는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이른 아침부터 잘못 걸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박 간호사는 다시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면서 파인애플을 예쁜 모양으로 벗겨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 간호사실에 있던 커다란 접시를 가져다가 있는 솜씨를 다해 파인애플을 보기 좋게 올려놓았습니다.


”고마워요. 정말 수고 많았어요.“


할아버지는 박 간호사가 정성을 다해 담아놓은 파인애플 접시를 바라보면서 매우 만족한 듯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너무 속이 상한 박 간호사는 그런 인사조차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 대꾸 한마디 없이 도망치듯 병실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는 곧 교대 시간이 되어 퇴근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날 밤, 교대 근무를 하기 위해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 박 간호사는 다른 간호사들의 입을 통해 그야말로 다시 입이 딱 벌어질 만큼 안 좋은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게 사람의 운명이라더니 글쎄 그렇게 빨리 돌아가시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어.“

"그건 그렇고 아마 오늘이 마침 할머니 생신이었다지?"


“맞아. 할머니가 평소에 파인애플을 그렇게 좋아하셨대. 그래서 할아버지가 할머니 몰래 파인애플을 대접해 드리고 싶어서 그렇게 애를 쓰셨다지 뭐야.”

"우와아, 어쨌거나 할머니는 정말 참 행복한 분이지 뭐야. 결국, 할아버지로부터 돌아가시기 전에 정성이 듬뿍 담긴 마지막 사랑의 생신 선물을 받으셨잖아."


”……!!“


박 간호사는 순간 쇠뭉치로 머리를 맞은 듯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아! 이렇게 생각이 짧은 내가 그래도 명색이 간호사라는 말을 들으며 지금까지 환자들을 보살피는 척하고 있었다니……!‘


박 간호사는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에 당장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숨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사랑하는 그 깊고도 넓은 뜻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그저 할아버지만을 미워했던 자기 자신이 몹시 원망스럽기도 하였습니다.


좀더 따뜻한 마음으로 조금 더 잘 해드리지 못했던 일이 그렇게 께름칙(*)하고 마음에 걸릴 수가 없었습니다.


'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혹시 이다음에 다시 만나 뵙게 된다면 정말 잘해 드릴게요.’


박 간호사의 두 눈에서는 어느새 굵은 이슬방울이 맺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 )



--------- * -----------



<우리말 익히기>


※ '께름칙하다'와 '꺼림칙하다’

뜻 : 어떤 일 또는 사람이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있어 언짢은 데가 많다.


(참고)


1989년 1월 19일, 새로운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 규정을 확정 공포하고, 1년여의 시행 을 거친 끝에 1989년 3월 1일을 기해 본격적인 사용에 들어갔다.

이때 '복수 표준말'도 모두 표준말로 허용하게 됨에 따라 어감의 차이를 나타내는 단어 또는 발음이 비슷한 단어들이 다 같이 널리 쓰이는 경우에는 그 모두를 표준말로 삼는다.

또는 방언이 표준어보다 더 널리 쓰게 된 것도 표준어로 삼기로 하였다. 따라서 '께름칙하다'와 '꺼림직하다‘ 역시 복수 표준말로 정해진 단어로서 둘 다 표준말로 정하게 되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