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꿈

by 겨울나무

새해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따라 이른 아침부터 할아버지의 마음이 몹시 바쁩니다. 어서 할머니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는 늘 그랬듯, 작은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습니다. 가방 속에는 늘 할머니가 좋아하는 과일이나 음식 등 여러 가지 간식이 들어있습니다.


날씨는 몹시 추웠습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칼바람이 할아버지의 온몸을 사정없이 할퀴기 시작합니다. 지팡이 하나에 온몸을 의지한 채 전철역을 향해 한 걸음 두 걸음 옮기는 할아버지의 몸은 곧 바람에 날아갈것처럼 불안해 보입니다.


"어이구, 무슨 놈의 바람이 이렇게 심하게 분담.“


한동안 힘겹게 걷던 할아버지가 이윽고 전철역에 다다랐습니다.


할아버지는 오늘도 조금이라도 빨리 할머니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급히 전동차에 올라탔습니다.

할머니가 입원한 병원까지는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합니다. 그리고 지하철에서 내려서도 다시 10분 이상을 걸어야 하는 곳입니다.


늘 건강하기만 했던 할머니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입원을 하게 된 것은 약 4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할머니는 곧 수술대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수술을 받고 나면 바로 건강이 좋아질 것으로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할머니의 병세는 좀처럼 회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설상가상으로 얼마 전부터는 치매 증상으로까지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벌써 눈 깜짝할 사이에 4년이란 세월이 흘러버린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약 4년 동안 할머니를 만나보기 위해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병원에 다니고 계십니다. 참으로 대단한 정성이 아니고는 그럴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금년에 85살이나 되셨으니까요.


하지만 얼마 전부터 할아버지의 건강 역시 날이 갈수록 쇠잔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몸도 눈에 띌 정도로 여위셨고요.


그러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지금까지 무려 4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병원을 찾고 있는 할아버지였습니다.


"할아버지, 우리들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걱정마시고 이제부터는 가끔 오시는 게 어떠세요? 이렇게 무리하다가 할아버지마저 쓰러지시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가끔 요양보호사들이 안쓰러운 생각에 할아버지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애를 썼지만, 그때마다 할아버지의 고집은 좀처럼 꺾이지를 않았습니다.


"아니야. 괜찮다니까. 이직까지는 다닐 만하니까 괜한 걱정은 하지 말아요.”


할아버지는 마침내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고 병원 앞에 다다랐습니다. 급히 걸어오느라 할아버지는 연신 가쁜 숨을 혈떡거리고 있었습니다. 몹시 추운 날씨인데도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습니다.


'오늘은 할멈의 건강 상태가 좀 더 나아졌으면 좋으련만……!“


지금 할아버지의 마음속에는 오직 할머니의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할머니를 곧 만나볼 수 있다는 생각에 할아버지의 표정은 해맑은 어린아이의 표정처럼 밝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고 몹시 설레기도 하였습니다.


이윽고 할아버지가 입원실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들어섰습니다.


”어머! 할아버지 오셨어요? 할아버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할아버지를 본 요양보호사가 반가운 낯으로 먼저 새해 인사를 하였습니다.


지금 한창 할머니의 머리를 정성을 다해 손질을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아, 고마워요. 선생님도 새해 복 많이 받아요. 매일 할멈 간병하느라고 고생이 많죠? 앞으로 그 고마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허허,“


할아버지는 요양보호사를 향해 몇 번이고 허리를 굽혔습니다.


"아닙니다. 할아버님, 저희들은 당연히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인 걸요.“


할아버지가 이번에는 습관처럼 곧 할머니 곁으로 다가가서 매우 다정한 목소리로 새해 인사를 하였습니다.


"임자, 새해 복 많이 받아요. 금년에는 모든 병도 훌훌 털어 버리고…… 아참, 그리고 오늘 아침에 떡국은 좀 먹었소?“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를 겁먹은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보며 대답이 없습니다. 그러자 보호사가 얼른 할머니 대신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네, 그렇지 않아도 오늘이 설날이어서 아침에 떡국이 나왔어요. 그래서 할머니도 떡국 한 그릇을 뚝딱 맛있게 잘 잡수셨어요.“

"아하, 그랬군. 그거 아주 잘 됐네.“


할아버지는 매우 흐뭇하고 만족한 얼굴로 할머니의 손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할머니는 잔뜩 겁에 질린 눈빛으로 할아버지가 내민 손을 힘껏 뿌리쳤습니다. 그리고는 두 손을 등 뒤로 감춘 채 여전히 겁이 난 눈빛으로 할아버지를 향해 크게 소리쳤습니다.


"도대체 댁은 뉘시길래 망측스럽게 아침부터 남의 손을 잡으려고 이러슈?“

혹시나 하고 기대를 했던 할아버지의 마음은 삽시간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나. 이렇게 가슴이 아프고 서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제만 해도 아무 일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낸 할머니입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또다시 영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입니다.


할머니는 전에도 가끔 오늘처럼 이렇게 할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해서 할아버지의 애를 태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허어, 이런 변이 있나. 임자, 나야, 나. 이젠 나까지 또 몰라보겠어?“

"뉘신데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 자꾸 귀찮게 시비를 걸고 이 야단이슈? 나 참,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

”……?!“

할아버지는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옵니다. 그리고 몹시 서운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요양보호사가 할머니를 향해 달래듯 다정하게 입을 열었습니다.

"할머니, 왜 그러세요? 정말 할아버지를 몰라보시겠어요?“


그러나 할머니는 여전히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딴소리를 합니다.

"떽기! 내가 우리 영감도 몰라보는 천치 바보인 줄 알아? 난 지금 정신이 말짱하다니까. 나를 어떻게 보고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을 하고 있는 거야? 저 양반 꼴도 보기 싫으니 경찰을 부르기 전에 어서 이 방에서 내쫓으라니까!“


요양보호사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이번에는 할아버지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할아버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할아버지도 알고 계시죠? 요즘 할머니의 정신이 조금씩 왔다 갔다 해서 그런 거니까 다시 곧 좋아지실 거예요.”

”……?!“


요양보호사의 말에 할아버지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저 고개만 약간 끄덕이며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요양보호사의 말이 맞았습니다. 요즈음 할머니는 어떤 때는 할아버지를 보고 오라버니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아저씨'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또 할아버지를 알아보고 '영감이라도 부를 때도 있었습니다. 칠면조의 깃털 색깔이 수시로 변한다고 하더니 지금 할머니의 병세가 바로 그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몹시 안타깝고 서운한 표정으로 한동안 할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할아버지의 눈에서는 어느새 굵은 이슬방울이 맺혀 흘러내라고 있었습니다.


‘못난 사람한테 시집을 와서 평생 호강 한 번 못해 보고 일에 묻혀 고생만 하다가 그만 몹쓸 병에 걸린 가엾고 불쌍한 사람!“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할머니는 그 누구 못지않게 똑 부러질정도로 살림도 잘하고 부지런하며 마음씨 또한 착했습니다.

그토록 어느 한 구석 나무랄 데 없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이처럼 다른 사람으로 변하다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생각할수록 불쌍해서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마음 아프고 후회가 되는 것은 할머니가 건강할 때 조금만 더 따뜻하게 대해 주고 좀 더 잘해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후회로 할아버지의 가슴은 갈가리 찢어질 것처럼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할아버지는 조금이라도 할머니의 병이 낫기를 바라는 마음, 그리고 건강할 때 좀 더 잘해 주지 못한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기 위해 그동안 할머니에게 온갖 정성을 다하곤 했던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할머니를 알뜰히, 그리고 지극정성을 다해 보살피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마다 주위 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저런 할아버지가 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아암, 아무리 눈을 비비고 찾아봐도 저런 할아버지는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고말고,“


병원에 근무하는 요양보호사들, 그리고 환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의사 선생님들까지도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쏟는 지극한 정성과 사랑에 크게 감동하였습니다.

그 감동은 온 병원 내에 온통 따뜻하고 훈훈한 기운을 감돌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오늘따라 자신을 몰라보는 할머니를 보자 할아버지는 한꺼번에 맥이 쭉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그 옛날 할머니가 건강할 때 좀 잘해 주지 못한 죄책감에 마음이 몹시 괴롭고 슬펐습니다. 이제 와서는 아무리 후회해 봐야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더욱 미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다 보면 차도가 보이겠지!’

할아버지는 추운 날씨에 힘겹게 먼 길을 달려온 피로가 쌓여서 그런지 갑자기 졸음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할아버지는 잠깐 휠체어에 몸을 맡긴 채 스르르 두 눈을 감았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가끔 할머니를 태우고 신선한 바깥바람을 쐐어 주던 휠체어였습니다.

휠체어에 편안한 자세로 누운 할아버지는 어느새 깜빡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곤한 잠이 든 할아버지는 어느새 달콤한 꿈속을 혜매고 있었습니다. 그 옛날 젊었던 시절의 꿈이었습니다.

백화점에 간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다니며 정답게 쇼핑을 하고 있었습니다. 할머니에게 멋진 모자와 선글라스도 사주고 요즈음 유행하는 옷도 몇 벌 샀습니다.


금방 새로 산 옷을 차려입은 할머니의 모습이 그렇게 어여쁘고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바로 할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할머니도 행복에 겨워 어쩔 줄을 몰라 마냥 싱글벙글 웃고 있었습니다.

백화점에서 나온 할아버지는 곧 손수 할아버지가 모는 고급 승용차를 함께 타고 신바람이 나게 공항을 향해 달려간 다음 비행기에 탑승하였습니다. 할머니가 평생 그토록 소망했던 비행기를 타고 마침내 해외여행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할머니는 몹시 즐겁고 행복해 하였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것은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 할아버지는 오랜만에 깊은 단잠에 빠져 마냥 즐거운 꿈나라를 여행하고 있나봅니다.


여전히 곤한 잠에 취한 채 오랜만에 환하게 활짝 웃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그렇게 행복하고 편안해 보일 수가 없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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