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의 은인

[6.25 전쟁 피란 중 민청의 은혜에 관한 이야기]

by 겨울나무

1950년 6월, 그해 여름은 유난히 가뭄이 극심했다.


휴전선(그 당시에는 3.8선)과 가까이 인접한 농촌 마을,


집집마다 힘겹게 모내기를 끝내기는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하루가 다르게 점점 말라 비틀어져 가는 모와 논바닥을 바라보며 한숨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한숨뿐만이 아니었다. 가슴속까지 바작바작 타들어 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궁여지책으로 이른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그야말로 밤하늘에 별이 보일 때까지 매일 거북이 등처럼 쩍쩍 갈라져 가고 있는 논에 물을 대기에 바빴다. 물 한 방울이 그렇게 귀할 수가 없었다.


요즈음처럼 양수기 등의 기계를 이용해서 쉽게 푸는 게 아니었다.


논 한쪽 귀퉁이에 있는 웅덩이에 고인 물을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 물통이나 용두레를 이용해서 푸는 그야말로 뼈가 빠질 정도로 고된 작업의 연속이었다.


물을 대기가 힘이 든다고 잠깐 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면 쩍쩍 갈라졌던 논바닥이 금방 도로 바짝 말라붙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식구들이 많은 집에서는 식구들 모두가 총 동원하여 논바닥에 나와 번갈아 가며 물을 푸기도 하였다.






마침내 그렇게 힘든 나날을 오랫동안 보내던 6월 25일 오전이었다.


“우르릉, 꽝, 우르릉 꽈당!”


그날따라 멀리 북쪽에서는 갑자기 요란한 천둥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북쪽 하늘은 바라보며 반가운 마음에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되었다. 학수고대하며 몽매에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가 곧 내릴 것이라는 기대에 얼굴 표정도 활짝 밝아졌다.




그날도 소년은 이웃집 친구네 마당에 가서 친구들과 어울려 한창 구슬치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였다. 소년은 그때 겨우 초등학교 2학에 재학중인 학생이었다.


오늘도 새벽부터 들에 나가 물을 푸던 소년의 아버지가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소년에게 다가오며 밝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얘야, 아직 밥 안 먹었지? 얼른 가서 밥이나 먹자. 오늘은 비가 오려나 보다.”


아버지의 활짝 갠 표정에 소년도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를 졸졸 따라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때 밖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날따라 마을 앞 먼발치에 있는 한길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남자는 지게에 이불이며 그릇 등, 살림살이를 잔뜩 진 채 길게 줄을 이루며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었다.


여인들 역시 하나같이 등에는 아기를 업고 머리에는 짐을 이고 있었다. 소도 여러 마리 같이 가고 있었는데 소의 등마다 짐을 잔뜩 실은 채 걸어가고 있었다.


소년의 눈이 휘둥그렇게 되어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저 사람들 어딜 가는 거예요?”


“글쎄다.”


나중에야 그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서 물어보니 전쟁이 나서 피란을 가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다.


아까부터 지금까지 점점 가까이 들려오고 있는 요란한 소리, 그것은 정녕 천둥소리가 아니었다. 공산당들이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쳐들어오며 쏘아대고 있는 대포소리였던 것이다.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소년은 피란을 가는 게 무척 재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우리도 저 사람들처럼 피란을 가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그건 소년이 조른다고 가고 안 조른다고 안 갈 일이 아니었다.


소년의 가족도 곧 서둘러 부지런히 피란 짐보따리를 싸기 시작했다. 그러자 철부지 소년은 신바람이 났다. 매우 재미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대충 짐을 싼 소년의 식구들은 곧 피란민 틈에 끼어 피란길을 나서게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소년의 누나와 네 식구가 함께 남부여대하고 난생 처음 피란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렇게 피란을 가면서 시장할 때마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끼니를 때운 것은 주로 집에서 싸가지고 온 주먹밥이었다. 밥에 깨소금을 조금씩 섞어서 단단하게 뭉친 주먹밥이었다. 장떡이과 개떡도 허기를 채우는데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소년의 네 식구가 거의 1주일 동안이나 고생을 하며 걷고 또 걸어서 가게 된 곳은 경기도 부천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천군 소래면 은행리였다. 그곳은 먼 친척이 살고 있는 곳이었으며 그곳이 숨어서 살기에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곳을 목적지로 정하고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친척 집에 도착해보니 이미 여러 곳에서 먼저 온 피란민들이 그 집에 와서 북적거리며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친척집에서 여러 가족들이 함께 부대끼며 살게 되었다.


여러 명이 한 집에서 살다보니 불편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런대로 지낼만 했던 것 같았다. 그런데 밤에 잠을 잘 때 잠자리가 가장 힘들고 고역이었던 것 같다.


말이 좋아 2칸짜리 방이지 옛날 2칸 방은 지금보다 훨씬 비좁은 방이었다.


그런 좁은 방에서 매일 40명 안팎의 피란민들이 같이 잠을 잔다는 것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래서 한번 사람들이 누워있는 틈을 쑤시고 들어가 누우면 사람과 사람이 서로 꼭 끼어서 좀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번 옆으로 누웠다 하면 바로 눕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혹시 밤에 용변이라도 보기 위해 한번 밖으로 나왔다 하면 좀처럼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방금 전에 내가 누웠던 자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웬만하면 용변을 보고 싶어도 되도록 이튿날 아침까지 꾹 참아야 하는 것이 정말 고역 중에 가장 큰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고생을 하며 두어 달을 그곳에서 지내다가 다시 고향집으로 돌아올 때의 일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전쟁이 끝나서가 아니었다. 그새 국군이 반격해 오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동안 주둔해 있던 인민군들도 하나 둘씩 북쪽으로 후퇴를 하고 있었다.


우리 식구 네 식구가 마침내 피란 생활을 마치고 부지런히 고향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그러다가 그 다음 날 어느 한 작은 마을 어귀에 도착하게 되었다.


마을 어귀에는 뜻밖에도 팔에 흰 완장을 두른 청년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피란민들을 일일이 붙잡아 세우고 검문을 하고 있었다.


팔에 흰 완장을 두르고 있는 청년은 이른바 그 당시 기세등등했던 좌익 단체인 민청이었다.


민청이란 ‘북조선 민주청년동맹'의 줄임말로 북한군들이 임명한 북한의 앞잡이었던 것이다.


민청은 서슬이 시퍼래진 험악한 표정으로 피란민들의 짐을 이를 잡듯 샅샅이 풀어헤치며 뒤지고 있었다. 민청 바로 옆에는 따발총을 든 인민군이 혹시 도망을 치는 피란민들이 발견되면 금방이라도 사살시킬 것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삼엄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우리 식구들은 곧 이제는 별 수 없이 죽었구나, 하고 사색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짐 보따리 속에 태극기와 도민증을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것이 발각이라도 되기라도 한다면 물어보나마나 그 자리에서 바로 총살감이었기 때문이다.


'도민증'이란 요즈음 '주민등록증'을 의미한다. 그 당시에 도민은 도민증, 그리고 시민은 시민증을 발급해 주었던 것이다.


또한 그 당시엔 도민증의 소지 여부가 좌우익 사상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만일 도민증이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분명 왜 아직도 도민중을 버리지 않고 소지하고 있느냐고 추궁을 당할 게 분명했다. 하물며 태극기가 발견되면 어떤 변을 당하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걸 잘 알고 있기는 하지만 도민증을 함부로 버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국군이 반격해 오면 또 그들은 도민증을 소지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좌익으로 간주하고 추궁을 받게 되기 때문에 도민증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애물단지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우리 가족의 짐을 뒤질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이젠 갈 데 없이 죽겠구나, 하는 극도의 공포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두 개의 심장이 말할 수 없이 두근거리며 뛸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우리의 짐이 민청의 손에 의해 무자비하게 하나하나 흩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도민증은 이불을 뜯고 이불솜 속에 감춰두었기 때문에 무난히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이제 남은 큰 걱정거리는 태극기가였다.


도민증을 들키지 않고 그냥 넘어갔기에 그나마 조금 안도하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민청이 뒤지고 있던 옷 갈피 속에서 태극기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


이젠 우리 가족 모두가 별 수 없이 죽은 목숨이구나. 하는 순간이었다. 숨이 막혔다. 그런데 거짓말 같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민청은 분명히 우리의 짐보따리 속에서 태극기를 발견했음에도 어쩐 일인지 눈 깜짝할 사이에 재빨리 태극기를 옷갈피로 도로 덮어 넘기더니 우리 짐보따리를 도로 꽁꽁 묶어 내팽개치며 얼른 가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민청의 동작이 그렇게 빠를 수가 없었다.


이게 정녕 꿈인가, 생시인가! 마치 지옥에 갔다가 다시 살아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민청에게 왜 그랬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우리 식구들은 사색이 된 표정으로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되었다.


그리고 살려준 것만 해도 다행이어서 허겁지겁 민청이 팽개쳐버린 짐을 챙겼다. 그리고는 아뭇소리도 못하고 그저 살아난 것만 해도 고맙고 다행으로 여기며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일단 죽을 고비를 넘긴 우리 가족이 그곳을 떠나 다시 어느 산기슭을 부지런히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이봐요, 거기 잠깐만!”


느닷없이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치는 바람에 얼른 뒤돌아보니 아아, 조금 전에 그 민청이 달려오며 소리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 식구들은 아까 죽이지 않더니 결국 여기까지 따라와서 죽이려나보다 하고 공포에 질린 채 다시 심장이 쿵쾅거리며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사정없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숨을 헐떡이며 쫓아온 민청의 입에서는 의외의 말이 니오고 있었다.


"지금이 어떤 시국인데 겁도 없이 태극기를 가지고 다녀요? 아까 보따리 속에서 태극기 나왔을 때는 인민군

한테 들킬까 봐 저도 진땀이 다 나더라고요.“


그러면서 그는 이 산 너머 마을에 가면 거기서도 민청이 짐을 조사하고 있을 테니 당장 태극기를 버리고 가라고 부탁하고는 도망치듯 왔던 길을 급히 되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당장 민청이 시키는대로 그곳에 태극기를 몰래 땅속에 묻었고, 무사히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70여년 전, 이름도, 성도 모르는 생명의 은인. 그가 어떤 이유로 민청의 신분을 갖게 되었는지는 그 누구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양심에 맞지 않는 이념과 체제하에서 훗날 고통을 겪지나 않았을까 지금도 가끔 걱정이 되곤 한다.


만일 그때 내가 그였더라면 과연 태극기를 감춰줘 가면서까지 피란민을 살려줄 수 있었을까!


우리 온 가족의 생명의 은인, 그분이 지금까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할 뿐이다. ( * )


- 조선일보 6.25전쟁 60주년 특별기획 '나와 6.25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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