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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Mar 26. 2020

어찌하면 좋으리까?

[어느 어머니의 절박한 하소연]

오래전 MBC 라디오 <여성시대>에 방송된 이야기 한 가지를 소개해 볼까 한다.


어쩌면 너무 유명했던 이야기여서 이미 알고 있는 분은 '아, 그 이야기로구나!' 하고 기억을 하실 줄로 믿는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뜻밖의 배신을 당해본 경험이 있으리라.    

  

그때의 허탈감과 실망감은 아마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가히 짐작조차 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물며 오랫동안 철석같이 믿었던 가장 친했던 친구나 나와 가장 가까운 어느 가족 한 사람으로부터 그런 일을 당했다면 그 충격과 허탈감이란 두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는 우리의 속담이 있다.      


이 이야기가 바로 그 속담과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일찍이 남편을 잃고 혼자 아들 하나를 기르며 살아가는 어머니가 있었다.      

그는 젊어서부터 양말이나 수건, 실, 장갑 등을 보따리에 싸서 머리에 이고 마을마다 다니며 행상을 하여 겨우 두 식구가 목구멍에 풀칠을 할 정도로 어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옛날 그 시절에는 그런 보따리장사꾼이 많았다.             


어머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더우나 장사를 멈추지 않았다. 


오직 아들 하나만큼은 남보란 듯이 훌륭하게 잘 길러보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아무리 힘이 들어도 허리띠를 졸라가며 악착같이 한 푼 두 푼 돈을 모으는 재미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평생 행상을 한 덕분에 어느덧 아들은 성장해서 이미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희생정신과 뒷바라지가 아니었더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평생 알뜰하게 아끼고 아껴 모은 돈으로 아담한 아파트도 하나 장만하고 아들은 좋은 여자를 만나 결혼식까지 성대하게 올렸다.     

 

단 하나밖에 없는 금쪽같은 아들을 대학까지 보내고 상냥하고 마음씨 고운 며느릿감을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니 이제 더 이상 바랄 것도, 부러울 것도 없었다.    

 

게다가 아들은 남부럽지 않은 직장까지 구했으니 이제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인가.

그야말로 늘 자나 깨나 소망했던 어머니의 꿈을 이제 모두 이루고 말았던 것이다. 대단한 자수성가의 뜻을 이루고야 만 것이다. 

     

그런 세월을 보내다 보니 어머니는 어느덧 60대 중반이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악착같이 고생을 했으니 이제부터는 아들 며느리와 함께 좀 즐겁게 살아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아들과 며느리가 직장에 나간 뒤에 집 안 청소나 하고 가끔 동네 친구들을 만나 수다도 떨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낙으로 삼으며 그날그날을 그렇게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친구들이나 아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아들과 며느리 자랑을 하는 것도 또 하나의 커다란 낙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좀 아쉬운 게 한 가지 남아 있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 보면 으레 음식을 자주 먹곤 했는데 그때마다 친구들이 돌아가며 음식값을 치르곤 하였다. 열 명이나 되는 친구들의 음식값을 치르려면 5천 원씩만 쳐도 5만 원이란 돈이 필요했다.  

    

어머니는 그동안 아파트를 구입하고 아들 결혼을 시키는 등, 집안 살림살이를 장만하는 일에 돈을 모두 쓰고 지금 수중에는 돈 한 푼 없는 빈손이었다.      


어느 날, 생각다 못한 어머니는 별수 없이 퇴근하는 아들을 밖에서 기다렸다가 넌지시 부탁을 해보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용돈을 요구하는 좋은 일도 아니어서 며느리 모르게 부탁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얘야, 미안한 부탁인데 나한테 5만 원만 줄 수 없겠니?“      


어머니는 떨어지지 않은 입을 간신히 열어 이렇게 부탁하게 되었다. 그동안 지금까지 친구들한테 얻어먹기만 했으니 나도 한번은 내야 하지 않겠느냐며 마치 무슨 죄라도 진 사람처럼 사정하듯 5만 원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러면 선뜻 그러냐고 하면서 얼른 내줄 줄 알았던 어머니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짐작은 단번에 빗나가고 말았다.  


회상에 일이 밀려 종일 일에 치이다 겨우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한테 무슨 뚱딴지 같은 돈타령이냐며 그런 일이라면 며느리한테 부탁해 보라며 집으로 그냥 성큼성큼 들어가 버리는 게 아닌가.     

 

아들의 뜻밖의 태도에 어머니는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다. 민망하기도 하고 마냥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저 녀석이 내가 그동안 뼈 빠지게 길러놓은 내 자식이었던가 하는 서운함과 실망감이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어머니는 할 수 없이 이번에는 다시 며느리에게 한동안 망설이다가 무거운 입을 열어 부탁하게 되었다. 그리고 며느리의 눈치를 살피며 5만 원이 이러저러해서 필요하다는 자초지종을 늘어놓게 되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뜻밖의 일이란 말인가. 며느리 역시 안 된다고 혹시 짜증을 내면 어쩌나 하고 은근히 겁을 먹고 있었는데 의외에도 그게 아니었다.     

 

”호호호……. 어머님, 그까짓 말씀 하기가 뭐가 그렇게 어려우세요. 당연히 드려야 하고 말고요. 그리고 다음부터는 용돈이 필요할 때마다 서슴지 말고 말씀하세요. 아셨죠?“     


아아,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벌써부터 다른 건 몰라도 며느리 하나만큼은 잘 얻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새삼 이렇게 착하고 마음씨까지 넓은 며느리였다는 생각에 그저 고맙다 못해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런 며느리가 마냥 자랑스러웠다.    

   

그 다음부터는 용돈이 필요할 때마다 며느리한테 부탁하곤 하였다. 먼저 말했던 대로 며느리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싫은 기색이 전혀 없이 오히려 밝은 낯으로 용돈을 내주곤 하였다. 

용돈이라야 그 당시 몇 차례 목욕비 3천 원, 그리고 음식값 5만 원씩 받는 게 용돈의 전부였지만 그런 며느리가 생각할수록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런 며느리 덕분에 어머니는 그 뒤로도 그런대로 즐거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어머니는 아들 내외가 모두 출근을 하자 아들이 지내고 있는 아들의 방으로 건너갔다.

여느 때처럼 방 청소를 해주기 위해서였다. 집에 가만히 놀고 앉아서 먹기만 하기가 미안하다는 생각에 청소라도 해주면 그나마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방 청소를 모두 마치고 경대를 정리하고 있을 때 조금 열려 있는 경대 서랍 안에서 무슨 책인가 삐죽하게 나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어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그 책을 꺼내어 펼쳐보게 되었다. 그것은 며느리가 쓰고 있는 가계부였다.  

    

”아하, 우리 며느리가 마음씨만 곱고 넓은 게 아니라 가계부까지 꼼꼼하게 적어가며 알뜰하게 살림을 하고 있었구나! 과연 자랑스러운 우리 며느리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어머니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슬그머니 가계부를 펴보게 되었다.       


가계부에는 모든 생활비 내역이 꼼꼼히 적혀 있었다.      


콩나물 얼마, 두부 얼마, 고등어 한 손 얼마, 삼겹살 얼마……등.       


그런데 그렇게 읽어내려가던 어머니의 시선을 문득 멈추게 한 내용이 있었다.      

가계부로 써 내려간 중간중간에 ‘웬수’라는 글자가 뚜렷이 보였던 것이다. 


목욕비 3000원 웬수, 음식값 5만 원 웬수…….     


어머니는 순간 뒤통수를 맞았을 때처럼 멍해지면서 눈앞이 캄캄해지고 말았다. 

그 웬수란 기록날짜를 가만히 살펴보니 어머니가 목욕비나 음식값을 용돈으로 받아간 날짜와 정확하게 일치했던 것이다.      


‘아아, 그렇게 상냥해 보이던 며느리가 어떻게 이럴 수가! 결국, 그동안 나는 며느리한테 웬수 취급을 받으며 살아 왔구나!’      

 

한 길 사람의 속마음은 알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마치 백로가 겉이 희다고 하여 속까지 희지는 않은 것처럼…….     


생각해 보면 생각해 볼수록 씁쓸하고 답답한 마음 가시지를 않고 있다. 마치 오랫동안 쌓일대로 두껍게 쌓인 앙금처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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