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겨울나무 Mar 28. 2020

이해와 배려

[상대방 이해하기]

 어느 날, 우연히 TV의 화면이 나의 시선을 끌어당기게 되었다.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아주 희한한 광경이 눈에 띈 것이다.  


지금은 어느 방송국인지, 그리고 어떤 프로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의 그 광경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각인된 장면으로 남아 있다.       

 

 TV 화면에서는 지금 한창 꼬마여자아이가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광경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광경이 보통 가정의 광경보다는 너무나 색다르고 희한하기 짝이 없었다. 

     

아마 전혀 춥지 않은 봄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가정의 주방이었다.     


아주 젊게 보이는 엄마가 작고 네모난 앉은뱅이 쪽상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싱크대에 앞에서는 대여섯 살쯤 된 딸이 반찬이며 밥을 퍼서 연신 하나씩 상에 갖다가 놓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엄마는 그런 모습을 꼼짝도 하지 않고 방바닥에 그냥 가만히 앉아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우리 딸 수고 많았네. 자, 어서 먹자!“     


마침내 딸이 차리는 식사 준비가 다 끝나기를 바라보고 있던 엄마가 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딸도 그제야 엄마가 앉은 밥상의 맞은편에 와서 마주 앉았다.      


내가 이 장면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게 된 것은 엄마의 태도였다. 

엄마는 딸이 음식을 다 차릴 때까지 전혀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저 딸이 부지런히 준비하고 있는 모습만 만족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왜 저러고 있는 것일까? 어디 몸이 불편한 것일까?


보통 다른 집 엄마들이라면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걸 엄마가 정성껏 차려주고 있는 다른 집과는 전혀 낯선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다음에는 더욱 이해할 할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엄마는 얼른 식사할 생각을 하지 않고 여전히 가만히 앉아서 딸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왜 저러고 있는 것일까?      


그러자 딸은 곧 엄마의 젓가락의 손잡이 부분을 양쪽 손바닥에 놓고 열심히 비비기 시작했다. 그렇게 젓가락에서 열이 날 정도로 비비고 난 후에야 지금까지 열심히 비빈 젓가락을 엄마한테 내밀었다.      


”우리 딸 정말 고마워.“     


그제야 엄마는 젓가락을 받아들며 딸에게 고맙다는 인사말을 하고 있었다. 

점입가경이라더니 참 희한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딸이 이번에는 다시 엄마의 숟가락을 양쪽 손바닥에 대고 아까처럼 다시 열심히 힘껏 비비고 있었다. 카메라는 딸이 열심히 비비고 문지르고 있는 숟갈을 클로즈업하여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엄마에게 숟갈을 건네주었다.      


”그래, 고마워. 잘 먹을게.“   

  

이번에도 엄마는 활짝 밝아진 얼굴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숟갈을 반갑게 받아 쥔 다음에야 딸과 같이 다정하게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왜 그럴까? 왜 엄마라는 사람이 저러고 있는 것일까?


그때까지만 해도 난 엄마와 딸의 그런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나중에야 그런 엄마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엄마는 다른 사람들이라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고 좀처럼 이해할 수도 없는 희귀한 병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듣지 못해 알 수 없는 일이다. 


엄마는 다름 아닌 전혀 찬 것을 만지지 못하는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추운 날씨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숟가락이나 젓가락이 차서 잡지를 못해서 딸이 대신 녹여주어야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만일 젓가락이나 숟가락을 그냥 잡게 되면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기절을 해서 쓰러지고 만다는 것이다. 건강한 보통 사람들이라면 상식적으로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내가 그날 TV 내용을 보고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여기까지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간이란 겉모습으로 보아 서로 비슷해 보일는지 모르지만, 알고 보면 각기 성격이나 성향, 취미가 모두 다 각양각색이라 하겠다. 생김새나 건강상태 또한 모두 사람에 따라 분명히 개인차가 있는 법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이라 하여 상대방도 무조건 좋아할 리는 없는 것이다.        


또한, 그러기에 둥근 보름달을 바라보며 기분이 한껏 좋아서 웃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와 반대로 똑같은 보름달을 보면서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더위를 유난히 몹시 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추위를 몹시 타는 사람, 그리고 조그만 소리에도 깜짝 놀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바로 옆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도 놀라기는커녕, 왼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무조건 상대방도 좋아할 리가 없고, 상대방이 싫어한다고 해서 나도 싫은 것은 아니라 하겠다.  

    

난 가끔 그 TV 내용을 본 뒤에 그 옛날, 우리 친척 중에 있었던 일이 문득 오버랩되어 떠오르곤 한다.         

한 여인, 그러니까 형수뻘 되는 분이 우리 집안 친척 형님에게 시집을 오게 되었다.    

  

그 형수님은 본래 왜소하고 몸이 쇠약한 편이었다.

그런데 어느 겨울날 밥을 짓기 위해 쌀을 씻게 되었다. 


그때는 연탄아궁이에 물을 데워 쓰던 시절이어서 더운물이 귀할 수밖에 없었다. 식구들이 더운 물을 떠서 세수를 하고 나면 쌀을 씻을 물이 없었다. 그래서 찬물로 쌀을 씻어야만 했다. 그렇게 쌀을 씻으려면 손이 몹시 시렵고 아려오기도 하였다.     

 

가뜩이나 몹시 추위에 약한 데다가 몸도 쇠약한 형수님은 그날 숟갈으로 쌀을 씻게 되었다.    

   

그러자 그 광경을 목격한 시어머니는 호통을 치게 되었다. 그렇게 꼼지락거리기가 싫어 숟갈로 쌀을 씻느냐고……. 숟가락으로 쌀을 씻는 사람은 평생 처음 보겠다고.     


남의 흉보기를 좋아하는 그 좋지 않은 소문은 마침내 온 집안으로 퍼져나갔다. 그래서 그 집에 게으르고 꼼지락거리기 싫어하는 며느리가 들어왔다고…….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고 했던가! 


형수님은 결국 쌀 한번 숟갈로 씻었다가 그 결과는 10년이 아닌 평생 못된 며느리라는 낙인이 찍히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곤 한다. 만일 그 형수님이 마침 찬 물건을 만지기만 해도 기절해 버리는 마는 TV에서 나온 그 젊은 엄마와 같은 병을 앓고 있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이 세상에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 그리고 쉽게 가까워질 수 있는 친근감이 우러나오는 사람은 뭐니뭐니해도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기에 나의 주관적인 평가가 아닌, 상대방을 조금만 더 이해해 주고 배려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 )                  

매거진의 이전글 어찌하면 좋으리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