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각기 소질은 다르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여느 때 같으면 학교에서 돌아오기가 무섭게 엄마한테 매달리며 귀찮을 정도로 묻지도 않은 말을 제멋대로 재잘거렸을 은영이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전혀 그게 아니었습니다.
"은영이 왔구나!“
”…….“
오늘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엄마가 먼저 반갑게 아는 체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은영이는 대답은커녕 바람빠진 공처럼 어깨와 고개를 축 늘어뜨린 채, 제 방으로 쏙 들어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니, 얘가 갑자기 어떻게 된 일이지?"
곧 은영이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온 엄마가 몹시 궁금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은영아, 너 오늘 학교에서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니?”
”…….“
"그럼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 거니?“
”…….“
"그럼 엄마한테 말하면 안 될 일이라도 생긴 거니?“
”…….“
엄마가 연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지만 은영이는 그때마다 대답 대신 고개만 조금씩 좌우로 흔들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답답하다 못해 그만 울컥 화가 나서 크게 소리치고 말았습니다.
"아니, 얘가 갑자기 엿이라도 입에 붙였나,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러는지 말이라도 해야 될 게 아니니? 말을!”
은영이는 그제야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는지 방구석에 구겨져 있는 어린이 신문을 엄마 앞으로 슬며시 밀어놓았습니다.
'아! 얘가 그 일 때문이었구나!‘
은영이가 내민 신문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고 있던 엄마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은영이가 갑자기 풀이 죽은 채 말대꾸조차 하지 않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만 같았습니다.
그동안 은영이는 오늘이 돌아오기를 얼마나 손꼽아 기다려왔는지 모를 일입니다.
바로 오늘 아침에 학교에 가기 전에 은영이도 그랬습니다.
“엄마, 오늘이 무슨 날인지 엄마도 알고 있지?”
등에 책가방을 멘 채 은영이가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엄마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습니다.
“글쎄, 무슨 날일까? 엄마가 머리가 안 좋아서 그런지 잘 머르겠는 걸.”
“아휴, 이렇게 답답하기는, 내가 엊저녁에도 말했는데 벌써 까먹었어? 오늘 신문에 발표하기로 한 거 말이야.”
“오라, 이제야 생각이 나는구나. 참 그랬었지?”
엄마는 너무 미안하다는 얼굴이 되어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엄마, 그런데 말이지, 이번에도 또 재수없게 떨어지면 그땐 어떡하지?”
“아니야. 이번에야말로 네가 더 열심히 그렸는데 그럴 리가 있니? 아무튼 그건 나중 일이고 어서 늦기 전에 학교나 빨리 다녀오렴.”
“응, 알았어, 엄마. 빠이빠이!”
은영이가 밖으로 뛰어나가자, 엄마는 슬그머니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다지 기대에 부불어 있는 은영이인데 만일 이번에도 좋은 결과가 안 은영이의 실망이 그 어느 때보다 클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은영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머리가 좋은 편이어서 공부도 매우 잘 하는 편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얼굴도 곱고 예쁘며 무엇보다도 마음씨가 착하기 때문에 선생님이나 친구들 사이에도 인기도 좋았습니다.
은영이가 갑자기 그림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은 약 2년 전부터의 일이었습니다.
2년 전 가을, 그러니까 은영이가 삼학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은영이네 반에서는 뜻밖에도 큰 경사가 벌어져 학교가 온통 떠들썩하게 되었습니다. 은영이와 같은 반인 혜정이가 전국 어린이 미술 대회에 나가서 최우수상을 받아오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혜정이의 상장 전달식은 전교생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갖게 되었습니다.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혜정이가 상장과 금빛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멋진 트로피를 받게 되자, 요란한 박수 소리가 운동장 가득 울려 퍼졌습니다.
“히야! 혜정인 정말 좋겠다!"
”트로피도 굉장히 크고 멋진 걸!“
아이들은 모두 넋이 나간 듯 혜정이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은영이도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고 있었지만 혜정이가 그렇게 부러워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은영이는 시무룩해진 얼굴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혜정이가 그렇게 큰 상을 받게 된 자초지종을 엄마한테 자세히 늘어놓게 되었습니다.
”그거 참 잘 된 일이구나. 우리 은영이가 몹시 부러웠겠는 걸. 그렇지?“
은영이는 대답 대신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만 조금 끄덕거리고 있었습니다.
”너도 이미 상을 여러 번 받았는데 혜정이가 받은 게 그렇게 부러웠단 말이니?“
”그건 기껏해야 교내에서 받은 '산수왕'이나 '경필쓰기, 그리고 과제물 전시회에서 받은 시시한 상장들뿐인 걸."
"아니, 그게 왜 시시하다는 거니?“
”혜정이는 교내에서 받은 상이 아니라 전국 대회에서 받은 상이라니까. 그리고 난 아직 미술 대회에서 반은 상장은 한 장도 없잖아.“
"그래? 그럼 너도 이제부터는 그림 공부를 열심히 해서 혜정이보다 더 큰 상을 한번 받아보는 건 어떻겠니?“
은영이는 엄마의 말에 금방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엄마, 그럼 나도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미술 대회에 나가서도 상을 받아 올 수 있단 말이지?“
"아암, 우리 은영이는 워낙 머리가 좋아서 뭐든지 잘하니까 틀림없이 받을 수 있고말고.“
"우와! 신난다. 그럼 당장 나도 오늘부터는 그림 공부를 열심히 할 거야.“
그다음 날부터 은영이는 엄마와 아빠가 소개하는 미술 학원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시간이 나는 대로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은영이의 그림 솜씨는 전보다 많이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히야! 그림 솜씨가 몰라보게 달라졌는걸.”
"히야! 정말 잘 그린다.“
학교 선생님이나 학원 선생님도 은영이의 그림을 보고는 모두들 칭찬이 자자하였습니다. 그러자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 은영이는 그때부터 자신감을 가지고 대회에 나갈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를 일입니다. 대회란 대회는 모두 빼놓지 않고 찾아다니며 열심히 그려보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그때마다 하나같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뒤로도 지금까지 계속 2년동안이나 하루도 쉬지 않고 학원에 다니면서 남들보다 더 열심히 오직 그림 공부에 몰두했던 은영이입니다. 그런데 최우수상은 그만두고라도 입선조차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은영이입니다.
그러던 중에 이번 대회에서만큼은 잔뜩 기대를 걸었었는데 역시 신문에 제 이름이 보이지 않자 은영이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은영이는 지금 방바닥에 푹 엎드린 채, 너무나 서운한 마음에 어깨까지 들먹이며 훌쩍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엄마는 그런 은영이를 어떻게 달래주어야 할지를 몰라 엄마는 엄마대로 답답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습니다.
”아니. 우리 공주님이 오늘은 무슨 일로 이렇게 심술이 났지?"
마침 회사에서 돌아온 아빠가 엄마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엄마가 대신 아빠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아빠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갑자기 껄껄 웃으면서 큰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오라!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난 우리 은영이가 꽤 영리한 줄로만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구나? 은영아, 잠깐 아빠가 하는 얘기 좀 들어보렴.
아무리 재주가 많고 똑똑한 사람이라 해도 사람마다 그 사람의 뛰어난 소질은 따로 있는 거란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머리가 똑똑하고 영리한 사람이라 해도 모든 일을 다 잘할 수는 없단다. 그리고 아무리 바보스럽게 생긴 사람이라 해도 알고 보면 그 사람만의 재주 또한 반드시 있는 법이란다.
너 혹시 이런 이야기 들어 본 적이 있니? 아마 지금부터 아빠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나면 우리 은영이도 곧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옛날에 아주 깊고 깊은 어느 산속에 동물들이 모여 살고 있었단다.“
아빠는 느닷없이 불쑥 동물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은영이는 여전히 방바닥에 엎드린 채, 안 듣는 척하면서도 아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빠의 동물 이야기는 계속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 깊은 산속에서 동물들이 모여 긴급 회의를 열게되었습니다. 그때 모인 동물은 산토끼와 두더지, 그리고 산새였습니다.
우선 동물들 중에 사람들이 사는 세상 구경을 한 적이 있는 산새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사람들이 잘살 수 있게 된 것은 학교를 세워 여러 가지 공부를 열심히 했기 때문이며 우리도 잘 살기 위해서는 당장이라도 학교를 세워 무엇이든지 열심히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힘을 주어 말하였습니다.
산새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난 동물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곧 학교를 짓고 사람들처럼 열심히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산토끼는 두더지와 산새에게 자신의 뛰어난 소질로 손꼽히 달리기를 열심히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두더지는 산토끼와 산새에게 땅을 멋지게 파는 기술을 아주 열심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산새는 두더지와 산토끼에게 하늘을 높이높이 날아다니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오랜 기간을 두고 다 같이 열심히 공부한 끝에 마침내 지금까지 배운 것을 실습으로 옮겨 볼 날이 돌아오고야 말았습니다. 말하자면 실기 평가를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산토끼와 두더지는 까마득하게 높은 기암절벽 위오 올라가서 그동안 열심히 익혀온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기 위해 하늘 위를 향해 힘껏 날아올랐습니다.
산새 역시 지금까지 배운 실력을 다하여 자신의 날개로 굳은 땅을 열심히 파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뜻밖에도 끔찍한 비극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산토끼와 두더지는 곧 수십 길이나 되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면서 비참하게 모두 귀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산새 역시 열심히 땅을 파다가 부리와 날개가 부러지면서 크게 다쳐 그 뒤로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중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동물들은 어리석게도 남들이 가지고 있는 소질과 재주를 배우려는 욕심을 부리다가 그것을 배우기는커녕, 소중한 목숨을 잃거나 큰 부상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뛰어난 소질까지 영영 발휘할 수 없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빠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난 은영이는 마음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아하! 그러고 보니 내 소질은 그림 그리기가 아니었는데 지금까지 공연한 욕심만 부렸던 게 아닐까! 그림 그리기 말고 다른 아이들보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은영이의 얼굴이 차츰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웬일인지 지금은 혜정이가 그렇게 부럽다고 느껴지지도 않았습니다.
미술 대회에서 상을 받지 못했던 부끄러움이나 서운함도 마치 봄눈 녹듯 차츰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