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창작동화
보름달이 은빛보다 더 새하얀 빛을 온 세상 가득히 비춰 주고 있습니다. 마을 앞에서 조금 떨어진 동구 밖 들판에도 골고루 뿌려 주고 있습니다. 동구 밖 들판 한가운데에는 이른 봄부터 여남은 그루의 제비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정답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제비꽃들은 오늘 밤에도 마냥 부드럽고 포근한 달빛을 받아가며 한창 단잠에 빠졌습니다. 보라 색깔의 곱디고운 얼굴을 다소곳이 숙인 채 잠이 든 제비꽃들의 모습이 그토록 행복해 보일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비꽃 모두가 다 행복에 젖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남은 그루의 제비꽃 중에 단 한 그루의 분홍제비 꽃만은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기가 그렇게 힘이 들 수가 없었습니다. 하필이면 제비꽃으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며 늘 한숨과 눈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훌쩍, 훌쩍….”
오늘 밤에도 분홍제비꽃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한 채 훌쩍거리며 울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달님이 분홍제비꽃에게 다가가서 조용히 물었습니다.
"허허,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 게냐?”
“…….”
분홍제비꽃은 입을 꼭 다문 채 고개만 약간 끄덕였습니다.
"오늘 친구들과 다투기라도 한 게냐 아니면 어디가 아픈 게냐?”
“…….”
분홍제비꽃은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달님이 계속 인자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묻자 마침내 무거운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달님, 저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 너무 원망스러워서 못 견디겠어요.”
달님은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어린 제비꽃의 입에서 그런 엉뚱한 대답이 나오리라고는 짐작조차 못했기 때문입니다.
"원망스럽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지?”
분홍제비꽃이 다시 작고도 귀여운 목소리로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달님, 저는 다른 동물들처럼 걸어 다니거나 뛰어다니고 싶어요. 그런데 저는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마음대로 갈 수가 없는 몸이잖아요.”
달님은 그제야 분홍제비꽃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걸었습니다.
"아하, 그랬구나. 그리고 또?”
“달님, 저는 정말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저 높고 드넓은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녀 보고 싶어요.”
“아하 그리고 또?”
“전 보시다시피 키가 이렇게 앉은뱅이처럼 작은 것도 싫고요. 꽃송이도 이렇게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 못마땅해요.”
“…….”
달님은 무슨 말로 달래 주어야 할지 얼른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달님이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별 도움을 주지 못해 정말 미안하구나. 하지만 이런 건 알고 있기나 한지 모르겠구나.”
"어떤 걸요?”
"넌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꽃들보다도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귀한 꽃이라는걸 말이다.”
"피이, 저를 위로해 주려고 그러는 거 전 다 알고 있단 말이에요.”
"허어, 그게 아니란다. 지금 네 몸에서 나는 향은 그 어느 향기보다도 좋아서 사람들은 너를 가지고 값진 화장품이나 향료를 만들기도 한단다.”
"……?”
"그뿐이 아니란다. 너는 무려 여덟 개가 넘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꽃들이 너를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알기나 하니?”
분홍제비꽃이 그제야 조금은 솔깃해진 표정으로
“네에? 그게 정말이예요? 그리고 제 이름이 그렇게 많다니요?”
"아암, 강남으로 갔던 제비들이 돌아올 무렵에 네가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고 해서 너를 우선 제비꽃이라고 부르게 되었단다.”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그리고 또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에게 너를 반지로 만들어서 손가락에 끼워 주곤 하기 때문에 반지꽃이라고 부르기도 하지.”
"반지를요? 그리고 또요?”
"그 밖에도 오랑캐꽃, 장수꽃, 씨름꽃, 앉은뱅이꽃, 병아리꽃, 외나물꽃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우와! 제 이름이 그렇게 많았군요. 달님은 정말 아는 것도 많으시네요.”
분홍제비꽃은 갑자기 기분도 좋아지고 신바람이 났습니다.
"허어,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그러니까 앞으로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보렴. 아주 좋은 일들이 생기게 될지 누가 아니? 자, 그럼 난 바빠서 이만 가야겠다. 내일 또 보자꾸나.”
달님은 인사를 끝내자마자 어느새 서산 너머로 얼굴을 감추고 말았습니다.
'피이,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면 뭐가 달라지나?’
그다음 날이었습니다.
"히야, 여기 있었구나! 야, 빨리 좀 와 봐!”
갑자기 웬 남자아이 떠드는 소리에 늦잠이 들었던 분홍제비꽃이 웬일인가 하고 두 눈을 번쩍 떴습니다.
"어디? 어디? 그게 무슨 꽃인데?”
남자아이의 뒤를 따라 여자아이가 급히 달려왔습니다. 첫눈에 보기에도 아주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였습니다.
"이게 바로 내가 찾던 제비꽃이야. 어때, 예쁘지?”
"응, 정말 너무 예쁘고 귀엽게 생겼다. 근데 왜 하필이면 이 꽃을 그렇게 힘들게 찾아다닌 거야?”
남자아이는 조금은 수줍은 듯 한동안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으음, 이 꽃으로 너한테 반지를 만들어 주려고…. 어때?”
"뭐어? 이 꽃으로 반지를?”
"그렇다니까. 아주 오래전에 말이지. 우리 아빠가 우리 엄마를 처음 만난 날, 이 꽃으로 반지를 만들어서 손가락에 끼워 주셨대.”
"으응, 그랬구나. 그래서?”
여자아이의 물음에 남자아이는 대답하기가 민망스러운 듯 잠시 망설이더니 여자아이의 귀에 손을 대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빠와 엄마 사이가 더 가까워졌대. 그리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나 어쨌다나. 으하핫….”
남자아이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한층 더 쑥스러워진 얼굴로 갑자기 도망이라도 치듯 어디론가를 향해 뛰어갔습니다.
"야! 너 반지를 만들어 준다더니 갑자기 어딜 가는 거야?”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의 뒤를 쫓아가며 소리쳤습니다. 두 아이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행복하게 웃는 소리가 들판 가득 울려 퍼집니다. 지금까지 두 아이의 이야기를 조용히 엿듣고 있던 분홍제비꽃은 갑자기 온몸에 힘이 불끈 솟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입가에는 어느새 흐뭇한 미소가 얼굴 가득 번져 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