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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Apr 26. 2020

어느 아버지의 참교육

[소풍, 원족]

봄!     


온세상이 온통 연둣빛으로 물들며 만물이 소생하는 희망찬 봄. 온갖 갖가지 꽃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제각기 아름다움과 맵시, 그리고 싱그러움과 향기를 맘껏 뽐내는 계절이기도 하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너도 나도 봄바람에 설레곤 한다. 그래서 어디론가 바람이라도 쐬러 나가보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할 지경이 되기도 한다.      


어른들만 그런 건 아닌 듯싶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들뜨고 설레는 건 어쩌면 아이들이 더 그럴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들에게는 봄 소풍이라는 게 있어서 더 그럴는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에는 소풍이란 말 대신 야외학습, 또는 자연관찰학습이라고도 하지만, 옛날에는 소풍이란 말 대신 원족이란 말을 더 많이 사용하였다.      


원족(遠足)이란 말 그대로 멀리 걸어간다는 뜻이다.      


그동안 답답한 교실 속에 갇혀 열심히 공부만 하던 아이들의 머리도 식힐 겸, 자연관찰을 하는 것이 첫째 목적이다.      


그리고 둘째 목적은 바람도 쐬면서 멀리까지 걸어갔다가 오는 동안 저절로 기분 전환이 되고 힐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분 전환이 되고 나면 공부도 더 잘할 수 있고, 보다 나은 내일의 삶을 위한 체력 증진을 위한 충전의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교통수단이 원활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소풍의 목적지가 아무리 멀다 해도 걸어서 갔다가 오곤 했다.      


그래서 너무 멀리 소풍을 다녀온 경우, 그 이튿날은 으레 학교가 휴교를 할 때가 많았다. 너무 지친 나머지 몸살까지 나는 아이들까지 생겨서 하루 정도 쉬게 하는 학교 측의 배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요즈음은 전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이 전세버스를 이용하여 단체로 가곤 한다. 그리고 웬만한 곳에는 부모님이 승용차로 태워다 주어서 조금도 힘하나 들이지 않고  소풍을 다녀오는 것이 일반화되고 만 것 같다.  

     

아이들에게 소풍이란 즐거운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마찬가지이다.      


오래전, 미국에서의 일이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저햑년 어린이들이 소풍을 가게 되었다. 버스를 전세를 내서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제대로 된 원족이었다.       


한창 부푼 마음으로 목적지를 향해 줄을 맞춰 한창 걸어가고 있던 중에 아이 하나가 선생님 곁으로 달려왔다. 평소에도 그 아이는 유난히 호기심이 많던 아이였다. 그의 손에는 이상하게 생긴 풀잎 하나를 들고 있었다.    

  

“선생님, 이 풀 이름이 뭐예요?”     


선생님은 아이가 손에 들고 있는 풀을 받아 들고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 봤지만 전혀 알 수 없는 난생 처음 보는 풀이었다.      


“글쎄다. 아무리 봐도 모르겠는걸. 선생님이 더 공부를 열심히 해서 다음에 알려주면 안 되겠니? 정말 미안하구나.”      


선생님은 쑥스러운 듯 이렇게 대답하고는 풀잎을 도로 아이에 건네줄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저녁이었다.      


소풍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곧 아버지 앞에 그 풀잎을 내밀며 다시 묻게 되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마침 미국에서도 이름난 식물학자여서 그 정도는 아주 쉽게 대답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아이였다.    

   

“아빠, 이 풀 이름이 뭔지 아시죠?”     


그러자 한동안 아이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아버지가 다시 물었다.    

  

“왜 갑자기 그런 걸 묻고 있지?”     


아이는 오늘 소풍을 갈 때 있었던 일을 아버지에게 자세히 설명하게 되었다. 그러자 아이의 설명을 다 듣고 난 아버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글쎄다. 아빠가 아무리 식물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는 하지만 정말 이 풀 이름은 모르겠는걸. 미안하구나.”     


아이는 식물에 대해 그렇게 공부를 많이 했다는 아빠도 이 풀 이름은 모르는구나, 하며 실망한 얼굴로 제 방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다음 날 아침이었다.  


아이가 등교를 할 시간에 아버지가 급히 편지 봉투 하나를 아이에게 내밀며 말했다. 뜯어볼 수 없게 풀로 아주 잘 풑여진 봉투였다.    

   

“오늘 아빠가 급히 선생님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편지로 적었으니 이 편지   를 꼭 선생님에게 드리도록 하여라.”      


아이는 무심코 아빠가 내미는 편지를 받아서 학교 선생님에게 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공부시간이었다.   

   

선생님은 느닷없이 어제 아이가 물어봤던 그 풀잎에 대해 여러 아이들 앞에서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러분, 선생님 이야기  잘 들어보세요. 어제 소풍을 갈 때 누군가가 이 풀 이름을 몰라서 선생님한테 묻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풀 이름을 전혀 몰라서 그때 선생임이 너무 미안했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어젯밤에 그 풀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어요.”     


선생님은 그러면서 그 풀의 이름과 원산지, 그리고 생태 등 재미있게, 그리고 자세하게 설명을 늘어놓게 되었다.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다 듣고 난 그 아이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였을까.     


‘아하, 과연 우리 선생님은 식물학자인 우리 아빠보다 식물에 대한 지식이 훨씬 더 높구나!’       


아빠가 준 편지 속에는 그 식물의 이름 등 모든 내용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그 뒤부터 아이는 학자인 아빠보다 선생님을 더욱 우러러보며 믿고 따르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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