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짝사랑(29)

[의상(625~702)]

by 겨울나무

의상은 신라의 승려로 화엄종의 시조이다.

선덕여왕 13년(644년), 19세 나이로 황복사에서 중이 되었다.

650년 원효와 함께 화엄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로 가던 중 난을 당해 돌아왔다.


그리고 11년 뒤인 661년에 다시 배편으로 당나라에 건너가 중국 최대의 고승인 지엄의 가르침 아래 본격적으로 화엄을 연구하였다.


10여 년간 화엄에 몰두하던 의상은 671년에 귀국하여 동해안 낙산사의 관음굴에서 100일간의 기도를 마친 뒤, 676년에는 왕의 명에 따라 태백산에 부석사를 창건하여 마침내 우리나라 화엄종 불교의 효시가 되었다.

692년 지엄의 문하에서 같이 수학하고 중국 화엄종의 제3조가 된 현수가 자신의 저서인 '화엄경 탐현기'를 보내오자, 그것을 전국의 문화생들에게 전파하여 화엄의 깊은 뜻을 익히게 하였으며, 현수와는 그 뒤에도 자주 서신 왕래를 이어갔다.


의상은 그 뒤에도 오직 교리를 전파하는 일에 힘써 오진, 지통, 표훈 등, 덕이 뛰어난 열 명 이상의 제자들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그가 화엄교를 크게 전교했던 대표적인 큰 절로는 부석사, 화엄사, 해인사 등 10개 사찰이나 되었다.


이에 고려 숙종은 '해동 화엄시조원교국사' 라는 시호를 그에게 수여하게 되었으며, 또한 그의 저서로는 '화엄일숭 법제도' '백화 도량 발원문' ‘십문간법과’ 입법계품초기‘소아미타경의기' 등이 있다.

의상은 당나라에 갔을 때 화엄경에 대한 연구를 열심히 하는 한편,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탁발을 다니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탁발이란 불경을 외우면서 동냥을 다니는 일을 말한다.


그렇게 탁발을 다니던 어느 날, 의상은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어느 집 대문 앞에 서서 목탁을 두드리며 '반야경’을 외우고 있을 때였다.


목탁 소리를 들은 그 집의 귀엽게 생긴 소녀가 공양미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는 두 눈을 꾹 감고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외는 의상을 정신이 나간 듯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는 의상의 낭랑한 목소리와 얼굴, 그리고 훤칠한 모습을 보자 첫눈에 그만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고는 들고 나온 공양미를 줄 생각조차 잊은 채 수줍은 얼굴로 의상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두 눈을 꾹 감은 의상은 그런 줄도 모르고 독경을 다 마친 다음 다른 집으로 가기 위해 막 돌아설 때였다. 소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깜짝 놀라며 수줍은 듯 갑자기 소리쳤다.

"스님! 이 공양미를 가지고 가시지요.“


하며 의상에게 다가서다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려 공양미를 그만 땅바닥에 엎지르고 말았다.


그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의상이 먼저 미안해하며 먼저 용서를 빌었다.


"어이구, 이거 미안합니다. 아가씨! 내가 제대로 받지 못해 이런 일이…….”


의상은 매우 미안한 표정으로 쩔쩔매며 곧 땅바닥에 엎질러진 쌀을 주워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소녀는 더욱 당황한 얼굴로 여전히 수줍은 듯 같이 주워 담고 있었다.


"스님, 정말 죄송해요. 제가 잘못해서 이렇게 되었어요. 제가 주울 테니 스님은 가만히 서 계셔요.“


소녀는 부끄럽기도 하고 수줍기도 하며 당황해서 얼굴까지 빨갛게 물이 든 채 어쩔 줄을 몰라 쩔쩔 매고 있었다.

”아니요, 그러지 말고 같이 주웁시다.“


의상은 이렇게 말하며 쌀을 알뜰히 주워 담은 뒤, 고맙다는 인사말을 남기고는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소녀는 몹시 아쉬운 듯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멍하니 서서 멀어져가는 의상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일로 인해 싹튼 의상에 대한 소녀의 사랑은 그 뒤에도 의상의 승려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소녀가 죽은 뒤에도 소녀의 넋은 마침내 용이 되어 항상 의상을 보호하였으며, 의상이 부석사를 새로 지을 건립할 때에도 많은 영향과 도움과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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