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트]
이른 봄이다. 봄이라고는 하지만 체감 온도는 아직도 추운 겨울의 터널을 벗어나지 못하고 옷깃을 더 단단히 여미게 하는 추운 날씨이다.
밤이 점점 깊어 가고 있다. 밖에서 거리를 누비고 있는 각종 자동차들의 시끄러운 소음은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더욱더 요란한 불협화음을 내뿜고 있다.
“짹깍, 짹깍…….”
정숙은 벌써부터 눈꺼풀이 저절로 내려앉으며 잠이 자꾸 몰려온다. 하지만 졸린 눈을 억지로 버티며 문득 괘종시계를 바라보니 시침은 이미 자정에 가까운 시간을 기리키고 있다.
“흥, 오늘은 결국 외박까지 할 모양이지?”
밤 늦게까지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그나마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희망이 아무래도 보기 좋게 물거품이 되고 만 것만 같아 허탈하기 그지없다. 정숙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가느다란 한숨이 절로 새어 나온다.
“그럼 이제 어쩌지?”
벌써부터 짐작했던 대로 모든 일은 다 끝나고 만 것이 틀림없다. 그런 생각을 하자 눈가를 끈덕지게 점령하고 있던 졸음은 삽시간에 줄행랑을 치고 가슴속에서는 증오심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문득 수민이가 잠들어 있는 침대를 바라본다. 지금 침대 위에서는 세 살배기 수민이가 세상 모르고 쌔근쌔근 곤히 달콤한 잠에 취해 있다. 정숙의 불안하고 애타는 심정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한창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꿈나라 여행중이다.
정숙은 잠들어 있는 귀엽고 천진스러운 수민이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자니 갑자기 남편에 대한 중오심이 더욱 뜨거운 불덩이처럼 끓어 오른다.
"세상에 못된 배신자! 이중인격자!“
가끔 집에서 쉬는 날이면 아들의 볼에다 뽀뽀까지 해주며 잠시도 수민이 곁을 떠나지 못할 정도로 수민이를 아끼고 사랑해 주던 남편이었다. 수민이만 그렇게 사랑해 주는 게 아니었다. 수민이 못지않게 정숙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해 주던 남편이었다. 이제 보니 그 모두가 가식이었다.
그러던 남편의 태도는 몇 달 전부터 슬그머니 그 느낌이 달라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냄새가 이상하다. 분명히 뭔가가 있는 것 같다.
정숙에게 늘 너 없이는 하루도 못 살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오던 남편이었다. 그런데 그런 아내와 아들을 집에 버려둔 채 벌써 몇 달째 이런저런 핑계로 외박이 잦아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 일만 해도 그렇다. 어쩌면 오늘 저녁에는 늦게라도 꼭 집에 들어오겠다는 말을 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휴대폰으로 자주 연락을 해보았지만 그때마다 신호만 갈 뿐, 꿩 구워 먹은 소식이고 불통이다. 울화만 치밀 뿐이다. 이렇게 화가 나고 답답할 수가 없다.
"맞아. 그동안 나와 우리 수민이를 진정으로 사랑한 게 아니었어. 자신의 잘못을 얼버무리기 위해 그저 사랑하는 척만 했던 게 틀림없어. 이리의 탈을 쓴 늑대 같으니라구.“
정숙은 생각하면 할수록 속이 뒤집히고 분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이게 무슨 큰 자랑거리나 된다고 누구한테 속 시원히 하소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니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기엔 너무나 수치스럽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해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정숙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진정시키면서 일단 방안의 불을 끄고 수민이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금방 칠흑 같은 어둠이 방안을 삼켜버리고 말았다. 괘종시계의 추가 움직이는 소리만이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들리고 있어서 몹시 신경이 쓰였다.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눈망울만 점점 뻑뻑해지면서 좀처럼 잠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는 갖가지 생각들이 마치 스크린의 영상처럼 선명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정숙을 더욱 괴롭히고 있었다.
결혼한 지 어느덧 4년, 그리고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행복하고 즐겁기만 했던 지난날의 모습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보니 그 모두가 속아서 살아왔다는 억울함과 배신감만이 고개를 쳐드로 용솟음치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자, 지금 뱃속에서 한창 아무 탈 없이 자라고 있는 아기까지 떼어버리고 싶은 막다른 생각까지 머리를 들고 꿈틀대고 있었다. 살며시 손을 뻗어 잠자는 아들의 손과 볼을 번갈아 더듬어본다. 언제 보아도 꽉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대견한 모습이다.
”후유, 이제 생각해 보니 너도 잘못 태어난 거야. 불쌍한 것…….”
진퇴양난이라고 했던가. 그렇다고 이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처지여서 불쌍한 것은 자식이요, 타는 것은 애꿎은 가슴뿐이었다.
’왜 이렇게 갑자기 변한 것일까? 혹시 나한테 부족함이 있었단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혹시 좋아하는 여자라도 생긴 건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요즈음 남편의 태도는 눈에 띌 정도로 많이 변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슨 말을 물어보면 다정하고 시원스럽게 척척 대답해 주었던 남편이었다. 아니 물어보기도 전에 마치 어린애처럼 쓸데없는 농담까지 섞어가며 귀찮을 정도로 말이 많았던 남편이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그게 아니었다. 말도 적어졌고, 날마다 자정이 가까워서야 집에 들어올 때마다 늦게 온 이유를 물어봐도 슬슬 피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끔 수심에 찬 얼굴로 무엇인가를 골똘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 남편의 태도가 새삼 마음에 걸리곤 하였다.
전에는 그런 일이라고는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매일 시계처럼 일찍 집으로 들어오던 남편이었다. 어쩌다 직장에서 늦게 들어올 일이 생기면 그때마다 어김없이 미리 전화로 자상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곤 했던 남편이었다.
그런데 요즈음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밤 12시가 넘은 뒤에 늦게 들어와서도 아무 죄책감도 없다. 무슨 변명이라도 늘어놓으면 가슴이라도 덜 탈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술에 취해서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 술은 한 잔도 마시지 않은 채 지친 모습으로 맹숭맹숭한 얼굴로 들어올 때가 더 많았다.
친구와 같이 먹었다며 저녁밥도 거를 때가 많았다. 그러고 보면 무언가를 철저히 속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아니 무언가가 아니라 틀림없는 여자관계라고 정숙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다음 날이었다.
간밤에 뜬눈으로 지새운 정숙은 남편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볼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딴 생각이 있어서였다.
”아무 연락도 없이 이젠 외박까지 하나니, 나 원 기가 막혀서…….“
그럭저럭 남편의 퇴근 시작이 가까워지자 정숙은 무거운 몸을 겨우 추슬러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수민이가 자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급히 거리로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오늘은 기어이 남편을 미행해 보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우선 택시를 잡아탔다.
”시청 앞으로 가 주세요.“
남편은 지난 10년간 시청 건축과에서 성실하게 근무해 오고 있는 중이었다.
마침내 시청 맞은편에서 택시에서 내린 정숙은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남편이 아직 직장에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발신 정보가 뜨지 않도록 보낸 전화였다.
”여보세요?“
”…….“
신호가 울리고 바로 남편이 전화를 받았다. 남편이 목소리임을 확인하자 정숙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시청 현관이 마주 보이는 찻집에 들어가서 차를 주문한 다음 시청 현관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초조한 마음으로 시계를 보니 어느새 퇴근 시각 10분 전이었다.
정숙은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얼어붙은 듯 앉아서 마치 소리개가 닭이라도 노려보듯 시청 현관만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퇴근 시각이 되면서 직원들이 하나둘씩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별로 잘못도 없고 죄도 없는 정숙의 가슴은 더욱 초조해진 나머지 두 방망이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 동안 또다시 대여섯 명의 직원들이 우루루 몰려나오는 틈에 끼여 이윽고 두툼한 서류봉투를 든 사내 하나가 급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틀림없는 남편이었다.
남편이 시야에 잡히자 정숙은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가슴에서 치밀어오르는 증오심을 꿀꺽 삼키며 재빨리 남편의 뒤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공연히 멀쩡했던 두 다리가 갑자기 후들거리고 떨리면서 목이 바작바작 탔다.
이윽고 남편은 예측했던 대로 집에서 반대 방향인 종로 쪽을 향해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었다. 더욱 원망스러운 것은 남편의 태연한 동작과 표정이었다. 이토록 애타는 심정은 전혀 아랑곳없이 오히려 당당하기만 했다.
”도대체 어딜 가고 있는 거지? 그리고 도대체 내가 지금 뭘 하자는 거지?“
그런 남편의 뒤를 바짝 쫓고 있는 정숙은 현기증이 나올 만큼 가슴 속에 있던 불덩이가 요
동을 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휘청거리는 다리를 겨우 가누면서 남편의 뒤를 부지런히 뒤쫓던 정숙은 드디어 봐서는 안 될 광경을 목격하자 그만 눈앞이 캄캄해지고 말았다.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순식간에 어떤 젊은 여자가 불쑥 나타나더니 남편의 팔짱을 서슴없이 끼고 히히덕거리며 정답게 걸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저것들이 정말! 너희들 나한테 오늘 딱 걸렸어.”
남편은 여자에게 팔을 맡긴 채 한층 더 기분이 좋아진 얼굴로 무슨 이야기인가를 쉴 새 없이 나누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내 예상이 틀림없다니까. 저런 더러운 인간들 같으니!”
정숙은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눈에서는 금방 뜨거운 불꽃이 이글거리며 남편을 향한 증오심이 하늘 끝까지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입안이 바작바작 타고 속도 타서 침을 삼킬 수도 없다. 꽉 깨문 어금니에서는 뿌드득 소리가 나고 있었다.
정숙은 당장 달려들어 영자의 머리채라도 보기 좋게 휘어잡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좀더 지켜보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둘이 나중에 무슨 짓을 하게 될지 끝장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한동안 여자와 붙어 서서 정답게 걸어가던 두 사람은 이윽고 광화문 광장에 이르렀다. 그리고 어느 빌딩 앞에 다다르자 두 사람은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젊은 여자를 앞세우고 계단을 서슴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그나마 여관이나 호텔이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분을 이기지 못한 정숙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깜짝할 사이에 재빨리 몸을 날려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젊은 여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야! 너 새파랗게 젊은 년이 눈이 뒤집힌 모양이구나? 너 잘 걸렸어. 너 죽고 나 죽자!”
젊고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는 갑자기 벌어진 뜻밖의 상황에 그저 입만 딱 벌린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정숙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아니, 당신 미쳤소? 당신 미쳤냐구?”
남편이 갑자기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으면서 소리쳤다. 정숙은 이번엔 남편을 무섭게 쏘아보면서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그래, 왜? 미쳤다. 나도 미쳤지만 더욱 미친 건 바로 너라고!”
남편은 서슬이 시퍼렇게 된 채 부르르 떨고 있는 아내가 무섭기도 하였다. 그래서 겸연쩍은 얼굴이 되어 이번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그런 남편을 보자 정숙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속이 더 치밀어 올랐다.
“이런 짐승만도 못한 인간 같으니라구. 지금 웃음이 나오냐?”
정숙은 입술이 새파랗게 질린 채 경련을 일으키며 남편을 향해 이렇게 쏘아붙이고 있었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아무래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야 말 것 같은 지극히 험악한 분위기였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무슨 일이고 틀림없이 벌어질 것 같다고 느낀 남편이 다시 아내를 달래기에 진땀을 빼고 있었다.
”여보, 화만 내지 말고 내 말을 좀 들어보라니까. 난 말이지. 쉽게 믿어지지는 않겠지만 지난 몇 달 동안 당신 모르게 이 빌딩에 건축설계 사무실을 하나 차리게 되었어. 당신 모르게 많은 수익을 올려 당신을 한번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단 말이오. 그리고 이 아가씨는 현재 모 대학 건축과에 재학 중인 나의 조수 겸 견습생이란 말이요. 이제야 좀 이해하겠소?“
”……?”
남편의 설명을 다 듣고 난 정숙은 그만 얼이 빠진 사람처럼 입을 딱 벌린 채 한동안 남편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뭔지 얼른 판단하기도 어려웠다. 마치 육중한 몽둥이로 머리통을 얻어맞은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정숙은 민망스럽고 수치스럽다는 생각에 그 자리에 더 이상 버티고 서있을 힘이 없었다.
순간 정숙은 갑자기 몸을 휙 돌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친 듯이 밖으로 뛰쳐나가고 말았다.
어느 새 저녁 하늘에서는 땅거미가 소리없이 내리고 있었다. 살을 에일 듯한 꽃샘바람은 여전히 차갑게 불고 있지만 정숙은 지금 조금도 추위를 느낄 수가 없었다. 아니 춥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얼굴은 마치 불에 덴 듯, 후끈거리며 달아오르고 있었다.
“여보, 미안해요. 난 그런 당신의 마음을 까맣게 모르고 그동안 오해를 했던 거예요.”
뒤에서는 남편이 쫓아오며 연신 큰소리로 부르고 있었지만 지금 정숙의 귀에 그 소리가 들릴 리가 없었다. 정숙은 그래서 여전히 쉬지 않고 허둥지둥 방향도 모르고 그저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