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곰 인형

[꽁트]

by 겨울나무

어느새 여러 차례 술잔이 오가고 취기가 절정에 이르게 되자 목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직장 동료들의 저마다의 개성은 차츰 드러나기 시작했다. 날마다 퇴근시각만 되면 석양배라는 명목으로, 그리고 습관적으로 매일 치러지는 행사였다.


회사에서는 그나마 언행에 신경을 쓰고 서로 예의를 다하던 동료들이었지만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고 나면 그게 아니었다. 성격이나 성질이 영 딴판으로 변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저마다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도 많은지 잠시도 입을 다물지 않고 계속 지껄여대곤 하는 것이다. 말만 그런게 아니라 행동도 따라서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봉구도 그 틈에 끼어 아까부터 열심히 마셔대고 있었다. 오늘은 특히 술을 많이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날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순하고 착한 성격이어서 맹숭맹숭한 정신으로는 오늘의 거사를 치르기 힘들 것만 같았다. 그래서 십분 용기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되도록 술을 많이 마셔야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야! 봉구야! 넌 오늘은 갑자기 벙어리가 됐니? 술만 마시지 말고 어서 한 곡조 뽑아 보라니까 뭘 하고 있는거야, 어엉?”


그러나 봉구는 문득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노래를 불러보라니까 왜 벌써 가려구?”

“응, 시간이 너무 늦었어. 이거 분위기를 깨뜨려서 너무 미안하게 됐다.”


“안돼 임마, 아무리 병원에 있는 마누라도 중요하지만 오늘은 그게 통하지 않는단 말이야, 자, 한 잔 더 받으라구.”


봉구는 어쩔 수 없이 선 채로 술 한 잔을 받아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뒤에서 욕을 하든 말든 급히 그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오늘은 기어이 그 녀석에게 본때를 보여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문득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벌써 아홉 시가 훨씬 지났다.


지금 바로 택시로 달려간다 해도 아내가 있는 병원까지 가려면 어림잡아 적어도 20분은 걸려야 할 가깝지 않은 거리였다.


“짜아식, 지금 이 시각에도 우리 아내와 시시덕거리며 즐거움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못된 녀석 같으니라구.”


그런 생각을 하자 봉구의 표정이 금세 무섭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자꾸만 불안한 생각에 이대로 가만히 배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기분만 은근히 나쁘고 신경만 거슬렸지 지금까지는 정작 그 녀석을 만날 때마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만 태울 뿐 정작 그 녀석을 만나면 우물쭈물하다가 바보처럼 그대로 넘어가곤 했던 봉구였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게 아니라고 단단히 벼르는 봉구였다.


“나쁜 놈. 나를 물로 본 모양인데 너 나한테 잘못 걸렸어. 어디서 겁도 없이 나를 건드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그 녀석도 그 녀석이지만 우선 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내였다.


도대체 나도 모를 어떤 저의가 있기에 어물쩡거리며 이유없이 접근하는 그 녀석을 냉정하 딱 뿌리치지 못하고 받아들이고 있단 말인가!


봉구로서는 정말 그런 아내의 심정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젠 두 사람과의 사랑이 식어가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은근히 불안하기도 하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두 사람과의 사이가 그렇게 다정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택시를 잡아 탄 봉구는 아내가 입원해 있는 병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늦게 갈수록 그 녀석과 아내가 같이 있는 시간이 더욱 길어지게 된다는 생각에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다. 그러기에 되도록 빨리 가야 한다.


“뻔뻔스럽고 엉큼한 녀석같으니라구.”





아내가 뜻밖의 사고로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은 벌써 3주일 전의 일이었다.


봉구가 회사 일로 한창 바빠 정신을 차릴 여유가 없을 때 뜻밖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어느 병원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


“부인께서는 지금 가벼운 교통사고로 지금 저희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셨습니다.”

“네? 뭐라구요?”


너무나 뜻밖의 소식에 놀란 봉구는 한동안 할 말을 잊은 채 어안이 벙벙해서 입만 벌린 채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순간 가슴이 철렁하고 도무지 쉽게 믿어지지도 않았다.


“도대체 어딜 얼마나 다쳤습니까?”

“크게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오른쪽 무릎뼈에 가벼운 골절상을 입으셨습니다. 그러나 큰 부상은 아니니까 치료만 잘 받으면 곧 회복되시리라 믿습니다.”


"그, 그럼 우리 아이는……?"

“불행중 다행입니다. 이기는 조금도 다친 데가 없습니다. 지금 병원에 같이 있습니다.”

“고, 고맙습니다. 알겠습니다.”


봉구는 금방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말아버린 것만 같았다. 이게 감자기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하고 건강했던 아내다. 그리고 오늘은 유난히 밝은 표정으로 오랜만에 친구를 잠깐 만나고 오겠다는 말을 했던 아내였다.


아내의 밝고 상냥한 표정은 결혼 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오직 봉구만을 철석같이 믿고 의지하며 누구 못지않게 행복해 하던 아내였다.

아내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봉구 역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감에 젖게 되었다. 게다가 결혼 1년 만에 떡두꺼지 같은 첫아들 윤석이를 낳은 뒤부터 아내의 표정은 더욱 만족하고 행복해 보였다. 그렇게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내가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하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내가 병원에 입원을 한 지 그럭저럭 어느덧 1주일이 지났다.

아내는 이제 부축을 받으며 겨우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나마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봉구가 아내의 문병을 가기 위해 병원에 들를 때마다 몹시 속이 상하고 안타까운 일이 한 가지 있어서 마음에 걸리곤 하였다. 무릎을 다쳐서 고생을 하고 있는 아내도 아내이지만 세 살짜리 윤석이를 생각할 때마다 더욱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이 세상 어디 누구한테 맡길 곳이 없어 하루 종일 아내의 곁을 떠나지 않고 붙어서 응석을 부리고 견딜 수밖에 없는 윤석일 볼 때마다 공연히 불쌍하고 측은한 마음이 치솟아 오르곤 하였다.

그런 걸 생각하면 부모 형제 없이 외롭게 자란 두 사람의 신세가 새삼 동병상련의 아픔으로 다가와 두 사람은 더욱 사랑하고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여보! 당신도 당신이지만 어서 빨리 일어서야 우리 윤석이와 지낼 시간을 갖게 될 게 아니겠어?”


이럴 때 남들처럼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계시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공연한 생각이 새삼 봉구의 마음을 아프게 해본다. 그렇다면 윤석이를 돌볼 쓸데없는 걱정을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가 없을 땐 잇몸이라더니 그런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가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어느 날이었다. 그 날 저녁에도 봉구는 퇴근하기가 무섭게 아내가 있는 병원으로 곧장 달려갔다.


“아빠! 이 인형 예쁘지? 저 아저씨가 사줬어.”


봉구가 병실 문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윤석이가 반색을 하며 뛰어 나와 맞이하였다. 손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큼직한 곰 인형 하나를 들고 있었다.


“아니. 그게 웬 거니? 참 예쁜 걸!”


봉구는 윤석일 번쩍 들어 안으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저 아저씨가 사줬다니까. 사달라고도 안 했는데 내가 귀엽다면서 그냥 사줬어.”


봉구는 그때야 윤석이가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때까지 아내의 침대 옆에 앉아 있던 젊은 남자가 일어서며 봉구에게 먼저 아는 체를 했다. 봉구 또래의 잘 생긴 젊은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도 바로 이 옆 병실에 입원하고 있는 환자입니다. 부인께서 다치셔서 퍽 걱정이 되시겠습니다.”


그 사람이 하도 상냥하게 예의를 다해 인사를 하는 바람에 봉구도 얼떨결에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아, 그러시군요.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뭐 환자복은 입었습니다만 사실은 나일론 환자입니다. 별로 아픈 데는 없거든요.”

“아, 그러시군요. 그럼 어디가 편찮으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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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술을 좀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간이 좀 안 좋다고 해서 이렇게 생으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만 별 큰일은 없을 겁니다.”

“아, 그러시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천만에요. 윤석이 때문에 제가 병원 생활이 심심치 않게 되어 오히려 다행입니다. 아주 착하고 귀여운 아드님을 두셔서 몹시 부럽습니다.“


그 남자의 언행으로 보아 얼른 보기에도 시원스럽고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 수 있는 그런 인상이었다.

그러자 침대에 누운 채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내도 덩달아 한마디 거들고 있었다.


”윤석이가 가끔 보채면서 칭얼거리는 걸 보시고 저렇게 비싼 인형까지 사주시고는 하루 종일 데리고 놀아주시기까지 하셨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아니라니까요.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오히려 윤석일 만나게 되어 고맙다니까요. 허허허…….”

윤석이의 품에 안긴 인형은 커다란 곰 모양의 인형이었다. 얼른 보기에도 한두 푼 가는 싸구려 인형은 아닌 것 같았다.

인형은 윤석이 마음에도 쏙 드는 모양이었다. 인형을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고 두 팔로 꼭 안고 다니며 놀고 있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자 봉구는 그 남자가 몹시 고맙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어서 늘 걱정을 하던 중이어서 마치 구세주처럼 고맙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 남자 덕분에 그런대로 마음 놓고 며칠을 보낼 수 있었다. 특히 지금까지 혼자 아내 곁에서 지내고 있는 윤석이가 걱정이었는데 그런 걱정은 어느 정도 덜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쩐 일인지 날이 갈수록 그 남자에 대한 고마움이 차츰 퇘색해 가고 있었다. 심하게 표현하자면 봉구에게는 마치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거슬리기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와서 보니 봉구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불쾌한 일이이요, 은근히 남덩이처럼 무거운 부담을 주는 존재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봉구가 회사에서 저녁 늦게 퇴근을 하여 병원에 들를 때마다 그 남자는 어김없이 아내의 침대 옆에 의자를 놓고 그림자처럼 붙어 앉아 있었다. 그냥 붙어 있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무슨 재미있는 얘깃거리가 그렇게도 많은지 병실에 들어설 때마다 두 사람이 정답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래, 잘들 논다, 잘들 놀고 있어.’


그런 광경을 바라볼 때마다 봉구의 눈에서는 슬며시 불이 나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기분이 상하기 시작한 봉구의 눈에 더욱 미처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불쾌한 광경이 목격되고 말았던 것이다.


바로 어제 저녁, 아내의 병실로 가기 위해 5병동 복도를 막 들어섰을 때의 일이었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마침 병실에서 그 남자와 아내가 붙어서 걸어나오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게 아닌가! 어딜 가려고 그러는지는 모를 일이다.

어쨌든 아내는 지금 온몸을 그 남자한테 의지한 채 부축까지 받아가며 봉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윤석이도 덩달아 그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마침내 봉구와 그들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 남자가 먼저 봉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이구, 오늘은 좀 늦으셨군요. 부인께서 하도 답답해서 오랜만에 잠깐 바람 좀 쐬고 싶다고 하셔서 지금 막 나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하하하…….”

남자는 지금 봉구의 불편하고 불쾌한 속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 지극히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너털웃음까지 웃으면서 먼저 아는 체를 하고 있었다.


“……?!”

봉구는 순간 온몸에서 피가 끓어 오르고 있었다. 어느 새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여전히 입을 딱 벌린 채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날 밤, 봉구는 뭔기 가슴속에서 치밀어올라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내에게 그대로 불평을 털어놓는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래서 마치 벙어리 냉가슴 앓듯 혼자만 속을 끓이고 있었다.


정말 생각할수록 그 녀석은 뻔뻔스럽기가 한이 없고 능글맞은 놈임에 틀림없었다. 이젠 그놈이 미운 만큼 아내가 미움도 점점 더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는 기어이 아내와 같은 병실을 쓰지 못하도록 화끈하게 겁을 주고 그 병실에서 내쫓아야지! 어디 두고 좀 봐라.”

병원으로 달리는 택시 안에서 봉구는 몇 번이고 이렇게 속으로 다짐을 하고 또 하였다. 조금 전에 동료들과 같이 마신 술의 취기가 점점 오르자 전에 없던 용기도 불끈 솟아오르는 느낌이었다.

마침내 병실 앞에 다다른 봉구는 굳은 각오를 하기 위해 크게 숨을 한번 들여 마신 다음 조용히 병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이상하다. 꼭 있어야 할 그 녀석이 오늘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봉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리번거리고 있자, 이번에는 아내가 좀 쓸쓸해진 표정이 되어 봉구를 맞이하고 있었다.


"여보! 뭘 그렇게 두리번거리고 있어요? 오늘 술 많이 드셨나 봐요? 앞으로는 조금씩 드셔야 되겠어요.“

”……?!”


봉구는 오늘따라 술 걱정까지 해주는 아내가 왠지 싫었다. 그러자 아내가 여전히 슬픈 표정이 되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병실에 자주 오던 그분 있잖아요. 그분 오늘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글쎄 간암이었다지 뭐예요. 간암이 그렇게 무서운 병인가 봐요. 그분 아마 술을 너무 좋아했다나 봐요.”

“그, 그으래?”

아내의 말에 순간 봉구는 갑자기 온몸의 맥이 확 풀려나가는 느낌이었다.

“그 분도 우리들처럼 부모 없는 고아였대요. 불쌍하지 뭐예요. 우리 윤석일 그렇게도 좋아 하셨는데…….”


봉구는 아무 대꾸도 못하고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내가 보기엔 당신도 너무했던 거 아니야?’


봉구가 이번에는 슬며시 윤석이의 자는 모습을 내려다 보게 되었다. 지금 곤히 잠을 자고 있는 윤석이가 품에 안겨있는 곰 인형의 모습이 오늘따라 몹시 쓸쓸하고도 슬프게 느껴지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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