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트]
“흥, 오늘 저녁에도 어디 늦기만 해봐라. 그랬다가는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이거야. 흥, 어림도 없는 소리지. 나를 도대체 뭘로 알고 맨날 술타령이냔 말이야, 흥”
지숙은 오늘 하루 종일 콧구멍이 다 닳아빠질 정도로 연신 콧방귀를 뀌고 투덜거리면서 하루해를 보내고 있었다.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만 봐도 안다고 하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의 남편의 태도만 봐도 떡잎부터 아예 노랗게 떠 있다는 것을 지숙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오늘 아침에 일만 생각해 봐도 남편의 무관심은 또다시 확실하게 드러나고 말았던 것이다. 너무나 섭섭하고 야속하기 짝이 없었다.
지숙은 오늘이 바로 자신의 생일이라는 것을 말을 할까 말까 하고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취소하고 말았다. 엎드려서까지 절을 받고 싶지 않다는 알량한 자존심만큼은 아직도 건강하게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이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줄곧 은근히 눈치를 살폈다. 혹시나 남편의 입에서 먼저 무슨 말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한 가닥의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갓 지숙이 혼자만의 희망 사항에 불과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지숙은 결국 참다 못해 출근을 위해 급히 현관문을 나서는 남편을 향해 가자미눈을 부릅뜬 채 톡 쏘는 목소리로 묻게 되었다.
“자기, 오늘 저녁에도 또 늦게 들어올 거지?”
샐쭉해진 지숙의 목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단단한 뼈가 들어 있었다.
“허어, 아니, 오늘따라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꼴도 보기 싫으니까 아예 늦게 들어오라는 소리보다 더 서운하게 들리는걸.”
남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빙그레 웃는 낯으로 이죽거리며 되묻고 있었다. 남편의 징그러운 그런 버릇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이 남자를 처음 만났을 때는 바로 그 버릇 때문에 매력을 느끼기까지 했던 지숙이었다. 그런데 차츰 세월이 지남에 따라, 요즈음엔 그의 그런 태도가 매력은커녕, 구렁이보다도 더 징그럽고 추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으이그, 저 징글맞게 웃는 면상하고는……. 제발 웃지 좀 마. 자기 그런 얼굴만 보면 난 이제 신트림이 나고 속까지 뒤집힌단 말이야. 알겠어?”
그러나 남편은 여전히 지지 않고 유들유들한 표정으로 대꾸하고 있었다.
“왜? 그런 내 얼굴이 매력이 있다고 할 때는 언제고?”
“그땐 내가 잠깐 눈이 삐어서 그랬지만 지금은 입맛이 다 떨어진단 말이야.”
"그래? 그럼 그건 그렇다 치고, 오늘은 도대체 아침부터 바쁜 사람 붙잡아 놓고 무
슨 시비를 걸고 싶어서 이 야단인 거지?“
“어쭈, 뭘 잘했다고 그래도 여전히 큰소리는……. 오늘도 또 늦을 거냐고 묻고 있잖아?”
"그건 회사에 가 봐야 알지. 귀신도 아니고 회사 일을 어떻게 미리 알아? 안 그래?“
“몰라! 어쨌든 오늘도 늦기만 해봐. 그땐 가만있지 않을 거야!”
지숙의 머릿속은 온통 자신의 생일로 가득했다. 약이 바짝 오른 지숙은 이렇게 빽 소리치고는 남편을 현관 밖으로 떠밀어내고 말았다.
“지 마누라 생일도 모르고 술만 좋아하는 저 남자, 도대체 저걸 어떻게 해야 한담!“
지숙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야속한 마음에 좀처럼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언젠가 친구가 들려준 말을 머리에 떠올리게 되었다.
그는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는 광고처럼 ‘남자의 길을 들이는 것은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말을 항상 입버릇처럼 강조하며 자신 있게 역설하곤 하였다.
“남자란 그저 결혼 초부터 일찌감치 초전박살을 내야 한다구. 우물쭈물하다가는 평생을 남자한테 노예처럼 잡혀서 살아가게 돼 있거든.”
"초전박살이라니?“
친구는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신바람이 나서 계속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의 설명을 듣고 보니 부부 싸움을 할 때는 좀 아깝기는 해도 처음부터 집안에 비싼 물건이나 가구를 골라서 박살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별 도리없이 남자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가게 되기 때문에 다시는 여자를 함부로 건드리지 않게 된다는 지론이었다.
그리고 혹시 남편이 특히 애지중지하는 물건이 있으면 그 물건부터 박살을 내야 효과는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돈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고 입에 거품을 물고 떠들어대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지숙의 눈이 갑자기 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문득 남편이 마누라 보다 더 신주처럼 아끼고 있는 고려청자처럼 생긴 자기가 번개처럼 머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아, 바로 그거야, 그거!‘
지숙은 급히 장식장 위에 고이 진열되어 있는 자기를 꺼내더니 탁자 위에 얌전히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한동안 원망스런 눈초리로 자기를 노려보며 작전을 세우고 있을 때, 갑자기 휴대폰이 요란스럽게 울리고 있었다.
지숙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급한 마음에 발신자를 확인도 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얼른 들어보니 영락없는 남편의 목소리였다. 남편의 그 징그럽고도 유들유들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보, 당신이지? 오늘도 회사에 좀 바쁜 일이 생겨서 늦을 것 같은데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
들어보나마나 미리 예상했던 대로였다. 지숙은 더욱 약이 바짝 올라 대답 대신 아랫입술만 계속해서 잘근잘근 씹으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조금 전보다 더 큰 목소리가 귀청을 울리고 있었다.
"아니, 왜 대답이 없어? 내 말 안들려?"
참다 못한 지숙은 자신도 모르게 휴대폰에 대고 빽 소리를 지르며 악을 썼다.
“이젠 꼴도 보기 싫으니까 아예 집에 들어오지도 말란 말이야! 알아들었어?”
"아니, 당신답지 않게 갑자기 왜 소리는 지르고 이 야단이야, 응? 오늘 무얼 잘못 먹은 거 아니야?"
“뭐라구? 나다운 게 뭔데? 그래, 자기 마누라 생일 하나 제대로 챙길 줄도 모르고 만날 술만 마시거나 회사 일 밖에 모르는 인간은 어떻구? 이럴 거면 왜 결혼은 했어? 당장 헤어지자구!"
“아니, 뭐라구? 당신 생일이라구? 당신 생일은 아직 한 달도 더 있어야 하잖아. 그리고 나 요즘 회사 일이 바쁜 거 당신도 잘 알면서 갑자기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뭐, 뭐라구? 정말 끝까지 이렇게 얼렁뚱땅 넘기고 있는 너는 정말 인간도 아니란 말이야.”
“아니, 이 여편네가 뭐가 어쩌구 어째? 이 사람이 벌써 망령이 난 거 아니야?”
“그래, 너 때문에 미쳐서 망령이 난거다, 왜?"
약이 바짝 오른 지숙은 그만 휴대폰을 동댕이치고 말았다. 시치미를 떼는 것도 분수가 있지 정말 이렇게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지숙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어느새 저녁때가 되었다.
“흥, 어디 오늘은 집에 들어오기만 해봐라.”
약이 오를 대로 바짝 오른 지숙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채, 아까부터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자기만을 무슨 원수를 바라보듯 독수리 눈이 되어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남편이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자기를 던져 박살을 낼 각오와 준비를 이미 단단히 굳히고 있는 지숙이었다.
그때 마침 현관문이 슬그머니 열리면서 남편이 들어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쯤 한창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거나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고 있어야 할 남편이 일찍 집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더구나 남편의 손에는 큼직한 케익까지 들고 있었다.
“……!?”
지숙은 마치 꿈이라도 꾸듯 갑자기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아무 말도 못하고 남편의 움직임만 바보처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어서 이거 받지 않고 무얼 하고 있는 거야?”
“아니, 당신 아까 회사 일이 밀려서 늦게 들어온다고 전화를 해 놓고선……?”
"뭐어? 내가? 이 사람이 갑자기 귀신한테 홀렸나,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오늘 회사에 나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오늘이 마침 당신 생일이었지 뭐야. 그래서 생각난 김에 모처럼 큰맘 먹고 이걸 사 온 거라구. 허허허…….”
“……!?”
기숙은 여전히 뭐가 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남편이 이번에는 탁자 위에 얌전히 놓여 있는 자기를 기리키며 다시 물었다.
“아니, 이건 왜 여기 꺼내 놓았지?”
그러자 지숙이 얼른 얼버무리며 대답하였다.
"그, 그건 저……, 자기가 하도 소중하게 아끼는 물건이라 좀 깨끗이 닦아 두려고……,“
"그래? 역시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건 이 세상에 당신밖에 없다니까. 허허허……,“
남편은 매우 흐뭇해진 얼굴로 활짝 웃고 있었다. 그런 남편의 표정을 보자, 지숙의 입가에도 오랜만에 엷은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귀신한테 단단히 홀린 거 아니야? 그렇다면 아까 그 전화는 분명히 어디서 잘못 걸려온 전화였단 말인가!'
지숙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