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심훈(沈熏)은 동작구 흑석동(그 당시엔 경기도 시흥군 흑석동))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서울 교동 보통 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온화하면서도 적극적인 성품이었다.
그가 열다섯 살 되던 해(1915년)에는 경성 제일 고보(현재의 경기중·고등 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그의 꿈은 의사였다.
심훈이 제일 고보 시절에 가장 친했던 친구로서는 윤극영과 조재호 등이 있었다. 윤극영은 심훈과는 내종사촌으로 후에 동요 ‘푸른 하늘 은하수’ 일명 ‘반달’을 작사 작곡한 음악가가 되었다.
1919년 제일 고보에 재학 중 3·1 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4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뒤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이때 학교에서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퇴학 처분을 내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그는 의사가 아닌 문학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삼일 운동 때 받은 여러 가지 충격과 현실에 대한 불만이 쌓여 우울증까지 걸리게 되었다.
돌1921년 우울증이 악화된 그는 중국의 북경과 상해를 거쳐 항주까지 떠돌며 방황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거기서 지강 대학에 입학하는 한편 다시 그는 북경에서 신채호, 윤희구 등을 만나 그들에게 감화를 받은 나머지 항주에서 이동녕, 이 시영, 엄일파 등과 어울리며 다시 항일 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 후, 1923년부터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의 기자로 재직 중 시와 소설을 쓰고, 1925년에는 동아일보에 소설 ‘탈춤’ 을 연재했다.
1926년 ‘먼동이 틀 때'를 원작, 감독·각색했으며 그후 '동방의 애인을 영원한 미소' 등의 장편 소설을 신문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1932년 마침내 그는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낙향한 곳이 충청남도 당진이었다. 당진에 잠적한 그는 그곳에서 농촌 계몽 소설 '상록수' 를 써서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현상 소설에 당당히 당선하자 그 상금을 밑천으로 충남 당진에 상록 학원을 설립했다.
그때 심훈이 설림한 상록 학원이 바로 현재 상록초등학교(당진군 송악면 부곡리 소재)의 전신안 것이다.
심훈은 1936년,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하였다는 신문 호외에 감격하여, 그 뒷면에 ‘오! 조선의 남아' 란 즉흥시를 썼는데 그것이 그의 마지막 글이되고 말았다.
그는 작품 활동 이외에 농촌 계몽운동의 선구적 실천가이기도 하다.
특히 장편 소설 '상록수'는 그 당시 '청년들의 사회 풍조에는 러시아의 '보나로드(Vnarod)' 운동에서 영향을 받아 농촌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이는 문학이 사회주의적 경향과 결합했던 운동으로서, 당시 농촌의 비참한 현실에 눈을 뜬 우리나라의 젊은 지성인들에게는 매우 고무적인 희망을 주기도 하였다. 그래서 실제로 젊은 청년들이 앞을 다투어 농촌으로 돌아가 계몽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에 총독부는 고등 교육을 받은 청년들을 농촌으로 흡수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 장려하기도 했으나 거기에는 엄격한 한계가 있었다. 그 시기에 이광수의 ‘흙이 절찬을 받게 된 배경도 그런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될 일이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