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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May 29. 2020

지나가버린 방황의 나날들(1)

[호랑이 입에 날토끼라니?]

 난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는 줄곧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의 전부였다. 그래서 비록 종이가 몹시 귀하던 시절이긴 하였지만 어쩌다 조그만 종이쪽지라도 생기게 되면 그림을 그리곤 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터는 미술부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런 그림 그리기 작업은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꾸준히 지속되면서 더욱 화가의 꿈을 불태웠다.     

 

그때 내가 주로 그리는 그림은 수채화였다. 일요일에도 학교에 가서 이젤을 세워놓고 풍경을 그리는 일에 열중했다. 내 그림 솜씨가 그나마 괜찮아 보였는지 미술 선생님이나 친구들, 그리고 어쩌다 주위 사람들의 칭찬을 받게 될 때는 더욱 화가의 꿈이 절로 샘솟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난 그날도 이젤을 세워놓고 한창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어느새 내 주변에는 구경꾼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런데 한창 내 그림을 한동안 유심히 보고 있던 사람들 중에 하나가 내뱉은 한 마디가 내 가슴에 대못을 박고 말았다. 그 한 마디가 내겐 정말 그렇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히야아! 그림은 사실 그대로 참 잘 그리긴 했는데 저런 경치를 보고 이렇게 똑같이 그려서 어디다 쓰려고 이러지?”


지금까지 그림을 잘 그린다는 말을 자주 들어서 신바람이 나곤 했었는데, 그래서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더욱 불태우곤 했었는데……!     


난 이번에도 칭찬을 받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그런 말을 들어보기는 처음이었다.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 있는 그대로 풍경을 그리는 것은 작품에 담긴 사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아무리 잘 그려봤자 죽은 그림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풍경을 있는 그대로 똑같이 그릴 바에는 차라리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것이 훨씬 더 시간과 경제적으로도 낭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고등학교 재학 당시에는 난데없이 추상화가 한창 붐을 일으키고 있던 시절이었다. 


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이지만, 워낙 수준이 낮아서 그런지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해할 수도 없고 무엇을 그린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그림이 추상화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사람의 말도 일 리는 있었다. 난 약 10년 동안 열심히 그려온 그림 공부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것같은 허망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럼 나도 이제부터는 추상화 공부를 시작해 볼까? 하지만 그것도 내겐 어렵고 불가능한 일이었다.    

  

추상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수채화 물감이 아닌 유화 도구를 새로 장만해서 그려야 했다. 그런데 여유가 없는 가정 형편이어서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추상화는 내 취향이 아니고 취미도 없었기에 아쉽고 서운하긴 했지만 10여 년간 열심히 그려온 그림 공부를 거기서 그만 미련없이 종지부를 찍고 말았던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다시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면서 시나리오 작법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림 대신 시나리오를 열심히 쓰기 시작했다. 시나리오의 구성과 작법에 대해 더 깊이 배우기 위해 가진 돈은 없었지만, 국내에서 제작한 극영화는 대부분 모두 다 섭렵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영화광이 된 것이었다.      


그 당시 맨 먼저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은 광화문에 있는 국제극장이나 시민회관, 그리고 을지로 4가에 있는 국도극장, 동양극장 등이 고작이었다. 영화는 개봉관부터 시작해서 약 1,2주가 지나면 재개봉관을 거쳐 일반 영화관의 순서로 상영하게 되어 있었다. 세 번째로 상영되는 일반 극장을 사람들은 3류 극장이라고 칭했다.       


늘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한 나는 아무리 보고 싶은 영화가 개봉되고 있어도 개봉관이나 재개봉관을 이용한다는 것은 엄두고 못 낼 일이었다.      


3류 극장은 필름이 낡아서 화면이 가끔 비가 오는 것처럼 줄이 어른거리곤 했지만 그나마도 감지덕지하며 3류 극장만 찾아다녔다. 


서울에 3류 극장은 많았지만, 주로 종로 신신백화점 맞은편에 있는 화신백화점 5층에 있는 극장을 단골로 많이 이용하곤 하였다. 그곳에 가면 입장료도 아주 저렴하지만, 한꺼번에 두 가지 영화를 상영하여 더욱 많은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운이 좋아 친구의 도움으로 오랜만에 개봉관에 가서 본 영화가 ’벤허‘였는데 을지로 4가에 있는 개봉관인 국도 극장이었다. 70미리 대형영화, 그리고 음향은 6본 트랙이어서 어찌나 실감 나게 감상했는지 지금까지도 그 ’벤허‘의 추억을 오래오래 잊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다. 

     

극영화 시나리오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백 자 원고지 3,400매는 채워야 하는 힘든 작업이었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한 편을 완벽하게 탈고해 놓기 위해서는 나의 경우, 3,4개월이 소요되곤 하였다. 첫째, 구상을 해야 하고, 써야 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정서를 보내야 하고…….  

   

그렇게 열심히 쓴 처녀작을 난 겁도 없이 2백만 원 현상 시나리오 모집에 응모했다.


어느 영화 잡시사에서 모집하는 현상 모집이었다. 그 당시에 200만 원이면 서울에서 괜찮은 집을 한 채 살 수 어마어마한 거금이었다.      

  

응모한 지 약 1개월 뒤, 마침내 예심 결과가 발표되는 날이었다. 책을 구입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살펴보니 우와아~~ 상상 밖에도 내 이름 석 자와 시나리오 제목, 그리고 내가 사는 집의 주소까지 선명하게 나와 있는 것이 아닌가.   

    

자그마치 5백여 편의 응모작 중에서 일단 예심에서 10편을 뽑았는데 그중에 내가 응모한 작픔이 예심을 통과했던 것이다. 난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어서 하늘을 날을 것처럼 뛸 듯이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더 이상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소문이 크게 나서 많은 친구들이 부러워하며 축하를 해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다음 달에는 당선작을 발표하기로 되어 있는데 당선작에서는 탈락한다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난생 처음으로 응모한 작품이 그 많은 작품들 중에 예심을 통과하게 된 것만 해도 그렇게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이제 가능성을 알게 되었으니 앞으로 더 열심히 쓰면 되겠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다음 달, 예측했던 대로 당선작에서는 탈락하고 말았다. 그래도 좋았다. 미리부터 예상했던 일이기에 이제부터 열심히 쓰면 된다고 마음을 다잡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 난 열심히 시나리오를 써서 그때마다 응모했다. 방학 때는 전라도 친구네 집 뒷동산에 올라가서 움막을 짓고 두 달 내내 열심히 쓰면서 시나리오 작가의 꿈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시나리오가 완성되면 그때마다 어김없이 응모하곤 하였다. 아마 그렇게 네 편인가 다섯 편을 응모했던 것 같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응모한 작품마다 예심이 통과하곤 했는데 정작 당선작에서느 어김없이 탈락하곤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4편인가 5편을 쓰는 동안 약 5년이란 세월이 훌쩍 흘러버리고 말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너무나 긴 세월이 흘러버린 것이다.   

   

그러자 부모님들이 가만히 계시지 않았다. 쓸데없는 짓 하느라고 세월만 보내지 말고 정신을 차리고 빨리 취직을 하든지 항상 일손이 모자라니 농사일을 돕든지 하라고 성화를 부리기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난 할 수 없이 곧 지금까지 내가 쓴 시나리오를 서너 편을 들고 그 당시 시나리오를 가르치던 교수님 댁을 찾아가게 되었다.  

   

내 작품을 읽어보고 장차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자격 여부를 판단해 달라는 것이 목적이었다. 가능성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부모님의 말씀대로 얼른 취업을 하든지, 농사일을 돕든지 해야 하겠다는 굳은 각오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교수님은 내가 쓴 시나리오의 줄거리를 대강 듣더니 지금까지 그 작품들을 어디 어디에 응모해 보았느냐고 물었다. 난 바로 영화사가 아니면 영화잡지사에 응모했다고 솔직히 설명했다. 그러자 한동안 침묵에 잠겨 있던 교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지금도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답변이었다. 

     

“흥, 호랑이 입에다 날토끼를 넣은 셈이로군!”     


교수님의 설명을 들어보니 맥이 쭉 빠졌다. 지금까지 괜히 금쪽같은 수많은 세월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시나리오를 심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화감독이나 시나리오 기성 작가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들 중에는 오래 전부터 시나리오를 공부하는 문하생도 있고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는 친척들도 많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네가 쓴 시나리오가 그들보다 특별히 얼마나 뛰어나게 잘 썼는지는 모르지만 왜 낯도 모르는 너에게 그런 거금을 주면서 당선을 시켜주겠느냐는 아리송한 설명을 길게 늘어놓고 있었다. 

      

그래서 궁금함을 참다못해 내가 다시 묻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냥 그들의 작품으로 영화를 만들 일이지 번거롭게 현상 모집은 왜 버젓이 하고 있는 것이냐고?     


이에 교수님의 입에서는 더욱 황당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또 다시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아직도 자넨 제대로 세상을 배우려면 멀었다는 거야!”     


난 그래서 그 후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직장인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리고 평생 30여 년간을 그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게 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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