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킹의 슬픔

by 겨울나무

“우와! 정말 저 아가씨 죽여 주는걸!”


“옷 색깔 하며 정말 저렇게 잘 어울릴 수가 있을까!”


“그러게 말이야. 그나저나 저 마네킹은 정말 좋겠다. 언제나 최신 유행하는 브랜드만 그 누구보다도 먼저 입어 볼 수 있으니 말이야.”


"아암, 그것도 가장 비싼 최고급 메이커 옷으로만 입을 수 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겠느냔 말이야.“


“어이구, 이놈의 팔자는 언제 저런 옷을 단 한 번이라도 입어 보구 죽게 될는지, 워언…….”


지나가던 사람들은 누구든지 나를 바라볼 때마다 몹시 부러운 얼굴로 감탄을 하며 부러워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많은 여자들보다는 특히 젊은 아가씨들이 더욱 내 옷을 바라보며 탐을 내곤 하였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건 맞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도 틀린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말이 모두 맞는 말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내가 주로 입고 있는 옷 모두가 바로 그런 아가씨들이 유행에 따라 즐겨 입는 값진 옷들이었으니까요.


내가 지금 하루 종일 꼼짝도 못하고 한 자리에만 서 있는 곳은 이름만 들어도 금방 알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크고 으리으리한 고급 백화점 안에 위치한 의상실이었습니다. 그러니 유행과 사치에 눈이 밝은 요즈음 아가씨들이 내 옷을 보고 홀딱 반하지 않을 아가씨가 어디 있겠어요.


이쯤 설명했으면 이제 내가 누구인지 눈치빠른 사람이라면 벌써 짐작하셨겠지요? 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마네킹이라고 부르고 있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도 멋진 옷, 그리고 철따라 유행하는 옷만 골라 입고 멋진 포즈로 거만스럽게 버티고 서 있는 바로 그 마네킹이랍니다.


어쨌거나 나는 매일 많은 사람들이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바라보며 그렇게 부러워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 자신이 얼마나 자랑스럽고도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진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도대체 어떤 분이 고맙게도 나를 이렇게 마네킹으로 만들어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었을까?’


나는 정말 나의 생활 하루하루가 마냥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를 마네킹으로 만들어 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분에게 마음 속으로 틈만 있으면 감사를 드리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분명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차츰 권태와 싫증을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마네킹으로 태어난 것이 행복하고 자랑스럽다고 생각하던 마음이 어느새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도 불행한 처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 난 어쩌다가 하필이면 마네킹 신세가 되었담!‘

그 후로부터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문득문득 한숨이 새어 나오고 틈만 있으면 저절로 신세 타령이 나오곤 하였습니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일이었습니다. 내가 마네킹이 된 것을 불행하게 여기게 된 가장 큰 이유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나에게는 꿈이라든가 희망이라는 것이 전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 세상 모든 사람들마다의 가슴에는 나름대로 꿈과 희망을 고이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현재 하고 있는 일들이 아무리 힘에 부치고 견디기 어려워도 먼 훗날의 무지개처럼 찬란한 꿈과 희망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빛 좋은 개살구!


그렇습니다. 이제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는 꿈과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는 빛 좋은 개살수에 불과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겉만 번드레하게 늘 값지고 유행하는 명품이라는 것을 걸치고 한 자리에 선 채 손님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허수아비에 불과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허수아비만도 못한 신세였습니다. 허수아비는 비록 헌 옷을 걸치고 가으내 들판에 외롭게 서 있는 신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을 한 철 고생한 보람으로 그나마 농부들의 귀여움과 사랑을 한몸에 듬뿍 받으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벅차도록 큰 보람도 느끼고 있을 테니까요.


"얘, 저기 저 옷 좀 봐. 히야, 정말 디자인 하며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걸!“


그날도 백화점 안은 발 디딜 틈조차 없이 사람들이 모여 들끓고 있었습니다. 난 언제나처럼 그런 사람들의 물결을 넋이 나간 언제나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가까이에서 들려 오는 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는 지금 바로 내 앞에 바짝 붙어 서서 나를,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지껄이고 있는 세 명의 멋쟁이 아가씨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워낙에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해 온 나는 그들의 옷차림이나 행동, 그리고 말투로 보아 그들이 대학생이라는 것쯤은 금방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빨간 투피스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학생이 청바지를 입은 여학생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얘, 이 옷은 네가 입으면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겠다. 뭐니뭐니해도 사람은 우선 옷이 날개라는데 넌 만날 청바지 차림이 지겹지도 않니?”


“어머, 말도 안 되는 소리, 얜 내가 돈이 어디 있다구 저런 비싼 옷을 사 입니? 너 돈 많잖아. 마음에 들면 너나 사 입으렴.”


청바지 여학생의 말에 이번에는 투피스가 펄쩍 뛰면서 대꾸하였습니다.


"어머머, 얘 말하는 것 좀 봐. 요즈음에는 돈 많은 사람들이 더 무섭다더니, 니네 아빠가 돈을 잘 버신다는 걸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부잣집 공주님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 거니?“


“아니야. 글쎄, 그건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라니까. 그리고 청바지가 어때서? 난 워낙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아서 그런지 항상 이 청바지가 마음에 들더라.”


"으이구, 이 지독한 구두쇠야. 그래, 알았다, 알았다. 그렇게 청바지가 마음에 들면 아예 청바지하고 결혼을 하렴. 호호호…….“


“아니 뭐라구? 얘가 점점 못하는 소리가 없네. 기가 막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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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바지가 조금 민망한 듯 얼굴을 얼굴을 약간 붉히면서 가볍게 눈을 흘겼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지금까지 옆에서 웃고만 있던 미니스커트 차림의 학생이 끼어들었습니다.


“아니 왜 갑자기 왜 이렇게 시끄럽게 야단들이니? 그럼 이 옷 내가 사 입으면 어떻겠니?”

“네가?”

“네가 사 입겠다고?”


뜻밖이라는 듯, 두 명의 여학생의 눈이 둥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응, 그래. 내가 이 옷을 입으면 안 어울릴 것 같아서 그런다 이거니?”


"아,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래두. 그래, 그래.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 옷은 네가 입는 게 훨씬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걸.”


투피스가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청바지가 금방 뾰로통한 얼굴이 되어 톡 쏘아부쳤습니다.


"아니, 뭐라구? 그럼 지금까지 나한테 잘 어울리겠다고 떠들어댄 것은 나를 한번 떠 보고 싶어서 지껄인 말이었구나?“


“호호호…, 얘기가 어쩌다가 그렇게 됐나? 아니야, 그런 건 아니고 너한테도 잘 어울린다고 말한 건 정말 진심이었다니까.”


"됐어. 다 그만둬. 내가 엎드려 절 받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니?“


그때, 세 명의 여학생들이 한동안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를 들은 종업원 아가씨가 천천히 다가왔습니다.

“안녕들 하세요? 이 옷은 값이 좀 비싸서 그렇지 바느질도 그렇고 아주 잘 빠졌어요. 자, 여길 좀 보세요.”


종업원 아가씨는 으레 그랬듯이 이번에도 내가 입고 있는 옷의 소매며 깃을 제멋대로 뒤집어 보이며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열심히 설명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순간 나는 더럭 겁이 나면서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정말 이 옷이 팔려나가면 그땐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그런 걸 전혀 느끼지 못했던 나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내가 입고 있던 옷이 팔릴 때마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그건 요즈음에 와서 갑자기 나도 사람들처럼 철이 좀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현재 내가 폼을 잡으며 입고 있는 옷은 정말 내 옷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내 마음에 드는 옷이라 해도 일단 손님들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언제라도 한마디 군소리도 못한 채 그들에게 벗어 주어야 하는 손님들의 옷이었던 것입니다.


언젠가는 모처럼 내 마음에 드는 옷을 입은 지 하루만에 빼앗기기도 하지만, 한 시간이나 반 시간도 안 되어 빼앗긴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난 그럴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아무리 내 마음에 드는 옷이라 해도 손님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빼앗길 수밖에 없는 불쌍하고 처량한 신세였습니다.


그리고 옷을 빼앗길 때의 억울함도 그렇지만, 그보다도 더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곤 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입고 있던 옷을 홀딱 벗어주어야만 하는 죽기보다 싫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게 뭐가 그렇게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냐고요? 생각을 좀 해보세요. 그건 아마 나처럼 직접 마네킹이 되어 보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그런 심정을 생각조차 못해 본 남의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안 사셔도 괜찮다니까요. 한 번 입어 보기만이라도 해보시죠.“


조금 뒤, 아니나 다를까. 종업원 아가씨는 서슴없이 내가 입고 있던 웃옷을 훌러덩 벗겨 냈습니다. 난 그 바람에 부끄럽게도 다시 죽기보다 더 창피하고 부끄러운 알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난 순간 부끄러움에 그만 눈앞이 캄캄해지고 말았습니다.


“어머나,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시네요. 자, 여기 거울을 한 번 보세요. 그리고 이 치마까지 입어 보면 더욱 잘 어울리실 것 같은 걸요.”


종업원 아가씨는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신바람이 나서 열심히 설명을 하더니 이번에는 나의 치마까지 홀라당 벗겨 내리는 게 아니겠어요.


아아, 나는 말할 수 없이 다시 부끄럽고도 창피한 생각에 얼른 두 눈을 꼭 감앙버리고야 말았습니다. 웃옷이 벗겨져 나간 것만 해도 몹시 수치스러운 마음에 겨우 견디어 왔는데 이번에는 속옷도 입지 않은 아랫도리까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뒤의 일은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잘 모릅니다. 아직 부끄럽고 수치스럽다는 생각만을 하면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학생들이 모두 사라지고, 내가 입고 있던 옷을 도로 입을 수 있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습니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여학생들 중에 누군가가 내가 입고 있었던 옷이 마음에 쏙 들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잘은 모르지만 그 학생은 청바지 차림의 여학생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학생이 당장은 돈이 부족해서 며칠 뒤에 사와서 사가겠다는 약속만을 남기고 그냥 돌아갔다는 것만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난 언제인지는 분명히 모르지만 그 학생이 내가 입은 옷을 사러 오겠다고 약속한 그날이 돌아올 걱정에 벌써부터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가 되면 나는 다시 옷을 홀딱 벗어야만 하는 굴욕을 피할 수 없을 것이 너무나 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싫든 좋든 종업원 아가씨가 입혀 주는 다른 옷을 입고 다시 손님을 기다려야만 할 일만 남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아 하느님, 전 이제부터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명품 옷도, 그리고 유행하는 옷도 싫습니다. 비록 누더기 옷을 입고 있어도 좋으니까 저에게도 부디 꿈과 희망을 내려주시옵소서!”

메네킹의 눈에서는 어느새, 굵은 눈물 방울이 맺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더욱 괴롭고 슬픈 것은 내가 애타게 부르짖고 있는 목소리도, 그리고 내가 지금 흘리고 있는 눈물조차 그 누구도 들을 수 있거나 전혀 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느님, 제발 저에게도 꿈과 희망을 주시옵소서!“


나는 나도 모르게 혼자 몇 번이고 이렇게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마다 꿈과 희망을 간직하고 쉴 사이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움직임을 언제까지나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