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보르자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국민 음악을 전 세계에 보급하는 데 큰 공적을 남긴 작곡가로 프라하 근방에서 태어났다.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에서 음악을 배우고 프라하 국민 극장에서 비올라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작곡에 힘썼다.
그는 브라암스, 한슬리크 등의 작곡가들과 친하게 지내며 점차 악단에 진출, ‘슬라브 무곡'으로 성공하였다.
그 후, 프라하에서 자작 연주회를 열면서 그때 처음 지휘를 하여 큰 환영을 받고나자 유럽 각국으로 연주 여행을 떠나기도 하였다.
1891년에는 프라하 음악원 교수를 지냈으며 이어서 그 학교 교장이 되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1892년부터 3년간 뉴욕 국립 음악원 교장으로 재직했다.
그 후 오스트리아 상원의 종신 의원이 되었다. 그는 미국에 있을 때, 교향곡 제9번 신세계 교향곡을 작곡했으며, 영국을 자주 방문하면서 '유령의 신부' 및 '교향곡 D단조'를 작곡하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명예 음악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작품은 슬라브풍의 리듬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대담한 화성을 시도하였다. 또한 고전 또는 낭만파의 기법에 의해 민족성을 반영하면서 아름답고도 슬픈 밝은 혼과 풍부한 사랑을 담뿍 실은 음악을 작곡하여 '체코슬로바키아의 차이코프스키’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그가 남긴 작품으로는 '피아노 협주곡 아메리카’ ‘신세계 교향곡' '피아노 3중주곡 둠키’, ‘첼로 합주곡 B단조 등 많은 교향곡과 협주곡, 피아노곡 등이 있다.
역경을 딛고 일어선 음악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 근방에 있는 푸줏간 집을 겸한 하숙집의 장남으로 태어난 드보르자크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 학교에 들어갔다. 학비가 부족하였으나, 부모님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그는 재학 중에 벌써 비올라를 켜면서 교향악단에서 일하였는데, 갖고 싶던 피아노 한 대 살 돈이 없는 형편이었다. 21세에 프라하에 있는 국립 극장의 교향악단에 들어가게 된 그는 지휘자인 스메타나를 알게 되면서부터 비로소 국민 음악의 중요성에 눈뜨기 시작하였다.
그는 34세 때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정부의 예술가 선발 시험에 합격하여 장학금을 받게 되자 그나마 생활이 약간 안정을 찾게 되었다. 더구나 그때 시험 위원으로 있던 브람스가 드보르자크의 작곡 실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의 처지를 출판사에 호소하게 되었다.
그러자 출판사에서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1878년 그의 피아노 2중주 '슬라브 무곡'이 출판되자 다행히 좋은 평을 받게 되면서 그의 이름이 차츰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단 한 편의 작품으로 명성을 얻게 된 드보르자크의 앞길에 그때부터 서광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그는 계속 작곡을 게을리하지 않고 발표한 결과 영국에 9번이나 초청되었고, 미국과 러시아에서도 그를 맞이하며 크게 환영하였다. 그의 그러한 활약은 그에게 많은 명작을 남기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그에게 여기저기서 갖가지 명예로운 자리가 주어졌으니, 1890년 프라하 대학에서 준 명예 철학 박사, 18911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명예 음악 박사, 그리고 같은 해에 프라하 음악원 원장과 오스트리아 귀족원의 종신회원이 된 것이 바로 그가 얻은 명예로운 업적들이었다.
드보르자크가 신장염으로 62세에 죽자, 오스트리아 정부에서는 드보르자크가 자기 나라의 속국으로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이라는 신분을 떠나서 그의 장례를 국장으로 받들어 위대한 작곡가가 생전에 남긴 업적을 전국민에게 알리며 추모하였다.
그의 작품은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 등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현대 음악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리고 도이칠란트, 그 밖의 강대국 작품속에서는 찾기 힘든 슬픔이 깃든 운율은 그의 특색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작곡하여 발표한 '신세계 교향곡만 하더라도 미국의 백인들 속에서 천대받고 있는 흑인이나 아메리카 인디언의 슬픔을 나라 잃은 자신의 민족에 비교하여 작곡함으로써 큰 감동을 주게 되었다.
1893년 드보르자크가 작곡한 교향곡 제5번 E단조 '신세계에서의 부제’가 있으며, 이 곡은 미국에 머물렀을 때 작곡한 곡이다. 제2악장 라르고는 흑인영가에 의한 주제로서 널리 알려진 곡이다.
또한 드보르자크는 슈베르트와 비교되는 다작의 천재로서 샘솟는 듯한 악상으로 거침없이 마치 타이프를 치듯 작곡해 나가는 작곡가였다. 그런 관계로 그의 수많은 작품들 중에는 매우 뛰어난 것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작품들도 뒤섞여 있다.
초기 작품에는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영향을 볼 수 있으며, 또한 바그너와 리스트에 열중했던 시기에는 체코적인 것을 상실한 것 같은 느낌의 곡을 작곡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1867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오스트리아가 체코에 대한 압력이 차츰 완화되자 체코의 민족 운동이 높아지게 되었으며 작곡가로서 인정받게 되었던 드보르자크는 그 후부터는 체코적인 것을 보이게 되었다. 그것은 기악곡에 프리안트, 소우세카, 틈카 등의 민족 무곡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라 하겠다.
그것은 교향시와 오페라의 전부가 슬라브의 제재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뚜렷해졌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니그로나 아메리카 인디언의 음악으로 채색된 미국 시대의 작품도 그것이 단순한 이국 정서적인 미국 음악으로 작곡된 것이 아니라 체코 음악과의 친근성에서 다루어짐으로써 역시 체코적인 음악으로서 통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