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운동가 윤봉길(38)

[윤봉길(尹奉吉, 1908~1932)]

by 겨울나무

윤봉길은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11세 때 덕산 소학교에 입학했으나, 3·1운동의 불길을 보고 크게 분개하여 식민지 노예 교육을 받지 않겠다고 결심한 끝에 스스로 자퇴하였다.

그 후, 독학으로 공부를 하다가 19세 때에 야학을 세워 후배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22세가 되던 해에는 월진회를 조직하여 고향 청소년들의 계몽에 힘쓰기도 하였다.

1930년, 가족들도 모르게 몰래 만주와 중국, 청도를 거처 상해로 망명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세탁소, 외교원, 모직 공장 직공 등으로 일하면서 마침내 김구가, 조직한 '한국 애국단’에 가입하게 되었다.

1932년 일본 천황의 생일을 맞아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전승 기념식을 하는 것을 기회로 한국 독립을 위해 일본 고관들에게 폭탄을 던졌다. 그로 인해 경축식단 뒤에 앉아 있던 상하이 거류민 단장 카와바타, 상하이 파견 사령관 시라카라 등이 죽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과, 제9사단장 우에다, 주중 공사시 게미쯔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 상하이 폭탄 사건은 세계를 크게 놀라게 한 사건 중의 하나였다. 폭탄을 던진 후 곧 체포되어 오오사카로 옮겨져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순국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백범일지 중에서


일본군들에게 폭탄을 던지기 위해 홍커우공원으로 가는 윤봉길 의사는 김구 선생과 함께 마지막 아침 식사를 하게 되었다.


식사가 끝나자 윤봉길 의사는 품속에서 끈이 달린 새 회중시계를 꺼내 김구 선생에게 내밀었다.


“선생님, 이 시계는 어제 제가 새로 산 시계입니다. 선생님께서 쓰시는 시계는 낡았으니 제 새 시계와 바꾸시죠. 제 시계는 아무래도 앞으로 한 시간밖에 더 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김구 선생은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시계를 서로 바꿔 갖게 되었다.


그러자 윤봉길 의사가 이번에는 홍커우공원으로 가는 차를 타러 가는 길에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이번에도 주머니를 뒤져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다 꺼내 김구 선생에게 내밀었다.


“선생님, 이 돈도 받아주십시오.”

“아니 아직 돈은 좀 필요할 것 같은데…….”


김구 선생의 말에 윤봉길 의사가 다시 대답했다.

“아닙니다. 자동차 삯을 주고도 5, 6원은 남을 것 같습니다.”


김구 선생은 목멘 소리로 눈물을 글썽이며 마지막 작별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 우리 죽어서 다시 만납시다.”


윤봉길 의사는 아무 말없이 차창 밖으로 고개만을 끄덕이고 있었다.


오직 일제에 억압받고 있는 우리 민족을 구하기 위해 청년 윤봉길 의사는 그렇게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게 되었다.


그리고 곧 죽으러 가는 윤봉길 의사의 담대하고 꿋꿋한 모습에서 우리는 큰 감동과 숙연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 )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