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는 무인으로서 양광도도순문사(楊廣島道巡門使)의 휘하에 소속되어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적을 인정받아 왕의 호위병으로 뽑히기도 하였다.
59세 때 장군이 되어 1358년에는 오예포에 쳐들어온 왜적의 배를 무려 400여 척이나 격침시켰다.
그 이듬해에는 다시 홍건적이 서경으로 쳐들어왔는데 장군은 이들 홍건적 4만여 명을 보기 좋게 무찌르는 쾌거를 올리기도 하였다.
장군은 또한 전함을 건조하여 해상 경계에도 힘썼으며, 1376년에는 남쪽으로 다시 쳐들어온 왜군을 홍산에서 크게 물리쳐 왜적들도 이에 두려운 장군으로 소문이 날 정도였다.
1388년에는 마침내 수문하시중이란 벼슬자리에 올라 차츰 기울어져 가는 고려를 바로 잡고 일으키기에 힘썼다.
그 후, 명나라가 철령(지금의 강원도 북쪽) 이북의 땅을 탐내게 되자 장군은 랴오뚱을 치기로 결심하고 이성계 등과 함께 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최영은 갑작스러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이성계에게 잡혀 유배되었다가 피살되고 말았다.
장군은 청렴결백한 장군으로 고려를 끝까지 지켜낸 훌륭한 추인이며 명장이었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장군은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 는 아버지(최원직)의 가르침을 받들어 평생을 청렴결백한 마음으로 임금과 나라에 충성을 다하며 살아간 충신 중의 충신이라 하겠다.
어느 날, 최 영의 사위인 안덕린이란 사람이 함부로 살인을 했다는 죄명을 받고 서헌부로 붙잡혀 오게 되었다.
최인을 잡아온 사헌부에서는 입장이 몹시 난처하게 되었다. 나라에 공로가 뛰어나고 더구나 임금의 총애까지 한몸에 받고 있는 장군의 사위였기에 함부로 다룰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덕린이 살인범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죄인을 함부로 대했다가는 나중에 큰 봉변이라도 당하게 될 게 틀림없어.”
“아암, 이 일은 가볍게 처리하는 것이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최영 장군에 대한 도리가 아니겠나.”
“그럼 이 일을 우리 사헌부에서 다룰 게 아니라 직접 최영 장군에게 맡겨보는 게 어떨까?”
“아,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일세.”
결국 이 사건은 그 당시 최영 장군이 우두머리로 있는 순위부(옥을 다스리던 관아)로 넘기게 되었다. 즉 최영 장군 마음대로 죄인을 풀어주거나 가벼운 벌로써 처리하도록 하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이를 알게 된 최영은 크게 노하며 소리쳤다.
“그런 죄인은 사헌부에서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거늘 어찌 순위부로 보낸단 말이오. 또한, 순위부에는 내가 있거늘, 내게 죄인을 보낸 것은 나를 사사로운 인정에 좌우되는 인물로 보고 결정한 일인 것이 분명하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소.”
최영은 결국 죄인을 다시 사헌부로 옮겨 죄를 엄하게 다스리게 해달라는 청을 넣었다. 사사로움이 용서되지 않는 최영의 이런 생각은 그야말로 공명정대한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장군은 북쪽의 홍건적을 두 차례, 그리고 왜구를 크게 무찔렀는데 왜구들은 최영 장군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고 한다.
우왕 14년에는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고 하자, 원라라와 친했던 최영은 명나라의 요동성을 정벌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장군은 8도 도통사가 되어 우왕, 그리고 이성계, 조민수과 함께 출병하여 평양까지 갔으나 그때 친명파인 이성계는 요동 정벌이 불합리함을 내세워 위화도까지 갔다가 군대를 돌려 최영과 우왕을 물리치고 말았다.
그때 최영 장군이 숨을 거두면서 말했다.
“내가 티끌만큼이라도 내 개인을 위해 나쁜 일을 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돋을 것이고, 그와 반대로 나 자신이 청렴결백하게 지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 후, 장군의 묘에는 과연 풀이 전혀 나지 않고 흙만 덮여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장군의 묘는 현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다. 묘 입구에는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큰 석조물이 세워져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