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바쳐 사랑한 조국(41)

[민 영환(閔泳煥, 1861~~ 1905)]

by 겨울나무

조선 말기의 문신인 민영환은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1878년인 고종 15년에 17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1881년에 대사성(고려와 조선시대 성균관의 으뜸 벼슬)으로 있을 때 아버지가 임오군란으로 인해 살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3년 동안 아버지의 상을 치른 효자이기도 하다.

그 후 예조 판서, ·병조 판서 형조 판서 등을 지내고, 1895년 주미 전권 공사에 임명되었으나 을미사변이 일어나 부임하지 못하고 벼슬자리를 내려놓고 말았다.

이듬해 특명 전권 공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와 여러 가지 개혁에 힘썼으며, 군부 대신 등을 지낸 후, 1897년 영국, 도이칠란트,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6개국의 특명 전권 대사가 되어 출발, 아울러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축하식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민영환은 이렇게 여러 선진국을 방문하면서 신문명에 일찍 눈뜨게 되자 고국으로 돌아와서 여러 가지 개혁에 힘썼으며 한국인으로서는 가장 처음으로 양복을 입은 사람이 되기도 하였다.


1896년에는 독립협회가 조직되자 이를 적극 후원하다가 민씨 일파의 미움을 사서 파면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뒤로 다시 참정 대신, 탁지부 대신, 현병 사령관 등에 오르면서 훈 1등 태극장을 받기도 하였다.


1904년(광무 8년)에는 내부, 학부 대신을 지내면서 친일 각료들과 크게 대립하면서 일본의 내정간섭을 규탄하다가 결국 시종 무관장이란 보잘것없는 자리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리고 1905년 마침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위정 대신 조 명세와 함께 궁궐에 나기 이를 결사적으로 반대했으나 일본 헌병들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다시 여러 사람과 합해 상소를 의논하던 중 이미 대세가 기울어짐을 알게 되자 이완식의 집으로 가서 유서 3통을 남기고 단도로 자결하고 말았다.

그가 죽은 뒤에 정이라는 시호와 함께 의정 대신(영의정)의 벼슬이 내려졌으며,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망국을 통탄한 할복


민영환은 을사늑약을 체결할 무렵에 시종 무관장이란 보잘것없는 자리에 밀려나 있었다. 이 벼슬은 임금님을 모시는 임무를 수행하는 자리로서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또 공교롭게도 그는 전처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시골에 가 있는 동안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뭐라고? 조약이 체결되었다고?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


민영환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일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곧 서울로 상경하였다. 서울은 온통 슬픔과 탄식과 눈물과 한숨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에 민영환도 억울함을 견디지 못하고 울었다. 그러나 울음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망국의 조약을 철폐하도록 하라!”


민영환은 곧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을 불러 모아 급히 의논을 했다. 그리고 전에 의정 대신을 지낸 조병세와 손을 맞잡았다. 조병세를 앞장세우고 뜻을 같이하는 관리들을 이끌고 궁전에 나가 엎드려 고종 황제에게 소장을 올렸다.


“박제순 등 일본인의 앞잡이로 을사늑약에 도장을 찍은 다섯 명의 역적을 당장에 처단하고 조약을 곧 무효로 돌려주시오.”


이렇게 외치자 고종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일본 헌병들이 조병세를 잡아 가두고, 민영환 등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러나 민영환은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자신이 소두(상소를 올리는 주동)가 되어 관리들을 이끌고 고종 황제 앞으로 가서 다시 소장을 올렸다. 민영환을 소두로 하는 그들 일행은 고종 황제 앞에 엎드려 울면서 고종 황제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고종의 회답이 내려졌다.


“경들의 충성스러운 애국심은 알고 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유고한 바와 같이 형세가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그만 조용히 물러가도록 하라!”


그러나 민영환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엎드린 채 다시 아뢰었다.


“절대로 물러갈 수 없습니다. 저희들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절대로 물러가지 않겠습니다. 마마!”


민영환의 피맺힌 울음소리는 궁중을 가득 메웠다. 그러자 경무관 오진섭이 나와 다시 고종의 명을 대신 전하였다.

“제발 물러가십시오. 경들이 이러면 이럴수록 폐하께 더욱 괴로움만 끼칠 뿐이오. 자, 어서요."

그러자 민영환은 더욱 울먹이면서 의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신들이 상소한 바 뜻이 이루어진다면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오. 이대로 물러가라기보다 차라리 신의 목을 베시기 바랍니다.”

“저희들의 생각도 같습니다. 저희들의 목을 베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들의 목도 같이 베어 주십시오.”


- 민영환이 자결 당시 입었던 옷 -


하고 여러 사람들이 흐느끼면서 간청을 하였다. 고종도 점점 더 강경하게 나오는 그들의 태도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고종 자신도 민영환의 상소대로 무효라고 선언하고 싶었다. 그리고 일본 사람들이 민영환을 그 자리에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당장 일본 헌병을 풀어 민영환 등을 모두 잡아 가두고 말았다.

일본 헌병대로 끌려간 민영환은 처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벌을 받지 않고 곧 풀려나오게 되었다. 아마 그들도 민영환을 함부로 처벌했다가는 백성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민영환은 그래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곧 민영규, 김종환, 남정철 등 여러 사람과 함께 소청을 종로에 정하고 연이어 상소할 것을 결심했다. 죽을 각오로 물러서지 않으려는 결의였다.


그러나 민영환은 그만 몸져 눕고 말았다. 그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돌아다닌 데다가 슬픔과 울분의 충격이 너무나 크게 겹쳤던 것이다. 그는 의관 이완식의 집에 가서 진찰을 받고 약을 먹으면서 거기에서 몸을 추스리고 있었다. 그러나 민영환의 마음은 급하기만 했지 병은 좀처럼 낫지 않았다.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이미 나라는 기울어져 일으켜 세울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일본의 밥이 되어버린 망국의 서러움을 어찌하랴.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없는 몸이 살아서 무엇하랴!


민영환은 마침내 비장한 결심을 품었다.


“저 오늘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그런 몸으로 어딜 가시려고 하십니까? 며칠만이라도 더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하고 만류하는 이완식의 손을 뿌리쳤다.


“아닙니다. 잠깐 집에 다녀올 테니 염려마십시오.”


민영환은 의관의 집에서 나온 뒤 그 길로 충정로에 있는 자기 집으로 갔다. 가족들을 만나보았으나, 별로 이렇다 할 말은 없었다. 가족들의 얼굴을 잠깐 살펴본 그는 다시 의관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방문을 굳게 잠갔다.


문갑에서 벼루와 종이를 꺼냈다. 먹을 갈고 있는 그의 표정은 너무나 엄숙했다. 먹이 다 갈리자 붓을 들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아!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니 우리 백성들은 장차 생존 경쟁 속에 서 죽어 없어지고 말리라. 원래 살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는 법이요, 죽음을 기약하는 사람은 도리어 삶을 얻으니, 여러분은 왜 이 이치를 모르십니까?

영환은 한번 죽음으로 임금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2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려고 합니다. 영환은 비록 죽으나 죽지 않을 것이오, 저 세상에 가서도 여러분을 돕기로 기약합니다. 동포, 형제 자매 여러분들은 천만 배로 분투 노력하여 뜻을 굳게 가지고 학문에 힘을 기울여 한마음 한뜻으로 모든 힘을 뭉쳐, 우리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돌이켜 준다면 죽은 자도 저 세상에서 기쁨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아! 조금도 실망하지 마라!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 2천만 동포에게 이별을 고합니다.”


민영환이 쓴 유서는 동포에게 고하는 유서였다. 그리고 또 한 장의 유서를 썼다. 그것은 한국에 와있는 외국 사절에게 고하는 글이었다.


“일본의 야망을 똑똑히 살피고 우리나라가 자주독립 국가임을 당신들 나라에 알려달라.”


라는 간곡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고종 황제에게 올리는 상소장을 다시 가다듬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궁궐을 향해 엎드려 절을 올렸다. 그리고 곧 품에 간직하고 있던 칼을 꺼낸 다음 가슴을 향해 깊이 찔렀다. 그리고 연이어 배를 갈랐다. 가슴과 배에서는 새빨간 피가 용솟음침 흘러나왔다. 그리고 곧 앞으로 고꾸라지며 숨을 거두고 말았다.

1905년 11월 30일 오전 6시 45분! 그는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때 먼동이 터오는 하늘에서 유난히 큰 별이 떨어졌다. 술을 거둔 그의 방 앞에 난데없는 까치들이 모여 슬프게 울었다고 한다.

푸른 대나무와 같이 곧고 바른 그의 절개! 나라의 운명과 함께 한 민영화의 충성심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더불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민영환이 이렇게 숨졌다는 소문이 퍼지자,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 왜놈들과 싸웠다. 또한, 그의 뒤를 따라 자결하는 지사도 많았다. 이에 고종 황제는 그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충정’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그 의로운 행적과 절개를 기리기 위하여 정문을 세우기로 하였다. 그가 살던 동네를 충정로라 이름 붙여 그의 충성된 마음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


1962년 3월 1일에는 안국동 네거리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대나무로 나타난 충성심


민영환이 자결한 뒤에 그가 남긴 피 묻은 옷과 칼을 마루방에 간직해 두었었는데 그 이듬해인 1906년 그곳을 열어보니 마루 틈에서 4개의 줄기와 9개의 가지와 48개의 딮사귀가 달린 푸른 대나무가 솟아 있었다고 한다.


이는 아무리 꺾으려 해도 꺾이지 않는 그의 충성심이 대나무로 변하여 자라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 * )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