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월간「한맥문학」수필부문 신인상 당선작 -
금년에도 어김없이 가을은 또 우리들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우리는 오랜 그 옛날부터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의 기후를 큰 자랑거리로 여기며, 또한 그런 가을을 마음껏 만끽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지구온난화로 인한 이상기온으로 인한 변화 때문인지 불과 몇 해 전부터는 사계절이 뚜렷했던 우주의 섭리를 마치 조롱이라도 하듯 큰 변화의 징조를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무더운 여름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곧바로 초겨울이 찾아오는가 하면, 또한 겨울이 가기가 무섭게 봄기운을 느끼기도 전에 성급하게 여름이 오는 그야말로 이상기온 현상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어찌 됐든 해마다 가을철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삼천리 금수강산은 온통 형형색색의 오색단풍으로 치장을 하고,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비록 짧게 느껴지는 가을이긴 하지만, 어쨌든 우리나라의 가을은 아직도 가을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해마다 되풀이하여 찾아오고 있는 이 사계절은 결코 그 누군가가 어서 오라고 원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또한, 누군가가 특별히 초청을 해서 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누군가가 어느 계절을 견디기가 너무나 지겹고 힘이 드니 어서 가라고 윽박지르거나 쫓는다고 해서 고분고분하게 물러가 주는 그런 호락호락한 상대도 아닌 것이 바로 계절만이 가진 특성이라 하겠다.
또한, 계절은 우선 누가 뭐라고 해도 오직 자신이 맡은 바 책임을 묵묵히 실천하는 우직함과 고집이 대단한 존재라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날 이 지구상에 몸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인간들의 세상살이가 어떻게 변해가든 말든, 그리고 이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는 수많은 삼라만상들이 어떻게 변해 가든, 그런 자질구레한 사건들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듯 왼눈 하나 깜빡이거나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오직 그들만의 고집과 책임감을 잃지 않고 해마다 어김없이 계절의 변화를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사계절은 오랜 태고 적부터 오늘날까지 늘 변함없이 쉬지 않고 우리들과 함께 동고동락을 함께 하며 끈질긴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리 흔치는 않지만 해마다 계절이 바뀜에 따라 남다른 고통과 괴로움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계절 중에서도 특히 봄과 가을철이 돌아올 때마다 이른바 계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인 것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 흔히 ‘계절을 타는 사람’이라고 달리 표현하기도 한다.
계절병을 앓고 있는 그들의 보편적인 증상은 각양각색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을 살펴보면 갑자기 정신적으로 우울해지거나 쓸쓸해진다든지, 그 밖에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신체적인 이상을 보이는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 결과 온몸의 힘이 빠져서 몸을 가누기조차 어렵다는 이상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는 게 하는 게 공통된 특징이라 하겠다.
또한, 그 계절병에 걸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증상들이 그저 하찮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 나머지 안일하게 그냥 방치하는 경우가 많은 게 현실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위험하면서도 잘못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언젠가는 괜찮아지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대로 방치하다가 전혀 예상 밖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매우 무섭고도 심각한 병이 바로 계절병이기 때문이다.
어쩐지 한편으로는 좀 쑥스러우며 민망스러운 감이 없지는 않지만, 기왕에 말이 나온 김에 이 자리를 빌어 사계절 중에서도 특히 ‘가을’을 꼭 집어서 주제로 삼게 된 나의 솔직한 심정을 이실직고하고자 한다.
아마 이 세상에 가을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리 흔하지 않으리라.
나 역시도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가을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마냥 풍요롭기 그지없는 가을 정취에 취하다 보면, 왠지 모르게 먹지 않아도 저절로 배가 부를 것같은 착각과 행복감에 흠뻑 젖어 해마다 가을이 오기를 그토록 목마르게 기다렸던 나 자신이기도 하였다.
들판 가득 알알이 황금빛으로 누렇게 익은 벼 이삭들은 살랑살랑 불어오는 가을 바람에 따라 고갯짓을 하며 흥겹고도 화려한 무도회가 열린다. 그리고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자식을 키우듯 일 년 내내 온갖 정성을 다해 가꾸어 온 각종 풍성한 채소, 그리고 나뭇가지마다 부러질 정도로 큼직하고 탐스럽게 주렁주렁 매달린 갖가지 과일들을 거수확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며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농부들의 모습 또한 정겹기 그지없다.
이 얼마나 먼 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어찌 뿌듯하고도 정겨우며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것 같은 정경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토록 좋은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나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고 쓸쓸해지며 우울해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왠지 모르게 풍성한 결실을 맺는 모든 곡식들이나 채소, 그리고 각종 유실수들을 바라볼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부러워하고 동경하는 습관이 슬그머니 몸에 배기 시작하였다.
물론 여러 종류의 농작물도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가을이면 어김없이 탐스러운 열매를 맺곤 하는 모든 유실수들이 부럽다 못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는 마음이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더 솔직하고 자세하게 말하자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종류의 유실수들 중에서도 특히 험한 산과 들에서 그 누구의 보살핌을 받아본 적이 없이 이른바 홀로서기를 하여 마침내 결실을 맺고야 마는 야생으로 자란 유실수들을 더욱 존경하고 부러워하게 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여름의 모진 가뭄이나 폭풍우, 그리고 갖가지 병충해의 무서운 공격은 물론, 갖가지 견디기 어려운 역경에 시달리면서도 단 한 번이라도 그 누구에게도 도와달라는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도 않았다. 그리고 오직 혼자 묵묵히 홀로서기로 성장하여 마침내 탐스러운 결실을 맺고야 마는, 어찌 보면 거룩하고 위대한 승리자들임에 틀림으리라. 그리고 그들 모두가 호들갑스러운 일부 인간들과는 달리 누가 독촉을 하든 말든, 늘 묵묵히 자신이 맡은 바 사명을 다하는 열정을 잃지 않고 있다.
또한, 그들은 우리 인간과는 달리 장차 나는 어떤 꽃이나 열매를 맺고야 말 것이라고 전혀 미리부터 큰소리로 부리거나 거드름을 떨지도 않는다. 오직 자신이 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누가 관심을 가지고 자신을 지켜보든 말든 그런 것에는 아무 관심이나 상관이 없다. 그저 자신이 맡은 바 임무를 다하기 위해 부지런히 그리고 오직 실천만을 행하는 우직하면서도 믿음직하고도 성실한 철학만을 소유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그들의 성장 과정이 우리 인간들의 눈에는 잘 나타나지도 않는다. 하지만 잠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성장을 거듭하기에 우리들이 모르는 사이에 장차 큰 결실을 약속하며 해마다 풍성한 가을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서두르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해마다 거듭되는 고통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이미 지난겨울에는 뼈를 깎는 듯한 모진 추위와 역경, 그리고 각가지 병충해와 싸워 당당히 이겨낸 위대한 승리자임에 추호의 손색이 없는 존재들이다.
봄에는 귀여운 새 눈을 틔우고 새싹이 돋아나게 하기 위한 조심스러운 정성이 있었고, 무쇠라도 녹일 듯한 뜨거운 한여름에는 불볕더위와 폭풍우를 이겨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마치 지옥같은 경험을 이겨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가을이면 어김없이 탐스럽고 먹음직스러운 결실을 맺고야 마는 위대한 위력을 지닌 존재들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 모두가 아무리 자연과 하늘이 내려준 섭리라고는 하지만 난 언제부터인가 그 어떤 역경이 닥쳐와도 좀처럼 굽힐 줄 모르고 그때마다 번번이 싸워 이기는 그들의 뭄서운 정신력과 위력에 난 자신도 모르게 감탄스러움과 함께 그들에게 값진 교훈을 터득하곤 하면서 나 자신도 모르게 나 자신과 비교하는 습관을 얻게 되었다.
그들은 아무 말없이 해마다 묵묵히 저토록 값진 결실을 맺곤 하는데 소위 자칭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컫는 나는 과연 그동안 어떤 결실을 이루어냈던가!
누구나 한두 번쯤은 그런 경험을 했겠지만, 나 역시 오래 전부터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다부진 각오로 번번이 알찬 계획을 세우곤 하였다. 그리고 금년 만큼은 작심삼일이 되지 않도록 계획한 일을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하며 미리부터 큰소리를 쳐본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해마다 연말이 되면 번번이 가슴이 허전해지곤 하는 일의 반복이 거듭되고 있다. 해마다 이런저런 핑계와 이유로 인해 나 자신이 계획했던 일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그 결과는 바로 나 자신의 태만함 때문이라는 뉘우침으로 귀결했을 때 그저 가슴 한쪽이 허전해지면서 후회만 남는 일이 거듭되고 있을 뿐이다.
일찍이 그 누군가는 인간을 일컬어 자칭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나 역시 분명히 영장임에 틀림없지 않은가. 그런데 나 자신은 어찌 산과 들판에서 제멋대로 자라고 있는 하찮아 보이는 그 어느 유실수만도 못하단 말인가. 아무리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해 보고 반성을 해봐도 부끄럽고 한심한 것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또 다시 가슴 한 쪽이 심하게 답답하고 허전해 오곤 하는 것이다.
금년에도 가을은 또 어김없이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오고 있다. 난 금년에도 어김없이 가을이 오기도 전에 심한 계절병에 시달리며 벌써부터 온몸의 힘이 쑥 빠져나가면서 또 다시 계절병이 도지기 시작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