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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Sep 05. 2020

꼭지가 돌아버린 사람들

[누구나 그런 상황이라면 꼭지가 돌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될 것이다]

요즈음은 어떤 일을 하기가 자신의 능력에 맞지 않아 너무 힘이 들거나 감당하기 어려울 때 ‘꼭지가 돌아버린다’거나 또 다른 말로 ‘머리에 쥐가 날 뻔했다‘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는 것 같다.      


’꼭지‘란 정확히 말해서 오이나 사과 배 등, 그리고 나무의 잎사귀가 가지에 달려 있도록 하기 위해 달린 짧은 줄기, 또는 주전자나 솥 등의 손잡이를 일컫는 말이다.      


사실 오이나 사과 등, 어떤 과일의 꼭지를 바짝 돌려버리고 나면 그 과일은 이미 생명을 잃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꼭지가 돌아버린다‘란 말은 정상을 유지하고 있던 정신에 갑자기 이상이 생겨 아예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본성을 잃어버리는 것 즉 머리가 아주 돌아버리다 못해 결국 실성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옛날에 몹시 이와 비슷한 긴박했던 상황을 대변해 주는 이런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어느 집 머슴이 꼴을 베기 위해 지게를 지고 먼 들판으로 나갔다. 소까지 몰고 나갔다. 지금은 모두 사려를 먹여서 기르고 있지만, 그 시절에는 집집마다 소나 돼지를 먹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풀이 필요했다.     

 

그 밖에도 풀을 베어두었다가 땔감으로 이용하거나 두엄을 만들어 쌓기 위해 풀을 너무 많이 베었기 때문에 어딜 가나 풀이 별로 남아나지를 않았다. 돼지와 소 같은 짐승들은 자주 엄청난 양의 배설을 하기 때문에 외양간이나 돼지 우리에 깔아 줄 풀이 수시로 많이 필요했다. 그래서 어딜 가나 풀이 별로 없어서 꼴 한 번 베러 나가면 여기저기 헤매곤 하였다.    

    

그러기에 머슴은 한동안 이리저리 다니면서 고생을 한 끝에 결국 소를 먹일 꼴을 지게로 한 짐 채우게 되었다. 꼴 짐을 등에 진 다음 가벼운 마음으로 소를 몰고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그런데 한동안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기고 말았다. 갑자기 똥을 곧 쌀 것처럼 급했던 것이다. 아마도 설사가 났던 모양이었다.      


머슴은 급히 꼴 지게를 내려놓고 급히 바지에 맨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그 시절에는 누구나 한복 바지에 긴 끈으로 된 허리띠를 잡아매고 다녔음) 그러나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허리끈이 옭매져서 마음처럼 쉽게 얼른 풀리지를 않았다. 머슴은 다급한 마음에 우거지상이  되어 허리띠를 풀기 위해 쩔쩔매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이렇게 급한 상황에 이번에는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 번개를 치면서 소나기까지 퍼붓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다음에는 지금까지 얌전히 서 있던 소가 천둥소리에 깜짝 놀라 어디론가 허둥지둥 힘껏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소가 도망갈 때 꼴 짐을 버티고 있던 작대기를 건드려 꼴 짐은 보기 좋게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머슴은 미칠 지경이었다. 금방 쌀 것만 같은 급한 볼일은 봐야 하는데, 꼴 짐은 나동그라지고, 소나기는 억수로 쏟아지고 있고, 소는 멀리 도망가고 있고, 과연 이런 때는 어떤 일을 먼저 해야 할지 누구나 허둥거릴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머슴은 우선 똥은 바지에 싸든 말든 소를 잡기 위해 급히 뛰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그때 누군가가 멀리에서 달려오면서 소리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조금 전에 장인이 돌아가셨으니 빨리 가야 한다고…….       


아마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누구나 꼭지가 돌아버리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될 것이다.       


          

군인 트럭 추락 사건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자동차 구경 한번 하기가 참 어려웠다. 그래서 어쩌다 학교에 오가는 길에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가기라도 하면 큰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너무나 신기했다.  

    

그래서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흙먼지를 펄펄 날리면서 달리는 자동차 뒤를 먼지를 흠뻑 뒤집어쓰면서 아이들 모두가 자동차의 뒤를 있는 힘을 다해 뛰어가며 따라가 보곤 하였다.   

   

또한, 늘 촌구석에만 살아가면서 기차 구경 한번 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평생 기차 구경을 한번 해보거나 타보고 싶은 게 평생소원이기도 하였다. 그만큼 기차를 타보게 되는 기회도 적었으며 자동차도 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그때 초등학교 5학년인가 6학년 사회 교과서에는 뉴욕의 거리를 흑백으로 찍은  한 장면이 기억난다. 드넓기만 한 자동차도로, 그 도로 위를 질주하고 있는 수많은 자동차들의 행렬, 그때 뉴욕 시민들의 자동차의 수는 시민 네 명당 1대꼴이라고 교과서에서는 설명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미국이란 나라가 어찌나 부유해 보이고 부러웠던지!       


그 후, 60년대 말경, 우리나라에도 드디어 자동차 수가 눈에 띄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때 ’마이카‘라는 말이 한때 유행하기도 하였다. 우리도 언젠가는 마이카 시대가 오고야 말 것이라고……. 그런데 그때 우습게 들었던 그 말은 불과 몇 십 년이 흐른 지금 꿈이 아닌 현실이 되고 말았다.       


요즈음은 어딜 가나 자동차 때문에 골치를 앓게 될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딜 가더라도 우선 주차가 걱정거리가 되고 말았다. 주택가마다 ’주차금지‘라는 표지판을 세워두어 자동차의 접근을 막는가 하면 어딜 가나 차가 심하게 막히고 특히 출퇴근 시간만 되면 도로는 마치 주차장을 방불케 하였다.  

     

집은 없어도 자동차 한 대씩은 있어야 하는 세상, 아니 한 대가 아니라 좀 여유가 있는 집은 한 집에도 서너 대씩 있어서 그 모두가 때로는 문명의 이기가 아닌 애물단지 취급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어느 해 초여름이었나 보다.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시오리 길이나 되는 학교를 매일 다녀야 했다. 중학교도 같이 있어서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도 별수 없이 그 길을 다녀야만 했다.      


학교에 오가려면 몇 개의 산을 넘고 논두렁 길을 건너고 개울을 건너면서 다녀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혼자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오늘도 여느 때처럼 산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이제 약 2K미터 정도만 더 가면 우리 집이었다. 좁은 산길 옆 바로 밑으로는 논이 있었다. 초여름이어서 얼마 전에 모를 낸 논에는 벼들이 뿌리를 내린 채 비료를 먹어서 그런지 시커먼 빛깔로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었다. 논바닥에는 물도 가득 차 있었다.  

     

무심코 산길을 다 벗어났을 때 난 문득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내가 걸어가고 있는 길가에 난데없이 웬 연기가 하늘 높이 펑펑 솟아오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세히 다가가 보니 그곳에는 아직 덜 탄 책가방이며 운동화 등이 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불을 지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상한 생각에 이번에는 저 밑에 있는 논바닥을 바라보게 되었다. 길에서 한 길이 훨씬 넘을 정도로 논바닥은 깊었는데 잘 자라고 있던 모가 모두 비행기 폭격을 맞은 듯 심하게 쓰러진 채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쓰러지기만 한 게 아니라 논바닥에 큰 구덩이가 파여 있기도 하였다. 심상치 않은 큰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나중에 마을에 와서야 논바닥이 그렇게 되었던 기막힌 사연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날은 마침 어느 부대에서 우리 육군들 세 명이 트럭을 한 대 몰고 산에 와서 떼를 뜨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 부대에서 뗏장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리고 떼를 다 뜬 군인들이 떼를 트럭 가득 싣고 마악 출발하려고 할 때였다. 그때 마침 우리 동네 중학생 세 명이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트럭을 발견하자 군인들에게 떼를 썼다고 한다. 트럭을 한 번만 좀 태워달라고……. 그만큼 자동차가 귀했던 시절이어서 한번 타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다.      


군인들은 학생들의 요구를 한마디로 거절했다고 한다. 트럭 가득 뗏장을 실어놓아서 트럭에 탈 자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뗏장 위에라도 좋으니 딱 한 번만 태워달라고 애원을 했단다. 아마 군인들이 마음씨가 착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하도 조르는 바람에 학생 세 명을 떼 위에 태우고 가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트럭이 그 연기가 났던 그곳을 지나갈 때였다. 길이 너무 좁아 아무리 산밑으로 바짝 차를 몰아도 자칫하면 자동차 바퀴가 길가 논 밑으로 구르게 될 판이었다. 그런데 조금 뒤 아니나 다를까 트럭이 기우뚱하는가 했더니 트럭이 그만 눈 깜짝할 사이에 논바닥으로 굴러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사고로 인해 세 명의 학생들 모두가 먼저 논바닥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이 논바닥으로 떨어진 위에 뗏장이 바로 학생들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졸지에 학생 세 명이 뗏장으로 덮히며 논 물속에 뗏장과 함께 생매장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야말로 참극이 벌어진 것이다.  

     

조금 전에 연기가 난 것은 그 학생들의 시체를 일단 수습한 뒤, 그들의 가방과 모자 그리고 운동화를 건져낸 뒤에 휘발유를 뿌리고 태우게 되었던 것이다.      

 

졸지에 금이야 옥이야 하고 기르던 아들들을 잃게 된 부모님들은 그야말로 꼭지가 돌 판이었다.      


그중 한 어머니는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그만 실성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바보가 아니면 미친 사람처럼 늘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누가 뭐라고 말을 걸어도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혼자 떠돌아다니면서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중얼거리기도 하고 무슨 노래인지는 모르지만 혼자 흥얼거리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백 원짜리 동전 사건      


초등학교 저학년에 다니던 여자아이가 있었다. 저학년이었다. 어느 날 등굣길에 엄마에게 용돈을 좀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엄마, 나 백 원만 주면 안 돼?” 

“내가 돈이 어디 있니? 돈이 그렇게 필요하다면 느이 엄마나 팔아서 가져가렴.”     


엄마도 속이 상하고 답답했다. 딸에게 미안하기도 하였다. 그때만 해도 백 원은 제법 큰 돈이었다. 그래도 자꾸만 조르는 딸을 엄마는 야단을 치다시피 학교가 늦었으니 어서 가라고 내쫓아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조금 뒤, 엄마에게 그만 깜짝 놀랄만한 비보가 들려왔다. 바로 조금 전에 학교로 쫓아버린 딸이 골목길을 급히 달려가다가 그만 자동차에 치어 안타깝게도 사망을 하고 만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엄마는 그만 그 자리에 선 채 바로 꼭지가 돌아버리고 말았다. 누구한테라도 빌려서라도 백 원을 주지 못한 것이 납덩이처럼 엄마의 가슴을 짓누르게 되었다. 백 원짜리가 그만 한이 맻히고 말았다.  

    

엄마는 그때부터 모든 정신 줄을 놓은 채 미쳐서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그리고 집집마다 다니며 구걸 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길에서 사람들을 마주쳐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걸인들처럼 식량이나 찬밥이라도 달라고 구걸하는 것이 아니었다.      


"백 권짜리 동정 한 개만 주세요! 네?"


오직 백 원짜 동전만 한 개 달라고 요구하는 구걸이었다. 어쩌다 5백 원짜리 동전이나 천 원짜리 지폐를 줘도 번번이 물리치곤 하였다. 오직 백 원짜리 동전만 받고 다니는 구걸이었다. 그 동전을 모아두었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딸에게 주어야 한다며 백 원짜리만 보면 좋아서 환장을 하며 받곤 하였다.   

   

아무리 똑똑하고 멀쩡했던 사람이라 해도 이렇게 어느 날 갑자기 꼭지가 돌아버리고 미쳐버리는 것은 순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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