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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Sep 12. 2020

그건 정녕 학교가 아니었다

[6.25 동란 시절의 학교 생활]

6.25 전쟁으로 인해 학생들은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학교가 폭격으로 불에 타버렸거나 교실이 흔적도 없이 처참하게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비행기 폭격으로 인해 운동장은 여기저기 깊게 파인 커다란 웅덩이가 몇 군데 생겼다. 그래도 선생님들이 가끔 학교를 나오라는 연락을 해서 학교에 나가는 날도 더러 있었다. 학교에서 오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의 인편을 통해 마을마다 연락을 해주곤 하는 것 같았다.      


등교 시간도 따로 없고 제멋대로였다. 오전이고 오후를 가리지 않고 아무 때나 학교에서 나오라는 소식이 들려오면 그때마다 십 리나 이십 리를 걸어 우르르 학교로 달려가곤 하였다.


등교 시간이 따로 없으니 당연히 하교 시간도 따로 없었다. 공부는 한 시간도 좋고 두 시간도 좋았다. 그야말로 공부를 하는 시간이 엿장수 마음대로였다.      


아무 때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그게 하교 시간이었다. 그나마도 며칠 만에 한 번씩 등교를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몇 달이 걸리기도 하였다. 전쟁으로 인해 인민군들이 진격해 올 때는 공부는 열두 번째였다. 그보다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피란을 가는 것이 더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학교에 갈 수 있는 날은 그나마 인민군들이 후퇴를 하고 우리 국군들이 진격해 와서 국군들이 주둔해 있을 때만 가능했다.      


그때 우리 학교 울타리에는 수십 년 묵은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가 몇 그루 자라고 있었다.


선생님들은 어디서 구했는지는 몰라도 작은 칠판 하나를 플라타너스 나무 기둥에 못으로 박아 칠판이 떨어지지 않은 정도로만 엉성하게 겨우 고정해 놓았다. 그리고 어디서 구했는지 백묵도 용케 구해 가지고 있었다. 난 학교에 갈 때마다 플라타너스 밑에서 공부를 하곤 하였다.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선생님이 가장 많을 때는 3명 정도였고, 적을 때는 한 명만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선생님들은 학교 부근 잔디밭이나 남의 집 밭에 자리를 잡고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물론 학생들이 앉아서 공부를 해야 할 책상도 의자도 없었다. 그래서 각자 짚으로 만든 가마니를 운동장 바닥에 깔고 앉아서 공부를 하였다. 책상 대신 각자가 네모난 큼직한 상자갑을 구해서 대각선으로 끈을 묶은 다음 어깨에 메고 그 상자갑을 책상 삼아 글씨를 썼다. 그 상자갑마저도 구하기가 어려워서 미군들이 쓰레기통에 버린 것을 주워다 사용하게 되었다.       


그때는 공책도 연필도 아주 귀했다. 교과서도 없었고 오늘은 어떤 과목을 배우게 될 것이라는 것도 전혀 모른 채 셈본이건 국어건 가르치는 대로 그냥 배우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교과서도 없고 공책이나 연필도 없이 맨몸으로 그냥 멀거니 앉아서 주로 선생님의 설명만 듣기만 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어쩌다 선생님이 질문을 하게 되면 대답을 하는 수업 형태였다.   

      

공책이 너무 귀했으므로 공책 대신 어쩌다 미군인들이 던져 준 쵸콜릿이나 껌 종이에 글씨를 쓰는 학생들도 많았다. 껌 종이나 쵸콜릿 종이를 많이 모아두었다가 인두로 잘 다린 다음 여러 장을 바늘로 꿰매서 공책 대신 사용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그토록 종이가 귀했기 때문에 길을 가다가 껌이나 쵸컬릿 종이가 있으면 어김없이 모두 주워서 모으곤 하였다. 그리고 어쩌다 운이 좋을 때는 미군들이 트력을 타고 가다가 던져준 껌이나 쵸컬릿을 먹고 난 포장지를 소중히 잘 보관해 두었다가 공책 대신 사용하기도 하였다.    

   

물론 등교 시간도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오전 오후를 가리지 않고 학교로 나오라고 하는 시간이 등교 시간이었다. 등교 시간이 그러니 하교 시간도 따로 없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가르치다가 보내주면 그게 하교 시간이었다.   


선생님들도 더 가르쳐주고 싶어도 더 가르쳐 줄 수 없는 상황이 이따금 벌어지곤 하였다. 갑자기 비라도 오게 되면 그게 곧 하교 시간이었다. 우비도 없고 우산도 귀했던 시절이어서 그대로 온몸에 비를 흠뻑 맞으며 집으로 도망치듯 달려가거나 학교 부근에 있는 어떤 집 처마 밑으로 가서 비를 긋기도 하였다.    

   

수업 도중에 수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경우도 빈번히 벌어지기도 한다. 갑자기 폭격기 소리가 들려올 때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폭격기가 일단 떴다 하면 언제 어디를 폭격하게 될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폭격기가 떴을 때도 바로 방공호(그 시절에는 방공호가 따로 없어서 땅을 깊게 파놓았다가 위험할 때는 그 속으로 들어가서 피했음)로 피하거나 죽을 힘을 다해 집으로 줄행랑을 치곤 하였다. 그야말로 말이 학교이지 어떤 때는 학교가 아니라 특수 군사훈련을 받으러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학년도 따로 없었다. 1학년이건 6학년을 가리지 않고 한자리에 앉아서 선생님이 가르치는 똑같은 과목 똑같은 내용의 수업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이가 많은 학생들이나 나이가 아주 적은 학생들이 같이 앉아서 공부를 해야만 했다. 선생님들의 인원이 부족해서 학년별로 따로따로 가르칠 여건이 마련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학교가 그렇게 학생들이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서 그랬나 보다. 가끔 은 선생님들이 직접 마을마다 순회를 하면서 가르치기도 하였다. 우리 마을에서는 선생님이 올 때마다 으레 뒷동산에 있는 넓은 잔디밭 공터가 학교가 되었다.       


선생님마을마다 순회를 하며 가르치는 것은 주로 노래였다. 선생님이 한 소절 선창을 하고 나면 학생들은 선생님이 부른 노래를 따라서 부르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때 주로 선생님이 열심히 가르친 노래는 가수 현인이 부른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로 시작되는 ‘전우야 잘 라’라는 노래였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아이러니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선생님은 국군이 주둔했을 때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적군 즉, 인민군이 이 땅에  침범해 왔을 때도 마찬가지로 학생들을 모야 놓고 가르치곤 하였다.    

  

그런데 적군들이 쳐들어왔을 때는 ‘전우의 시체를 넘고넘어’를 가르치던 바로 그 선생님이 이번에는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조국……’이란 가사로 시작되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가르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그래서 그때 선생님에게 배운 ‘김일성 장군의 노래’도 가사와 곡을 모두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 아마 그때 선생님들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그렇게 약 3년간 몇 차례 피란을 가기도 하고 고향에 돌아오기도 하면서 뼈저린 고생을 하면서 지내는 동안 마침내 휴전이 되고 말았다.      


그때 우리들을 가르쳤던 선생님은 휴전 후에도 계속 교사직을 하다가 나중에는

우리 고장의 교육청 학무과장직까지 맡기도 하였다. ‘전우야 잘 자라’와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가르쳤던 바로 그 선생님이…….      

 

난 2학년을 다니다가 전쟁이 일어났기에 전쟁만 아니었다면 현재 5학년 2학기에 재학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기에 약 4년간이나 다니지 못한 학교를 다닌 셈 치고 휴전을 하던 해 9월에 그대로 5학년 2학기로 껑충 뛰어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결국, 저햑년에서 익혀야 할 기초 학력을 모두 무시한 채 겁도 없이 그냥 올라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폭격을 맞은 학교는 아직도 다시 복구하거나 짓지 못해서 여전히 당분간은 운동장 바닥이나 여전히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결국  6학년에 올라가서야 겨우 미군부대에서 군용 천막을  하나 구해와서 천막 안에 들어가서 공부를 할 수 있었지만…….      



그런데 참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게 되었다. 같은 반이긴 하지만 서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자면 나와 같은 나이에 입학한 학생 중에는 휴전이 되자 도로 2학년 ㅇ2학기로 들어가서 배우게 되었다. 또 심지어는 전쟁 전에 고등학교에 들어갈 학생이 3년 이상 학교를 안 다니다가 우리반 즉 5학년 2학기로 들어온 학생도 있었다.      


그런 학생들이 많다 보니 비록 같은 반이긴 하지만 서로 나이 차이가 많아서 존댓말을 써야 하는 경우도 생기고 말았다. 또 나보다 하급생이긴 하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내가 오히려 존댓말을 써야 할 경우도 벌어지게 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그야말로 그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심지어는 우리 반 여학생 중의 한 사람은 이미 약혼까지 한 사람도 있었다. 또한 우리 반 남학생 중에 한 사람은 이미 4학년 때 결혼을 한 사람도 있었다.      




전쟁!      


그것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아름다운 삼천리 금수강산을 송두리째 모두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아무 죄도 없는 수많은 우리 국민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전쟁은 결과적으로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은 우리 민족의 큰 비극임에 틀림없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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