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놀이]
가을의 햇살이 제법 따가운 일요일 아침입니다.
지영이는 오늘도 아침밥을 먹기가 무섭게 수동이네 집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는 마침 다행히 수동이가 직접 받고 있었습니다.
"수동아, 나 지영이야. 우리 소꿉놀이하지 않을래?”
“그래? 근데 난 아직 밥도 먹지 않은걸.”
수동이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오자 지영이는 너무나 반갑고 기분이 좋아서 금방 표정이 환해졌습니다.
“저런 게으름뱅이 같으니……. 그럼 얼른 밥 먹고 나오면 될 게 아니야? 난 벌써 밥을 먹고 치운 지가 옛날이다. 옛날.”
지영이는 바로 조금 전에 밥을 먹었으면서도, 공연히 신바람이 나서 거짓말까지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또 어떤 소꿉놀이를 할 건데?“
소꿉놀이란 말에 솔깃해진 수동이가 다시 지영이에게 물었습니다.
“지난 일요일에 했던 엄마 아빠 놀이 밀이야.”
“엄마 아빠 놀이라구?”
“그래. 너 벌써 까먹었니? 넌 아빠가 되고, 난 엄마가 되는 소꿉놀이 말이야.”
“후후훗, 이제야 생각났다! 그러니까 그때 했던 부부놀이를 오늘도 다시 해 보자 이 말이지?”
수동이는 부부놀이란 말에 뭐가 그렇게 좋은지 벌써부터 신바람이 나서 킬킬거립니다. 그러자 지영이는 순간 저도 모르게 공연히 얼굴이 빨개지면서 작은 목소리로 수동이를 나무랍니다.
"그래, 이 멍청아, 좀 작은 소리로 말할 수 없니? 이건 절대로 비밀이란 말이야. 비밀! 누가 들으면 어떻게 하려구 그렇게 큰소리로 떠들고 있니?”
"후후훗, 뭐? 내가 바보라구? 이건 어디까지나 소꿉놀이이고 장난인데, 누가 들으면 어때? 이 바보야.”
수동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더욱 더 큰소리로 떠들면서 킬킬거립니다.
"그래도 그렇지. 난 그거 누가 알면 싫단 말이야. 아무튼 너 밥 먹고 나올래, 안 나올래?“
“응, 알았어. 내가 빠지면 엄마 아빠 놀이가 되겠니? 참, 그런데 어디로 나가지?”
“어딘 어디야. 그때 거기 아주 좋잖아.”
“알았어. 그럼 밥 먹고 금방 나갈 테니까 너 먼저 거기 가서 기다려. 알았지?”
"그래, 알았어. 너 빨랑 나와야 한다?“
”그래, 알았다니까.“
통화를 끝낸 지영이는 벌써부터 신바람이 나서 저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옵니다. 그리고는 곧 허둥지둥 살림살이를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살림살이라야 플라스틱으로 만든 장난감 놀이기구 세트와 깔고 앉을 자리, 그리고 여자아이 인형 한 개가 모두입니다.
이윽고 살림살이를 챙겨 들고 단숨에 공터로 달려온 지영이는 햇볕이 잘 드는 평평한 곳에 자리를 깔았습니다. 그리고는 솥이며 냉장고, 가스렌지 등, 세간살이를 정성껏 얌전하게 늘어놓기 시작하였습니다.
”수동이가 회사에서 오기 전에 얼른 저녁밥과 반찬을 맛있게 차려 놓고 기다려야지!”
지영이의 마음속에 수동이는 어느새 지영이의 의젓한 신랑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수동이가 집이 돌아오지 않는 것은 회사 일이 많이 밀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밥을 짓고 맛있는 반찬을 만드는 지영이의 손놀림이 점점 더 빨라집니다. 수동이가 회사에서 돌아오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동안 분주하게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이에 이윽고 저녁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수동이의 퇴근이 늦어도 너무 늦어지고 있습니다.
"아니, 왜 이렇게 늦지? 어디 들어오기만 해봐라. 오늘은 내가 그냥 둘 줄 알아?"
저녁 준비를 끝낸 지영이는 벌써부터 수동이가 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립니다. 가끔 골목길을 힐금힐금 바라보고 있지만 수동이는 좀처럼 나타나지를 않았습니다.
지영이는 조금 뾰로통해진 얼굴로 이번에는 인형을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는 토닥거려 줍니다.
“어이구, 우리 공주님 잘도 자지. 아기야, 배고프지 않니? 찌찌 좀 먹고 잘까?”
지영이는 젖꼭지가 달린 우유병을 인형의 입에 물려 주고는 우유를 먹이는 시늉을 해 보입니다.
"오올치, 그래. 그렇게 잘 먹어야 엄마처럼 건강해진단 말이야.”
지영이는 인형의 모양이 호리호리하고 비쩍 말라 보이는 것은 우유를 잘 먹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기 인형한테 젖꼭지를 계속해서 빨게 하느라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습니다.
“지영아,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이야! 벌써 밥상까지 다 차려 놓았는걸!”
어느새 왔는지 수동이가 다가와서 미안해진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너 지금까지 회사에서 일하다가 온 거니? 뭘 하느라고 이렇게 늦었느냔 말이야?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좀 생각해 줘야 할 거 아니야?”
지영이는 여전히 뾰로통해진 얼굴로 퉁명스럽게 쏘아대고 있었습니다.
"뭘하기는 ………. 난 역시 남자이니까 돈을 벌기 위해서는 회사 일을 열심히 해야 될 거 아니니? 자, 여기 있어.”
수동이는 여전히 미안해진 얼굴로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두툼한 봉투 한 개를 꺼내 지영이 앞에 내밀었습니다.
“이게 뭔데?”
“뭐긴 뭐야. 월급봉투지. 돈이 있어야 살림을 하든지 말든지 할 게 아니니."
만 원짜리, 오만 원짜리, 천 원짜리 등등, 수동이가 내놓은 봉투 속에는 진짜 돈과 흡사하게 만든 장난감 돈이 두툼하게 들어 있었습니다.
지영이의 눈이 금방 둥그렇게 되어 수동이를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너, 이 돈 어디서 났니? 가만히 보니까 문방구에서 샀구나?”
돈을 보자, 지금까지 뾰로통했던 지영이의 표정이 금방 풀어지고 말았습니다.
"뭐어? 돈을 어떻게 문방구에서 사니? 오늘이 마침 월급날이잖니? 그래서 회사에서 받아온 거라니까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수동이는 시치미를 뚝 떼고 정색을 하면서 대꾸했습니다. 그 바람에 지영이는 저절로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만 큰소리로 웃고 말았습니다.
”호호호……. 그래 네 말이 맞아. 돈은 문방구에서 살 수가 없다는 걸 내가 까맣게 몰랐네. 호호호…….“
”맞아, 그 돈은 순전히 내가 한 달 동안 고생을 하면서 벌어온 돈이라니까, 으하하…….“
지영이가 기분이 좋아져서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자, 이번에는 마음이 좀 놓였는지 수동이도 덩달아 따라서 웃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정말 웃긴다."
"호호호... 그러니까 소꿉놀이가 재미있는 거라니까. 호호호…….“
수동이와 지영이의 웃음소리는 공터를 가득 메우고 가을 하늘 높이까지 메아리치면서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자, 그럼 돈 많이 벌어왔으니가 이제 저녁 먹자.“
한바탕 웃던 지영이가 이번에는 밥상을 수동이 앞을 가까이 내놓으며 말했습니다. 밥상에는 모래로 만든 밥과 밤나무 잎으로 만든 반찬, 그리고 갖가지 꽃잎들로 정성껏 만든 반찬들로 푸짐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수동이가 약간 엄한 표정으로 지영이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야, 근데 말이야. 넌 다른 건 다 좋은데 한가지 고칠 게 있단 말이야.”
“그게 뭔데?”
“어떻게 신랑한테 버릇없이 반말로 하니?”
“뭐, 뭐라구?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 건데?”
“우리 엄만 아빠한테 이렇게 하더라. '여보, 진지 좀 드셔야죠?' 이렇게 말이야.”
“으이그, 난 또 뭐라고……, 내가 어떻게 너한테 그렇게 말을 하니? 그런 소리 좀 그만하고 어서 밥이나 먹으라니까.”
지영이는 몹시 부끄러운 듯 빨개진 얼굴로 수동이의 어깨를 몇 대 때렸습니다.
“좋아, 그럼 그런 말버릇은 천천히 고치기로 하고, 우선 저녁부터 먹어 볼까. 아참, 반찬은 많은데 내가 좋아하는 LA 갈비찜이 없잖아?”
“아니야. 그냥 먹어. 내가 일부러 고기 반찬들은 빼놓은 거야.”
“일부러 빼놓다니 그건 또 왜?”
"채소를 많이 먹어야지 그런 반찬들은 몸에 해롭다는 소리도 넌 못 들었어?“
그러자 수동이는 대뜸 옆에 누워 단잠을 자고 있는 아기 인형을 가리키며 지영이를 나무랐습니다.
"쳇, 모르는 소리 좀 그만 하라고.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만 먹으면 저렇게 비쩍 마른 약한 아기를 낳게 된다는 걸 몰라서 하는 소리니?”
수동이의 말에 지영이는 조도 모르게 얼굴이 빨갛게 물이 든 채 수동이의 등을 마구 때리며 소리쳤습니다.
“너 자꾸만 나한테 그럴래? 나 그럼 소꿉놀이 안 할 거란 말이야. 알겠어?”
지영이는 금방 뾰로통해진 얼굴로 수동이를 홀겨보다가 다시 수동이의 등을 힘껏 때리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래, 그럼 그런 말 이제 안 할게. 그러니까 소꿉놀이잖아.”
수동이는 매에 못 이겨 지영이 앞에서 두 손을 번쩍 들고 말았습니다.
어느새 하늘 높이 떠오른 해님이 수동이와 지영이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소리 없이 빙그레 웃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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