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혜영이의 그림

[분단의 비극, 그리고 언어의 비극]

by 겨울나무

방에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던 혜영이가 거실로 뛰어나왔다. 혜영이의 한 손에는 스케치북, 그리고 다른 손에는 크레파스를 들고 있었다.


”아빠, 이 그림 좀 그려줄 수 있어? 다른 건 다 그렸는데 이거 하나는 아주 어려워서 못 그리겠어.“


”무슨 그림을 그리는데? 그리고 혜영아, 너 거실로 다닐 때는 바닥이 지저분하니까 되도록이면 ①끌신을 신고 다니란 말이야.

“알았어. 다음부터는 신고 다닐게.”


혜영이가 그리고 있는 그림은 초가집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시골 풍경이었다. 초가집 뒤에는 낮은 산도 있고 마을 앞으로는 실개천도 흐르고 있는 정겨운 시골의 모습이었다.


그림을 한동안 보고 있던 성길 씨가 감탄을 하면서 다시 물었다.


“히야, 우리 혜영기가 정말 그림을 잘 그리는구나! 그런데 뭘 못 그리겠다는 거지?”

“여기 하늘에 떠 있는 구름 말이야. 정말 잘 안 되던 걸.”


“아하, 여기 ②더미구름 말이로구나? 그래 맞아. 더미구름 그리기는 쉬은 것 같지만 막상 그려보면 누구나 어렵게 마련이거든. 가만있자, 이건 아빠도 잘 못 그리겠는데 그럼 엄마한테 부탁해 볼까?”

“에이, 아빠도 안 되겠구나!”


성길 씨가 자신이 없다고 하자 혜영이가 이번에는 방에 있는 엄마를 불렀다. 혜영이가 부르는 소리에 방에서 옷장 정리를 하고 있던 아내가 무슨 일인가 하고 나왔다.


“아니, 왜 엄마를 부르고 이 야단이니?”

엄마의 물음에 혜영이가 다시 자초지종을 설명하게 되었다.

“이 하늘에 구름을 좀 그려 달라고 했더니 아빠는 못 그리겠대. 그러니까 엄마가 좀 그려 줘.”

“에이구, 나도 못 그려. 그리고 난 지금 바쁘니까 아빠한테 그려달라고 그래.”


아내는 이렇게 대꾸하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성길 씨는 아내의 얇게 입은 옷차림을 힐끗 쳐다보더니 방으로 들어가고 있는 아내를 향해 소리쳤다.


“여보, 요즘 날씨도 좀 쌀쌀해지고 있는데 ③양복적삼은 이제 그만 입고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지 그래?”

“알았어요. 알았어.”


그래서 결국 어쩔 수 없이 혜영이의 그림을 가르쳐주는 일은 다시 성길 씨 몫이 되고 말았다.


“히야, 이거 정말 난처하게 되었는걸. 그래 알았어. 그럼 아빠가 ④위생실부터 다녀온 다음에 같이 생각해 보자꾸나.”


잠시 뒤에 성길 씨가 돌아오더니 그림을 가르치는 일에 자신이 없었는지 혜영이에게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하고 있었다.

“혜영아, 너 혹시 요즈음 학교에서 친구들한테 ⑤모서리 당하는 일은 없니?”

“아니 그림 그리는 걸 가르쳐 달라니까 왜 그런 엉뚱한 걸 묻고 그래? 난 그런 거 전혀 없으니까 안심하란 말이야.”


“어어, 그래? 그거 잘 됐구나. 요즘 뉴스를 보면 ⑥두간두간 그런 소식들이 자주 나오는 걸 보고 아빠가 무서워서 하는 소리야.”

“전혀 걱정 마라. 난 그런 거 전혀 없으니까. 어서 이 그림이나 가르쳐 달란 말이야.”


“아, 알았어. 어디 좀 보자꾸나.”


성길 씨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그림에 대해서는 여전히 자신이 없는지 얼른 입을 열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면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 참고


① 슬리퍼 ② 뭉게구름 ③ 블라우스 ④ 화장실 ⑤ 왕따 ⑥ 종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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