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시골의 풍경은 왠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도록 그토록 아름답고 넉넉하며 푸근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오랫동안 멀리 떨어져 살던 고향의 졍겨운 모습처럼 말입니다.
더구나 저녁 무렵이 되면 빨간 색깔로 곱게 물든 노을과 들판의 갖가지 풍경은 어린 시절에 시골에서 자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그리워해보는 아름답고도 평화로운 광경이 아닐런지요?
또한, 시골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라해도 문득 그런 광경이 떠오를 때마다 누구나 한번쯤은 가보고 싶은 마음의 고향이 아닐는지요?
정말 그렇습니다. 가을철의 시골 풍경이 모든 사람들의 고향처럼 느껴지는 것은 결코 빨간 색깔로 곱게 물드는 저녁 노을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누렇게 익은 벼이삭들이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인 채, 살랑살랑 실바람을 타고 파도처럼 출렁거리는 황금 물결, 그리고 먼 산을 바라보면 울긋불긋 곱게 물들어가고 있는 단풍 들 역시 상상만 해도 저절로 마음이 흐뭇하고 뿌듯한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흔히 가을을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곡백과가 풍성하게 무르익는 결실의 계절이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건 맞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가을철에는 먹지 않아도 저절로 배가 부르고 또한 저절로 살이 찔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누구나 한결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혹시 이토록 좋은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애틋하고 슬픈 사연을 품고 있는 꽃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지요?
해마다 이맘때가 돌아오면 우리 인간들처럼 즐거워하고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안타까움을 견디다 못해 소리없이 흐느껴 우는 가련한 꽃들이 있답니다.
그들은 마치 예리한 칼로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견디다 못해 지금 이 시간에도 들판 여기저기에서 남몰래 눈물을 흘리면서 괴롭고도 슬픈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이냐구요?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랍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난 다음부터는 그 일이 문득 머리에 떠오를 때마다 지금도 미안하면서도 부끄러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혀지곤 한답니다.
그리고 더욱 분명한 것은 그들이 매일 흘리고 있는 눈물, 그리고 듣기만 해도 애간장이 무너질 정도로 애절한 울음소리는 아무나 쉽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단 한 번만이라도 그들이 홀리는 눈물이나 울음소리를 들어본 경험이 있는지요? 그런 경험이 당 한 번이라도 있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남의 어려움과 아픈 마음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아주 천사와 같은 성격을 가진 것이 마음이 따뜻하고 착한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왜냐 하면 그들이 홀리는 눈물이나 소리 없이 흐느끼는 애절한 울음소리는 웬만큼 곱고 착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로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없으니까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고 있는지 답답하고 궁금하다고요? 자, 그럼 지금부터 천천히 그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어느 해 초가을의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나는 그날따라 일찍 저녁을 먹은 다음 모처럼 운동 겸 바람을 쐬기 위해 혼자 들판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날도 마침 서쪽 하늘에는 내가 유난히 좋아하는 빨간 노을이 곱게 물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름이 가까웠는지 이른 저녁부터 둥근 달님이 온 들판을 향해 반짝 빤짝 빛나는 새하얀 은가루를 골고루 뿌려 주기에 바빴습니다.
마치 그림물감으로 칠한 듯 빨간 색깔로 곱게 물든 저녁노을, 언제 보아도 아무 말없이 인자한 웃음을 흘리며 반갑게 맞이해 주고 있는 어여쁜 달님, 그리고 황금빛으로 누렇게 익어가는 벼 이삭들, 나는 눈에 띄는 것 모두가 아름답고 황홀하게만 느껴져서 문득 자주 들판에 나오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이따금 선들선들 불어오는 신선한 가을 특유의 바람이 옷깃과 목덜미를 가볍게 어루만져 주며 스쳐 지나갈 때의 시원함과 상쾌함이란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아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둥근 달님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풀숲 속에서 쉬지 않고 지저귀고 있는 갖가지 풀벌레들의 구슬픈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아무리 근심 걱정이 많아 답답했던 마음도 삽시간에 사라지면서 그렇게 아늑하고 편안해질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날도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커다란 접시처럼 생긴 둥근 달님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풀벌레들의 울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뒤, 나의 귓가에 갑자기 멀리에서 달님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바짝 긴장이 된 표정으로 달님을 유심히 바라보며 계속해서 다시 달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않을 수 없었습니다. 달님은 여전히 인자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되풀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나에게 묻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그때 슬픈 얼굴을 하고 있기는커녕 아직도 가을 들판의 풍경에 대한 느낌으로 인해 흐뭇하고 즐거운 표정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으니까요.
나는 다시 숨소리조차 죽여가면서 달님의 시선을 따라 조심스럽게 내 주위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아아! 그러다가 나는 마침내 달님이 지금까지 말을 걸고 있는 상대를 용케 찾아내고야 말았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엷은 보라 색깔로 얼굴 화장을 곱게 한 들국화 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리고 유심히 살펴보니 지금까지 늘 행복하고 즐거운 나날만을 보내고 있을 줄로만 알았던 들국화의 얼굴에 전혀 그런 모습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들국화의 두 눈에는 진하디진한 슬픔의 눈물이 고여 있는 모습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들국화의 눈물은 가을 저녁에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에 젖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오래전부터 들국화의 가슴속에 앙금처럼 쌓여있던 진한 슬픔들을 견디다 못해 자신도 모르게 흘리고 있는 눈물이란 것을 나는 곧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아! 이럴 수가!’
나는 지금까지 전혀 몰랐던 뜻밖의 일에 대해 어리둥절한 나머지 잠시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 두 눈을 지그시 감았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습니다. 나의 귓가에 또다른 이상한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순간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사방을 두리번거렸습니다.
아아! 나는 다시 나의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이상한 광경들을 목격하고는 또 한 번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슬픔에 젖어 흐느끼고 있는 것은 비단 들국화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가을 들판에 살아가고 있는 들꽃들 모두가 한결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슬픔에 젖어 흐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들국화를 비롯하여 지금 이 들판 여기저기에서 슬픔에 젖어 흐느끼고 있는 들꽃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였습니다. 아니 어느 꽃을 막론하고 모두가 온통 슬프게 흐느끼고 있어서 마치 초상이 난 마을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달맞이꽃, 냉이꽃, 패랭이꽃, 나팔꽃, 토끼풀꽃, 멧꽃, 명아주꽃, 씀바귀꽃, 쑥꽃, 오랑캐꽃, 질경이꽃, 미나리꽃……등, 그리고 이름도 알 수 없는 들꽃을 포함하여 수없이 많은 들꽃들 모두가 슬프게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아아! 이렇게 아름답고도 평화로운 들판에 이런 일이 있을줄이야!”
나는 몹시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귀를 바짝 세운 채, 다시 달님과 들국화가 주고받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달님은 아까보다 더우 부드럽고 포근한 목소리로 들국화를 향해 묻고 있었습니다.
"들국화야, 오늘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구나, 내 말이 맞지?“
들국화는 그제야 지금까지 가슴속 깊이 응어리로 맺혀 있던 진한 슬픔들이 한꺼빈에 터져 나오려는 아픔을 겨우겨우 삼키고는 마지못해 입을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달님! 전 이제 정말 어서 죽고만 싶어요.”
뜻밖의 대답 소리에 가뜩이나 커다란 달님의 눈이 더욱 커졌습니다.
“아니 뭐라구?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지? 함부로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거란다.”
그러자 들국화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마침내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면서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달님은 아직도 저희들의 이 아픈 마음을 정말 몰라서 그러시는 거예요?”
달님의 두 눈이 아까보다 더욱 커다랗게 되어 되물었습니다.
"아니, 도대체 내가 뭘 모르고 있단 말이냐? 그렇게 울지만 말고 말을 좀 해보렴.“
“달님한테 말해봤자 이제 와서는 모두가 다 소용이 없는 일인걸요.”
"아니 무슨 일인데 그래? 소용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이니? 혹시 내가 너한테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니?"
들국화는 할 수 없다는 듯 그동안 가슴속에 앙금처럼 쌓여있던 아픈 속마음들을 털어놓기 시작하였습니다.
“달님, 이 넓고 넓은 들판에 해마다 갖가지 수많은 들꽃들이 돋아나서 앞을 다투어 열심히 꽃을 피우곤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계세요?”
“그래 그런건 어디 너희들뿐이겠니?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온갖 들 모두가 저마다 자신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맡은 사람들 앞에서 마음껏 자랑하고 뽐내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싶은 욕심 때문이 아니겠니?”
이번에는 달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들국화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습니다. 뜻밖에도 달님이 들국화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들국화가 한동안 대답이 없자 달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 왜? 내 대답이 틀렸니?"
“아, 아니어요. 맞았어요. 달님은 정말 저희들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래? 그렇다면 지금 네가 울고 있는 이유가 그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 모양이구나?“
"네 그래요. 달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저의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 해마다 무던히도 애를 써왔거든요.”
“아암, 그랬지. 그랬고말고. 그런데 왜?”
"그런데 결국 지금 제 꼴이 이게 뭐냔 말이예요?"
"아니 뭐가 어때서?"
“그렇게 애를 써왔지만 아직까지도 이런 쓸쓸한 들판에 버려진 채 아무도 찾아와 주지를 않는걸요."
달님은 그제야 지금까지 들국화가 슬퍼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그까짓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빙그레 웃는 낯으로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허허, 그건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좀 더 오래 열심히 살다 보면 틀림없이 네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틀림없이 돌아오게 된단다.”
“이렇게 오래 살아왔는데 이토록 재미없고 지겨운 세상을 더 오래 살라고요?”
“아암, 내 말을 믿어보렴. 오래 참고 살다 보면 지금 네가 느끼고 있는 너의 슬픔과 아픔이 결국은 큰 보람으로 느껴질 때가 틀림없이 오게 될 테니까 말이란다.”
“…….”
들국화는 달님의 말을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힘든 때에 고작 그런 말이나 들려주고 있는 달님이 몹시 야속하였습니다. 그래서 할 말을 잊은 채, 달님의 웃는 모습만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달님은 문득 시선을 바꾸어 어느 틈에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달님이 이번에 새로 찾아간 곳은 마치 들국화처럼 생기기는했지만 들국화보다 꽃송이가 조금 작은 하얀 색깔의 꽃송이가 흐드러지게 핀 어느 들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들꽃은 들국화보다 더욱 넓게 어깨를 들먹이며 서럽게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달님은 이번에도 그 꽃을 향해 인자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아가야, 가만있자, 네 이름이 뭐였더라? 그리고 웬일로 너도 슬피 울고 있구나?”
달님이 묻는 소리에 들꽃이 울음을 잠시 멈추고 입을 열어 대답하였습니다.
“달님, 저는 아직까지도 제 이름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걸요.”
“아니? 이름을 모르다니?”
“저와 똑같은 꽃들이 너무 흔해서 그런지, 그게 아니면 저희들의 모습이 너무 보기 싫게 생겨서 그런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저희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름조차 지어 주질 않았는걸요.”
“허어, 그랬었구나! 그런데 지금 무슨 일로 울고 있었지?”
"그동안 여러 해 동안 아무리 열심히 살아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그 결과가 아시다시피 아직도 이렇게 이름없는 들꽃 신세로 살아가고 있는걸요, 흐흐흑…….“
이름 없는 들꽃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조금 전보다 더욱 서럽게 어깨를 들먹이며 느끼고 있었습니다.
순간, 달님은 매우 안타깝다는 듯 언짢은 표정이 되어 혼잣말처럼 혀를 차며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쯧쯧쯧……. 이 어리석은 녀석들아, 어째서 너희들은 지금 사람들이 귀여워하거나 크게 알아주지 않는 게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야. 그렇다고 너희들이 지금 하고 있는 소중한 일까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니?”
“……?!”
달님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잇기 시작했습니다.
“저 넓은 세상을 좀 내다보렴,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 중에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단다.
그리고 그 이름난 사들다는 너희들처럼 이름도 없이 남들이 모르게 뒤에 숨어서 묵묵히 그리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 세상은 쉬지 않고 늘 발전하고 있는 거란다.”
“……?!”
달님의 이야기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길게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들꽃들의 흐느낌 소리는 아까보다는 차츰 작게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가을밤이 점점 깊어 갈수록 들꽃들의 흐느낌 대신에 이번에는 극성스럽게 울어대는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나의 귀를 더욱 어지럽게 간지럽히고 있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