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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Oct 25. 2020

설날의 세시 풍속

[세배의 추억 ①]

설날을 다른 말로는 원단(元旦), 세수(歲首), 연수(年首)라고도 하며 설날 아침에 가장 먼저 조상께 지성을 다해 차례를 올린다. 차례가 끝나자마자 바로 부모님께 세배하고 떡국을 한 그릇씩 배불리 먹는 날이다.   

   

내가 태어난 우리 고장에서는 차례를 지낼 때 조상께 올리는 떡국에는 절대로 만두를 넣지 않았다. 그러나 차례를 지낸 다음에 가족들이 먹을 떡국에는 어젯밤 내내 정성껏 빚어놓은 만두를 넣어 먹었다. 그렇게 떡국을 한 그릇 배불리 먹고 나면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되는 것이다.  

    

섣달 그믐날에는 웃어른을 찾아뵙고 묵은세배를 드리기도 한다. 묵은세배를 올리는 것은 지난해 1년 동안 잘 보살펴주신 덕분에 이만큼 아무 탈없이 잘 지내고 있다는 고마움의 표현이기도 하다.     

  

세배란 섣달그믐이나 설날(구정)에 웃어른을 찾아뵙고 큰절을 올리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설날 아침에 떡국 한 그릇을 먹은 다음에는 시간이 나는대로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고장에 따라서는 널뛰기나 연날리기, 윷놀이나 팽이치기를 하기도 하였다.     

 

연을 날리다가 연이 하늘 높이 올라갔을 때는 연줄을 끊어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하늘 멀리 사라져가는 연을 바라보며 각자 새해 소원을 빈다.      


하늘 높이 날고 있는 연줄을 끊는 것은 몸에 있는 나쁜 기운이나 집안의 나쁜 기운이 모두 하늘로 날아가라고 비는 마음이기도 하다.       


정월 보름날 저녁에는 아이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논두렁 밭두렁에 불을 지르고 쥐불놀이를 하느라 동네가 온통 연기로 자욱하곤 하였다.


쥐불놀이 방법은 여러 개의 구멍을 뚫은 깡통에 긴 끈을 매달고 불을 지핀 나뭇가지 등을 넣고 휘휘 내두르면 불꽃이 잘 일어나게 된다. 이 불을 가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불을 지른다.   

    

쥐불을 지르는 가장 큰 이유는 땅속에 살아있는 해충 알을 죽이고, 돈두렁 밭두렁을 뚫고 다니며 농사일을 망치게 하는 쥐가 논과 밭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미연에 방지를 하게 되고 다 타고 난 재는 논과 밭에 거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밖에도 지방에 따라서는 고싸움, 차전놀이 줄다리기 등을 하기도 하였다.       


    

설날 세배의 추억     

 

내가 어렸을 적에 우리 마을에서는 마을 어른들에게 세배를 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던 것 같다. 우리 마을은 60여 호나 되는 제법 많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그러나 그 많은 집들을 빼놓지 않고 하루에 모두 다 찾아다니며 세배를 한다는 것은 무리이며 벅찬 일이었다. 그래서 그날 세배를 끝내지 못하면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계속 다녀야만 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세배를 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설날부터 정월 초닷새까지도 세배를 하기도 하였다.     

     

설날의 세배는 하루 종일 혼자 다니기도 하지만, 같은 또래끼리 삼삼오오 짝을 지어 60여 호나 되는 집들을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세배를 하러 다니느라 설날 밤늦게까지 어수선하고 분주하며 북적거리는 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세배하기가 귀찮거나 하기 싫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그만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세배를 하러 다니지 않게 되면 마을 어른들로부터 사람의 도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 막된 놈이라는 지탄과 욕을 먹거나 낙인이 찍히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어른들 중에는 가끔 누구누구는, 세배를 하고 갔는데 누구누구는 오지 않았다며 그가 오기를 손꼽아 벼르고 기다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끝내 세배를 하러 오지 않게 되면 못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기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따라서 설날은 어른들도 아이들도 모두들 세배를 하러 다니느라고 동분서주하며 바쁜 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그렇게 세배를 다니다가 혹시 길거리에서 어른을 만나게 되면 이따가 집으로 정식으로 찾아가서 뵙겠다고 약속을 하기도 하였다.    

 

어렸을 때 세배를 하러 다니다 보면 창피를 당하는 일도 많았다. 혹시 어느 한 집에 마침 세배꾼들이 많이 몰려있을 경우, 그 자리에서 모두 세배를 해야 하는데 나이가 많은 순서대로 세배를 하게 된다. 그런데 제대로 나이를 몰라 아랫사람부터 했다가 핀잔을 듣게 되는 일도 많았다.     

 

세배하는 순서는 나이뿐만이 아니라 항렬도 중요했다. 나이가 좀 적더라고 항렬이 높으면 나이가 많은 사람보다 항렬이 높은 사람에게 먼저 세배를 올려야 하는데 그걸 무슨 수로 다 알 수가 있단 말인가.   

   

같은 성씨 중에도 나이가 어려도 할아버지뻘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이가 많아도 조카뻘이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 역시 늘 헷갈리고 어려운 일이었으며 정신이 쏙 빠질 일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어린 철부지 시절에는 1년 중 가장 손꼽아 기다려지는 날이 바로 설날이었다.


먹을 것이 별로 없던 시절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아침에 일단 집에서 떡국은 한 그릇을 든든히 먹긴 했지만, 세배를 다니다 보면 집집마다 정성껏 세배꾼들에게 대접할 음식들을 장만해 두었다가 일일이 내주곤 하였던 것이다.      


점심이나 저녁때가 되면 어느 집이나 떡국도 끓여 내놓고 식혜며 집에서 손수 만든 엿(우리 마을에서는 수수엿을 많이 고았음)과 말랑말랑한 인절미에 조청을 내주기도 하였다. 그때 먹어본 달달한 조청 맛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어른들에게는 어김없이 집에서 담근 약주나 막걸리, 그리고 정성껏 안주를 장만해 놓았다가 대접하기도 하였다.   

설날 가장 분주하고 힘이 드는 사람들은 아녀자들이었다. 하루 종일 부엌에서 세배꾼들이 올 때마다 대접할 상을 차려놓느라고 하루 종일 부엌일에 바빴기 때문이었다. 한 떼의 세배꾼이 왔다 가면 바로 다른 세배꾼들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부엌과 방을 드나드느라고 잠시도 허리를 펴고 쉴 짬이 없는 그야말로 고역의 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한번 대접하고 난 술상이나 음식상을 바로 치우고 그다음에 들이닥칠 세배꾼을 맞이하기 위해 급히 술이나 음식상을 다시 차려놓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그 시절의 부엌은 정월 초하룻날부터 정월 보름까지 세배꾼을 맞이할 오늘날의 주방과 조금도 다름없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집집마다 음식을 대접하는 바람에 그날 세배를 하러 다니는 어른들 중에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다가 술이 너무 취해 걷기조차 어려울 지경이 되면 그날은 세배를 중단하고 집에 가서 쓰러져 잠을 자고, 다음날 다시 세배를 다니곤 하였다.      

 

나의 경우, 그렇게 이른 아침부터 집집마다 세배를 다니다가 밤 늦게 집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부모님께 보고를 해야 한다. 어느 집에는 세배를 갔고, 어느 집에는 세배를 하지 못했다고……. 그리고는 다시 다음 날 아침부터 어제 미처 세배에서 빠진 집을 찾아다니며 다시 세배가 이어지곤 하였다.   

   

그렇게 세배를 다니는 일이 힘이 들기는 했지만, 한편으로 즐거운 것은 어느 집에 가나 인심 좋게 반가이 맞이하며 먹을 것을 내주어서 먹어보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어쩌다 세뱃돈을 받게 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때는 워낙에 돈을 보기가 어렵던 시절이어서 어느 집이나 먹을 것만 주고 세뱃돈을 주는 집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반갑게도 돈을 주는 집이 딱 한 군데 있었다. 눈이 번쩍 띌 정도로 신나는 일이었다.      


세뱃돈을 주는 집은 어느 집의 사위였다. 그 집의 사위가 설날이어서 처갓집에 잠시 세배하러 들렀다가 세배하러 다니는 아이들한테 돈을 주곤 하였던 것이다.      


세뱃돈을 받았다는 소문을 들은 아이들은 세뱃돈을 받을 위해 다른 집은 젖혀두고 나 역시 그 집으로 먼저 달려갔다. 그리고 전혀 낯도 모르는 그 집 사위에게 넙죽 엎드려 세배를 하고 세뱃돈을 받았다. 그때 그 귀한 돈을 손으로 만져보게 된 희열과 기쁨은 얼마나 좋았던지 지금도 그때의 기분은 잊을 수 없는 한 토막의 추억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웃기는 일도 벌어지고 있었다. 어떤 아이는 그 사위에게 이미 세배를 하고 세뱃돈을 받았으면서 돈에 욕심이 생긴 나머지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가서 세배를 하고 세뱃돈을 두 번이나 받기도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아이도 눈이 번쩍 띄어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가서 세배를 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 집 사위가 눈치를 채고 ‘넌 아까 세뱃돈을 받았으니까 이번에는 안 준다’라며 그냥 내보내게 되었다. 아이는 돈도 못 받고 뻘쭘해서 그 집을 나오게 되고, 결국 그 사위는 세뱃돈 덕분에 한 아이한테 두 번이나 세배를 받기도 하였다.  


세배하기가 너무 힘들고 귀찮아서 짜증이 날 때는 난 그때마다 여자아이들을 부러워하곤  하였다. 그때만 해도 여자아이들은 함부로 밖으로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여 각자 집에만 갇혀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자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세배를 다니지 않아도 흉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설날 세배의 본디 목적은 조상과 부모님, 그리고 마을 웃어른들을 공경하는 마음이 우러나와서 해야 하는데 그런 마음은 전혀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어른들이 시키니까, 그리고 설날이니까 어쩔 수 없이 으레 그러려니 하고 해마다 그런 힘든 행사를 치르곤 하였던 것 같다.      


제사에는 전혀 마음이 없는 사람이 제사밥에만 마음이 있다는 말이 있다더니 내게는 세배 역시 바로 그와 조금도 다를바가 없었던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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