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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Nov 04. 2020

설날의 세시 풍속

[세배의 추억 ②]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제께고요,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드리고, 새로 사온 신발도 내가 신지요


우리 언니 저고리 노랑 저고리, 우리 동생 저고리 색동저고리

아버지와 어머니 호사하시고, 우리들의 절받기 좋아하셔요.      


설날은 떡국 한 그릇을 먹고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날, 그리고 어른들은 찾아뵈며 세배를 올리는 즐거운 명절임에는 틀림없다.      


철이 없던 어린 시절에는 위에 적힌 설날이라는 노래를 듣기만 해도 왜 그렇게 마음이 설레고 좋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즐거워야 할 설날이 나에게는 지겹도록 힘든 세배의 부담으로 인해 오히려 상상조차 하기 싫은 지겹고 넌덜머리가 나는 설날이 되고 말았다.   

    

첫 번째 '세배 이야기①'에서도 잠깐 설명한 바 있지만, 옛날 우리 마을의 세배 풍습은 말 그대로 너무나 힘겹고 지겹기 짝이 없는 날이기도 하였다. 60여 호나 되는 동네 어른들을 부모님들의 강요에 의해 누구나 의무적(?)으로 찾아뵈며 세배를 하기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배는 어린 여자아이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았다. 여자는 함부로 밖으로 내돌리는 게 아니라는 유교 적인 풍습에 깊게 젖어서 그런지 어느 집이나 세배를 다니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러기에 남자아이들처럼 온동네를 쏘다니며 세배를 하지 않아도 별로 흉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아이들이 마냥 집에 가만히 앉아서 편히 쉴 수도 없었다. 동네 세배꾼들이 쉴 새 없이 세배를 하러 집으로 찾아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세배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득이 세배할 마음이 없거나 싫으면 그때마다 윗방으로 들어가서 숨어 있기도 하였다. 그리고 세배꾼들이 세배를 하고 돌아갈 때까지 윗방에 숨어 있다가 다시 나오곤 하였다.       

  

그러나 윗방에 들어가서 숨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배꾼이 수시로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바람에 한시도 마음 놓고 편히 쉴 수가 없었다.  아마 현재 아무리 바쁜 음식점 주방 일도 그렇게 분주하고 바쁜 주방은 없으리라.     


세배하기가 싫은 어린 여자아이들은 그렇게 요령껏 윗방에 들어가서 숨거나 피하면 되지만, 철이 든 여자아이들이나 아낙네들은 그럴 수도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다.      


집으로 찾아오는 세배꾼들을 대접하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가서 주안상을 차려야 하고, 또 그 상을 들고 부엌과 방을 하루에도 수십 차례 문지방에 불이 날 정도로 정신없이 드나들며 하루 해를 보내곤 하였다.       


설날 아침부터 세배하러 온 동네를 집집마다 빠뜨리지 않고 다 다녀야 하는 나는 이틀이나 사흘 정도 부지런히 세배를 다니다 보면 60여 채나 되는 집을 모두 끝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거기서 세배가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다음에는 다시 우리 집안 어른들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려야 하는 일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친척 어른들에 대한 세배      


언제부터 그렇게 살아왔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우리 친척들은 대대로 수색과 김포 개화리(현재 개화동)에 종족 사회를 이루며 모여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약 2002년에는 역사적인 월드컵 경기가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개최됨에 따라 수색에 살고 있던 우리 친척들은 어마어마한 보상금을 받고 모두들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다.    

  

그런데 어찌 된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만 이 시골에 둥지를 틀고 따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기에 우리 마을 세배를 다 끝낸 다음에는 어김없이 어릴 때부터 그다음에는 수색으로 가서 본격적으로 집안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세배를 해야 했다. 수색에도 나의 4촌(작은 집)을 포함하여 어림잡아 약 30여 호를 다녀야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만 해도 아주 옛날이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 마을은 희미한 석유 등잔불을 켜고 살았는데 수색에는 그나마 서울특별시 서대문구(현재는 마포구)라고 해서 전깃불이 들어왔다. 집집마다 모두 똑같이 백열등 전구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밤에도 환한 전깃불이 그렇게 대낮처럼 환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덩깃불이 뻔떡뻔떡하였다.


깡촌에서만 살아가고 있던 나는 그 전깃불이 보기만 해도 너무나 신기하고 좋아서 집으로 돌아오면 동네 친구들한테 그 전깃불이 얼마나 환하고 좋은지 모르겠다며 한바탕 자랑을 늘어놓기도 하였다.     

                

그런데 수색으로 한번 세배를 가기란 워낙 교통수단이 불편하여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버스는 전혀 없었고 기차가 다니고 있었는데 그나마도 기차는 하루에 세 번 정도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 기차를 타기 위해서는 시간을 맞추어야 하고 집에서 정거장까지 시오리 길을 걸어 나와야 했다.   


그러기에 기차를 타기도 힘들고 기차표 살 돈도 아깝다고 생각한 집안 사람들은 가끔 70리나 되는 먼 길을 이른 아침부터 걸어서 오가기도 하였다.   


그렇게 해마다 기차를 타고 수색에 가서 집안 어른들을 모두 찾아다니며 세배를 해야만 하였다. 몹시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날로 부지런히 세배를 다 했다 해도 워낙 교통수단이 좋지 못해 그날로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그래서 하룻밤이나 이틀 밤은 사촌네 집에서 신세를 지곤 하였다.        

 

그렇게 우리 마을과 수색의 친척들까지 다 찾아다니며 세배를 하는 기간은 약 일주일 안팎이나 걸리곤 하였다. 그래서 즐거운 설날이 아니라 때로는 지겹기도 하고 부담이 가는 힘든 설날이란 생각에 설날이 돌아올 때마다 오히려 미리부터 겁이 나기도 하였다.      

   

정녕, 세배란 내가 하고 싶어서, 그리고 어른을 존경하는 마음이 스스로 우러나올 때 해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그런데 나의 세배 경험으로 보아 전혀 그게 아니었다. 부모님들의 강요에 의해, 그리고 의무적으로 시키는 세배였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대부분은 설날을 우리나라 고유의 미풍양속이라는 말로 치장하고 미화하며 어린 시절의 설날을 회상하며 그리워하기도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당연히 그럴 수도 있으리라. 오랜만에 떡국도 배불리 먹고 설빔 차림으로 집안 어른들을 찾아가 뵙고 세배도 올리고 세뱃돈도 받고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러나 나에게 설날은 그토록 지겨워서 지금도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기조차도 싫은 끔찍한 날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해마다 미리부터 설날이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설날이란 단어로 몰락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토록 지겨워하는 설날의 세배는 성인이 되어서도, 그리고 직장을 잡은 뒤, 내 고향을 떠나 객지로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마을의 세배는 그렇게 계속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지나간 일은 모두 아름다은 추억으로 남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난 절대로 그게 아니었다. 지금도 세배라는 말, 그리고 설날이란 말만 들어도 지겹다 못해 넌덜머리가 나서 돌이켜 생각해 보기조차 싫은 끔찍한 날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설날을 지겨워하고 겁부터 먹고 싫어하는 사람이 이 나라에 나 말고 한 사람이라도 또 누가 있으려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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