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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Nov 05. 2020

우리 마을 글방 선생님

[글방 ; 옛날에 개인이 사랑채 등에서 한문을 가르치던 곳]

어린 시절, 지금은 볼 수 없지만, 그때만 해도 우리 마을에는 글방이 세 군데나 있었다.  

    

세 군데의 글방 중 하나는 서울에서 피란을 온 분이 가르치고 있었고, 또 하나 역시 장단에서 피란을 온 분이 가르쳤으며 나머지 한 분은 우리 마을 어르신이었다.      


글방에는 마을 아이들은 물론, 멀리 떨어진 동네 아이들도 와서 배우곤 하였다. 나는 글방을 다니지 않았기에 한문을 배우는 과정을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소문에 들은 바로는 처음에는 천자문으로 시작해서 명심보감, 소학, 대학, 중용, 논어, 맹자의 순으로 단계를 높여서 배우게 되는 것 같았다.


그러기에 날마다 글방 여기저기서 ‘하늘 천, 땅지, 검을 현 누르 황’, ‘날 일, 달 원, 찰 영, 기울 책’하고 천자문을 소리 내어 읽고 외우는 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그때 글방에 다니기 위해서는 다달이 수업료를 내며 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돈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돈을 내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추수가 끝난 뒤에 1년에 한 번씩 벼 또는 보리쌀을 얼마씩 수업료 대신 바치기로 약속하고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가끔 집에서 별식(술이나 떡, 엿, 전병 등)을 장만했을 때에도 성의껏 글방 선생님에게 수시로 바치기도 했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여러 해가 흐른 뒤, 글방 선생님은 장단에서 피란을 나온 분 한 분만 남게 되었다. 한 분은 그새 돌아가셨고, 또 한 분은 6.25 전쟁이 끝난 뒤 한참 뒤, 서울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갔기 때문이었다.   

   

마을에 혼자 남게 된 그 글방 선생님은 얼른 보기에도 여간 인자하고 조용하면서도 위엄이 있는 분이었다. 옛날 선비와 양반 정신을 본받아서 그런지 모든 행동거지가 여간 점잖아 보이고 저절로 위엄이 풍기는 그런 분이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 모두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분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존경하며 떠받들곤 하였다. 그리고 그가 기거하고 있는 집을 가리켜 선생님네 집이라고 하면 이웃 마을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여 우상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선생님이라고 하여 항상 점잖고 조용한 것만은 아니었다. 어쩌다 글방 선생님들끼리 만나기만 하면 마치 어린애들처럼 서로 다투며 싸우는 일이 종종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이 싸우는 이유는 서로 자신이 가르치는 학문이 옳다고 주장하며 핏대를 올리며 큰소리로 다투곤 하였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그걸 학문이라고 아이들한테 가르치고 있느냐며 상대방을 큰소리로 다투며 깎아내리곤 하는 제법 무서운 싸움을 벌이곤 하였다.     

 

평소에는 그렇게 점잖아 보이고 위엄이 있어 보이던 선생님들이었지만 싸울 때는 그게 아니었다. 서로 앙숙처럼 막 나가기도 하는 무서운 기 싸움이었다.         

 

글방 선생님은 제자들에게 한문만 가르치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지관을 맡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 중에 갑자기 무슨 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면 모두가 그 선생님을 찾아가곤 하였다. 그야말로 만능박사의 역할을 톡톡히 담당하곤 하였다.       


누군가가 불의의 사고로 다쳤을 때도 병원(그 당시에는 병원이란 곳을 전혀 모르고 지내기도 하였지만)대신 우선 선생님을 찾아가곤 하였다. 선생님을 찾아갈 때, 사람들은 으레 책을 보러 간다며 그 집으로 달려가곤 하였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환자의 생년월일과 이름, 병명을 적은 다음 곧 한문책(어떤 책인지는 모름)을 꺼내놓고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처방을 내려주곤 하였다.  

    

그러기에 마을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구세주 같은 존재가 바로 글방 선생님으로 누구나 존경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 어린 나로서는 그렇게 책을 보고 처방을 해주며 얼마씩 받았는지는 모를 일이다.      


선생님이 내려주는 처방은 대개 간단했다. 무슨 밥(어떤 곡식을 넣은 밥)을 어떻게 해서 어느 때 어느 방향(동서남북)으로 가서 버리며 지성을 드리라는 처방을 했었던 것 같다.      


우리 마을에는 대대로 신주처럼 위하고 있는 마을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대감나무와 남쪽 산기슭 언덕배기에 성황당이 있었는데 밥은 주로 그 두 곳에 버리게 하였다.      


그래서 가끔 대감나무와 성황당 옆을 지나가다 보면 바가지에 담아다 버린 밥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어떤 때는 선생님이 알려 준 방향 그대로 버리기 위해서 그런지 동네 가운데로 흐르는 개울가에 갖다 버리기도 하였다.        

밥만 버리는 처방이 아니었다.


가끔은 밥 외에도 짚으로 엮어 만든 허수아비도 갖다 버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허수아비의 배를 사람들 몰래 헤집어 보면 운이 좋을 때는 가끔 1환짜리 지폐가 나오기도 하였다. 더 운이 좋을 때는 1환짜리가 두 장 또는 석 장이나 나올 때도 있었다.      


그 귀한 돈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있었다. 바로 무당을 불러다 굿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옛날, 우리 마을에서는 어느 집이나 자주 굿을 했다. 누군가가 너무 아프거나 사망을 했을 때도 무당을 불러다 동네가 시끄러울 정도로 굿을 했다. 그리고 굿이 끝날 때마다 어김없이 성황당에 떡이나 밥, 그리고 허수아비의 배에 돈을 넣어 버리게 할 때가 많았다.      

   

난 그때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허수아비의 배를 뒤지러 다니곤 하였다. 그렇게 해서 돈이 나올 때는 그것으로 내게 필요한 공책이나 학용품 등을 사서 요긴하게 쓰기도 하였다.  그런 일을 하다가 부모님한테 들켜서 큰 꾸지람을 듣고 혼이 난 적도 있긴 하지만…….    


그리고 성황당에 지성을 드리기 위해 정성껏 모셔 놓은 떡 등, 먹을거리는 허기진 나의 배를 채워주는데 안성맞춤이기도 하였다.        


몹시 가난했던 그 시절, 마을 사람들이 가끔 아파서 굿을 하거나 글방 선생님의 처방은 결국 나에게는 매우 소중하고 귀한 소득원(?), 그리고 나의 허기진 배를 달래주기도 하는 곳이 되기도 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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