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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Nov 09. 2020

마침내 설날에 터져버린 사건(1)

[세배하던 날, 글방 선생님과의 충돌]

아무리 먹기 싫어도 누구나 한 살 더 먹게 되는 어느 해 명절이 또다시 어김없이 돌아왔다.


나도 어느덧 30살이 넘은 성인으로 성장하였으나 아직 결혼은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직장을 잡아 객지에 나가 살고 있었지만, 설날을 맞이했으니 별 도리없이 조상께 차례를 드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세배를 하기 위해 고향을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먼저도 잠깐 이야기한 바 있지만, 우리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아침 일찍 차례를 지낸 다음에는 반드시 세배를 하러 다니는 것이 행사 중의 큰 행사였다. 그러나 60여 호나 되는 집을 하루에 다 돌아다닌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나 역시 이미 성장하여 성인이 되었으니 세배 속도도 전보다 더뎌지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 집이나 정성껏 차린 술과 안주 등도 대접해 주고 있고, 직장 생활의 애로 등 이런저런 궁금한 것들을 물어오기도 하기 때문에 세배만 하고 바로 그 집을 빠져나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멀리 다른 데서 살고 있던 친척들도 세배를 하기 위해 우리 마을을 찾아오는 세배꾼들이 많았기에 그들과도 서로 세배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다.     


한 집에서 권하는 술을 한두 잔만 마셔도 대여섯 집만 다니고 나면 이미 얼큰하게 취기가 올라 세배를 계속 다니기가 어려워지곤 하였다. 더구나 오랜만에 웃어른을 찾아뵙는 일인데 술이 잔뜩 취한 상태로 비틀거리며 세배를 드린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난 그렇게 이틀간 60여 호나 되는 우리 마을에 세배를 다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나의 임무(?)를 다하였다는 생각에 마음이 몹시 홀가분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자 아버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그리고 대뜸 나에게 물으셨다.      


“그래, 오늘은 마을 어른들을 다 찾아뵈었느냐?”

“네, 다 다녔습니다.”     


난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러자 아버님이 다시 물으셨다.


“그럼 물론 글방 선생님도 찾아뵈었겠지?”     


아버님의 질문에 나는 그만 ‘아차!’ 하면서 찔끔 놀라고 말았다. 다른 곳은 다 다녔는데 어쩌다 그만 글방 선생님에게는 세배를 드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글방 선생님 댁에는 깜빡하고 못하였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아버님은 갑자기 화를 벌컥 내시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버럭 지르셨다. 다른 곳은 몰라도 글방 선생님만큼은 가장 먼저 꼭 찾아뵈었어야지 그게 무슨 소리냐며 당장 가서 세배를 드리고 오라고 불호령을 내리셨다.


난 술도 좀 취하긴 했지만, 그보다는 오늘은 이미 어두웠으니 내일 꼭 찾아뵙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날을 그냥 잠을 자게 되었다.  

    

그다음 날 아침, 난 밥을 먹고 난 다음 바로 글방 선생님 댁을 향했다. 글방 선생님 댁은,  건넌 마을 맨 꼭대기 외딴집이었다. 아마 그렇게 외진 곳이어서 어제 세배에서 깜빡하고 빠뜨린 것 같았다.     

 

글방 선생님이 늘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기도 하고 기거하는 방은 사랑채였다.      


그날 마침 사랑채 밖에는 글방 선생님의 하얀 고무신 한 켤레만 놓여 있는 걸 보아도 글방 선생님만 혼자 방에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툇마루에 올라서서 정중히 선생님을 부르게 되었다.      


“선생님, 세배하러 왔습니다. 저 지금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방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그래서 함부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세 번 정도 더 ‘선생님, 세배하러 왔습니다. 저 지금 들어가도 될까요?’를 반복했다. 그러자 안에서 글방 선생님의 엄하면서도 무뚝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게나!”     


난 그제야 두 손으로 미닫이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방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변이란 말인가!      


당연히 세배하러 온 나를 반가운 개색으로 맞이해 줄 줄로 알았던 나는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방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나와는 반대 방향을 바라보는 자세로 책상다리로 앉아서 장죽을 물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난 할 수 없이 엉거주춤하고 선 자세로 할 수 없이 ‘선생님 세배 받으세요’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제야 글방 선생님이 내가 서있는 쪽으로 홱 몸을 돌이켜 고쳐 앉으며 버럭 화를 내는 것이 아닌가!   

    

“이 사람아, 세배를 하려면 그냥 하지, 왜 세배를 받아라 말아야 하는 건가?”     


세상에 이런 변이, 그리고 이런 망나니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럼 무식하게 남의 등을 바라보며 세배를 하란 말이란 말인가! 혹시 이 양반이 평소에 나한테 무슨 감정을 품어둔 게 있어서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하면서 기분이 몹시 상한 나는 그래도 성질이 나는 것을 꾹 참고 공손히 세배를 올리게 되었다. 그 자리를 얼른 피하고 싶은 나는 세배를 드리자마자 ‘새해 복 많이 받으라’ 는 상식적인 덕담을 드리고 막 자리에서 얼른 일어서려고 할 때였다. 그러자 다시 글방 선생님의 날벼락이 떨어졌다.    

  

“그냥 가지 말고 거기 잠깐 앉아보게!”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나는 도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자 선생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뻗어 벽에 얹혀 있던 낡은 한문책을 꺼내더니 내 앞에 털썩 던지듯 놓더니 다시 명령(?) 아닌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책을 보고 자네 조상을 한번 찾아보게나!”     


“……!?!?”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난 순간 머리가 복잡해지고 말았다.      


그냥 좋은 말로 웃으면서 찾아보라고 하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명령을 하듯 굳은 표정으로 엄하게 명령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작정을 해도 단단히 하고 무섭게 별렀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도대체 내게 무슨 감정이 있어서 이러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 사람이 아닌데 이상한 일이었다.      


난 마치 고양이 앞에 쥐처럼 빼도 박도 못하는 불쌍한 꼴이 된 채 한동안 망설이고 있었다. 그리고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말일 내가 이 책명도 모르고 난생 처음 대하는 낯선 책을 펼쳐보다가 우리 조상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큰 창피와 봉변을 당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한문을 많이 배우지 못해 무식해서 그냥 가겠다고 해도 창피를 당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난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기로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사람이 한번 죽지 두 번 죽겠느냐는 절박한 심정으로 조금 뒤 천천히 그 낡아빠진 한문책을 첫 장부터 마치 기도하는 심정으로 샅샅이 뒤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참 뒤, 마침내 기적은 일어나고 말았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나의 알량한 한문 지식으로 유심히 살펴본 결과 드디어 우리 조상이 눈에 띄게 되었다. 틀림없이 안 나타날 줄 알았던 우리 조상이 나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아마 이런 게 새삼 기적이 아닌가 생각하게 하는 찰나였다.      


그래서 신바람이 나서 자신 있는 목소리로 글방 선생님을 바라보며 여기 찾았다고 내 딴에는 너무 좋아서 선생님 앞으로 책을 펴보이며 흥분된 목소리로 대답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장죽을 물고 외면을 한 채 담배만 피우고 있던 선생님이 그제야 내가 펴 보인 책장을 가자미 눈으로 한동안 바라보고 있더니 이번에도 몹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나무라고 있었다. - 계속 - (*)    



                                                                                       -다음 회에 ‘마침내 설날에 터진 사건(2)’가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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