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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Nov 10. 2020

마침내 설날에 터져버린 사건(2)

[세배하던 날, 글방 선생님과의 충돌]

글방 선생님이 내놓은 한문책에서 우리 조상을 찾은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그리고는 곧 내가 찾은 페이지를 글방 선생님이 보기에 편리하게 펴놓고 ‘여기 찾았습니다. 이거 아닐까요?’ 하면서 숨을 죽인 채 글방 선생님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글방 선생님은 아무 대답도 없이 한동안 가자미 눈을 뜨고 내가 펴놓은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     


난 공연히 마음이 초조지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이나 분위기로 보아 그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다시 무슨 구실을 붙여 나를 공격해 올까 두렵기도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입에서는 이번에도 빈정거리는 말투로 기분 나쁜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 이 사람아! 배웠다는 사람이 그까짓 거 한번 찾기가 왜 그렇게 힘든가? 자, 내가 찾아볼 테니 좀 보게나.”       

글방 선생님은 이렇게 투덜거리더니 곧 펴놓았던 한문책을 도로 덮어버렸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내가 펴놓았던 페이지를 한번 또는 두 번에 걸쳐 펴놓았다가 다시 덮는 일을 몇 번 반복했다. 당연히 나보다는 훨씰 빠른 속도였다.      

 

“자, 어떤가?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걸 가지고 왜 그렇게 오래 걸리나?”     


글방 선생님이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운이 좋았던지 우리 조상을 찾은 게 맞긴 맞는 모양이었다. 난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마음에도 없는 대꾸를 하고 있었다.       


“네, 저보다 참 빠르십니다.”     


그러나 나는 몹시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나빠서 속까지 뒤틀리고 있었다. 난 지금 세배를 하러 온 것이지 글방 선생님에게 테스트를 받고 무안을 당하러 온 게 아니지 않는가.      



글방 선생님은 현재 마을 사람들 모두가 숭배할 정도로 인격과 덕망을 갖춘 인물이라고 추앙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오만방자하고 예의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명심보감이랑 맹자 논어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존경스러운 인물이 되었단 말인가.     


난 공연히 억울하고 분해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 어떻게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별 수 없이 깍듯이 인사까지 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자리를 물러나고 말았다. 그런 집에 세배를 가라고 강요하시던 아버님까지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그날 밤, 난 오늘 글방 선생님에게 철저하게 당한 모욕으로 인해 너무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결코,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꼭 보기 좋게 복수를 해야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젊은 나이인 내가 어떤 방법으로 마을 사람들 모두가 존경하고 있는 그 위대한 분에게 감히 복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억울하고 분해도 그것은 결국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동안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며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던 내게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너무 기뻤다.      

“옳지, 바로 저거로구나!!”     


그때 나의 눈을 번쩍 띄게 한 것은 바로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산수책이었다. 오래전부터 방구석에서 굴러다니던 산수책이었다. 이런 경우, 그것은 그냥 산수책이 아니었다. 나의 복수심을 시원스럽게 말끔히 해결해 줄 수 있는 구세주가 아니면 솔로몬의 지혜나 다름없는 아주 귀한 존재였다.   

   

그 이튿날, 나는 어제 찾아놓은 산수책을 서너 군데 접어놓았다.      


5학년 2학기 산수책에는 소수와 분수, 그리고 간단한 방정식도 나와 있었다. 그냥 소수나 분수뿐만이 아니었다. 소수를 분수로 고치기, 분수를 소수로 고치기, 그리고 가분수와 진분수, 그리고 대분수 등의 제법 어려운 문제들이 나와 있었다.    

  

아침을 먹고 난 나는 마치 전쟁터에라도 나가고 있다는 비장한 각오와 설레는 가슴을 진정하며 글방 선생님 댁을 향해 보무도 당당하게 그리고 씩씩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물론 한 손에는 총 대신 산수책 한 권을 신주처럼 소중히 들고…….       


“선생님 계십니까?”     


어제와 마찬가지로 난 툇마루 앞에 서서 선생님을 불렀다. 그러자 글방 선생님이 ‘누군가? 어서 들어오게’ 라는 대답 소리를 듣고는 이내 방으로 들어갔다. 어제 세배를 하고 간 사람이 다시 나타나자 글방 선생님은 의외라는 듯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아직 모르는 게 많아서 이렇게 선생님을 다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    

 

난 이렇게 대답하고는 선생님 앞에 정중히 무릎을 꿇고 앉은 다음 산수책을 펴놓았다. 그리고는 산수책에서 맨 처음에 접어두었던 책장을 펴 보였다. 그것은 좀 복잡한 분수의 곱셈 문제였다. 그리고는 다시 공손히 입을 열었다.      


“선생님께서도 이미 아시다시피 전 대학까지 다니면서 지금까지 공부를 한답시고 했습니다.그리고 이건 현재 국민학교 5학년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산수책입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들도 다 아는 이런 문제들을 모두 잊어버렸기에 이렇게 선생님께 여쭈어보려고 다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     


나의 말을 한동안 잠자코 듣고 있는 글방 선생님은 아무 대꾸도 없었다. 오랫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는 멀찌감치 앉은 채 산수책을 들여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뒤에 가벼운 기침을 한번 하고 나서 겨우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헛허음, 옛날에 우리 때는 그런 것을 배우지 않아서 모르네.”     


난 순간 속이 다 시원했다. 이 정도만 해도 완전히 복수(?)를 한 것이며 내가 승리를 거둔 것이라는 생각에 은근히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다시 공손히 입을 열고 다음 문제를 묻게 되었다.    

   

“아, 그러셨군요. 그럼 이번에는 이 문제를 좀…….”     


난 이번에는 분수의 나눗셈 문제를 펴 보이면서 다시 묻게 되었다. 글방 선생님은 이번에도 산수책은 들여다보지도 않고 멀리 장죽을 물고 앉은 채 가자미 눈으로 곁눈질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한 마디를 내뱉고 있었다.       


“아, 글쎄, 우리 때는 그런 걸 전혀 안 배웠다니까 왜 자꾸만 그러고 있나?”       


그런 글방 선생님의 표정은 이미 몹시 불쾌하고 괘씸하다는 듯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다. 그러나 난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음 산수 문제를 또 펴 보였다. 이번에는 소수와 분수의 곱셈이었다.


그러자 글방 선생님은 이미 모욕과 창피를 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약이 바짝 오른 표정이었다. 그리고 얼른 내가 방에서 나가기를 기대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도 난 거기서 그치지 않고 끈질기게 매달렸다. 내가 그다음에 펼쳐 놓은 문제는 소수와 소수의 나눗셈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안색이 시뻘겋게 된 글방 선생님이 노골적으로 나에게 몹시 격앙된 목소리로 벌컥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아, 글쎄, 그런 건 배우지 않아서 모른다니까 왜 자꾸만 묻고 되지 못하게 이 야단인가? 이제 그만하고  어서 이 방에서 나가게.”     


난 다시 한번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이만하면 내가 완전히 통쾌한 복수를 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왕에 시작한 일, 더욱 철저하게 울분을 토해내며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모두 털어놓기 시작했다. 지겨울 정도로 아주 길게…….      


“선생님, 저도 선생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제 저는 너무 서운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아이들한테 명심보감은 물론 맹자나 논어 등,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예절을 가르쳐오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어찌 어제 제가 세배하러 왔을 때 손님을 반가운 낯으로 맞이하기는커녕, 뒤로 앉아서 세배를 하라고 호통을 치셨습니까? 전 그런 경우를 처음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명령하듯 저희 조상을 찾아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책은 제가 처음 본 낯선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평생 그 책 한 권을 가지고 손에 익은 책인데 어찌 조상을 찾는 시간이 똑같이 걸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조금 전에 제가 여쭈어본 산수책에 나온 문제들은 저도 잘 풀 수 있는 문제입니다. 저뿐만이 아닙니다.


국민학교 5학년 학생들도 다 풀 줄 아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안 배우셨다며 모르는 문제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세상만사를 한문 한 가지만 알면 다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명심보감에서 나오는 겸손이 아니라 선생님만의 아집이며 유아독존이며 거만스러운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영어를 좀 하십니까? 영어는 배우지 않으셔서 전혀 모르시지요?  저느 영어도 조금 할 줄 압니다. 독일어도 물론 모르시겠지요? 저는 독일어도 좀 배워서 조금 할 줄 압니다. 너무 오랜 시간 귀찮게 해드린 점 용서하십시오.      


저는 어제 선생님한테 당한 게 너무 황당하고 억울하고 분하여 이렇게 하지 않고는 도무지 배길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선생님은 내가 너무 괘씸했는지 마치 벌레 씹은 표정으로 잘 가라는 인사 한마디 없었다. 난 이렇게 분(?)풀이를 실컷 하고 나서야 방을 나섰다. 그렇게 마음이 홀가분하고 시원할 수가 없었다. 이제야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뒤 어느 일요일 낮이었다.


그날도 나는 직장에 다니다가 어제 고향 집에 와서 머물며 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님께서 저 멀리 글방 선생님이 지나가시는 걸 보고 우리 집으로 모셔왔다. 집에서 담근 막걸리가 좀 남았다며 대접하기 위해서였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난 그때의 일로 마음 한구석이 몹시 찝찝했다.  

    

우리 집으로 오신 글방 선생님과 아버님이 주안상 앞에 마주 앉아 약주를 드시게 되었다. 난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주전자로 술을 따르는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한동안 약주를 드시던 글방 선생님이 느닷없이 다시 나를 향해 화살이 날아왔다.      

 

“자네 대학까지 나왔다고 했지?”     


다시 몹시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자네 그런 우리 지방에 자네 조상이 몇 대조나 모시고 있는지 알고 있나?”    

 

난 다시 눈앞이 캄캄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햇던 질문이었다.      


그래서 바로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글방 선생님이 그것 보라는 듯 아버지를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흘리며 나를 비웃고 있었다.      


“허허허, 저것 좀 보게. 대학까지 나왔다는 사람이 저렇게 자기 조상도 모르고 지낸다니 그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안 그래요?”     


글방 선생님이 비웃듯 하는 말에 아버님도 나도 아무 말도 못하고 씁쓸한 웃음만 짓고 있었다. 나는 물론이고 아버님까지 다시 한번 강타를 맞게 되고 만 것이다. 기분 참 너무 비참할 정도로 씁쓸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글방 선생님이 왜 나를 그렇게 씹었는지 궁금한 마음이 쉽게 가시지를 않는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내 멋대로 미루어 짐작해 보곤 한다.    

  

그 당시 우리 마을에는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이 극히 드물었다. 고등학교까지 나온 사람이 가장 많이 배운 측에 속했다. 그런데 더구나 내가 대학을 나왔다고 하니까 어떤 방법으로라도 누르고 기선을 잡아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그런 얄팍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닐까?     


이유야 어찌 됐든 나는 지금도 공연히 마음이 찝찝하기만 하다.      


학식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제대로 배운 사람들이라면 그런 식으로 사람을 눌러보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제대로 배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 글방 선생님은 결코 제대로 배운 선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많이 배운 사람이라 해도 자신이 터득한 얄팍한 지식을 함부로 휘둘러서까지 남을 눌러보려는 사람은 결코 제대로 배운 사람이며 학식이 높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기에 ‘벼는 익을수록 머리를 숙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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