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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Jan 14. 2021

동태 한 마리의 추억

[부모에게 효도, 그것은 반드시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온다]

난 가끔 그 옛날 어렸을 적의 추억을 떠올리며 훈훈하고 따뜻하기 그지없었던 가족애를 회상해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곤 한다.     




밀기도 하고 밀리기도 하는 치열했던 한국 전쟁이 일단 휴전이란 이름으로 막을 내리게 된 직후에 있었던 일로 기억하고 있다. 아마 그때 난 초등학교 5학년이나 6학년쯤 되었을 때라고 짐작된다.      

      

그 당시 전쟁으로 인해 집이란 집들은 모두 불타버리고 가족들이 등을 대고 잠을 잘 보금자리까지 잃어버렸기에 잠을 편히 잘 잠자리마저 마땅치 않아 임시로 움막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혹한 전쟁은 추운 겨울에 입을 옷은 물론이고 먹을 양식마저 모두 바닥이 나게 만드는 불행을 낳고 말았다.           

그런 참담한 현실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겨우 말 그대로 목구멍에 풀칠만 하기에도 바빴다. 그리고 그날그날 목숨이 붙어있는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기며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는 힘겨운 고행의 나날이 기약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 당시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헐벗고 굶주린 탓에 겨울철에는 더욱 춥고 모질며 혹독하기만 하였다. 날씨는 왜 그렇게 모질게 춥고 눈은 또 왜 그렇게 많이 내리고 있었던지……!  

        

먹을 것이 궁하던 시절이었지만, 그래서 그런지 그땐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며 동냥을 하는 걸인들이 많았다. 특히 겨울철에는 동냥을 하러 다니다가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다 못해 가끔 길바닥에 쓰러져 얼어 죽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비극적인 참변은 걸인들뿐만이 아니었다. 헐벗고 굶주린 추운 날씨에는 아무리 천하장사라 해도 당해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모두가 전쟁이 할퀴고 간 비극의 결과요, 불행이 아닐 수 없었다. 




모두가 그렇게 헐벗고 굶주리던 몹시 추운 겨울의 어느 날 오후였다.     


난 며칠 전부터 은근히 혼자 속으로 끙끙 앓고 있는 즐거운 고민거리 한 가지가 생기게 되었다. 내일이 마침 어머니 생신인데 무얼 사다 드려야 좋아하실까 하고 그나마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얼마의 용돈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확실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 주머니에는 틈틈이 아껴서 모아 둔 아주 적은 약간의 용돈이 있었다  

   

먹고 살기도 어려운 시절에 어떻게 그 귀한 용돈이 있었는지는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는다아마 내가 어렸을 때 유난히 먹성이 짧아 밥을 잘 먹지 않기 때문에 부모님이 조금씩 주신 용돈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쨌거나 용돈이라도 좀 넉넉했다면 그렇게 고민을 하거나 걱정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용돈이 너무 적었기에 그 돈을 가지고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어떤 것도 사 드릴 수가 없었기에 오랫동안 걱정과 고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날 오후가 되어서야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하이 돈이면 동태 한 마리는 살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자 난 마음이 다급해졌다.    

  

해는 이미 기울어져 가고 있는데 읍내 장에 가려면 시오리 길이 넘는 먼 거리였다. 아무리 빨리 뛰다시피 달려간다 해도 돌아올 때는 이미 어두워져서 캄캄한 밤에 산길을 돌아올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난 마음이 몹시 다급하고 초조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겁만 먹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난 결국 그 무서운 산길을 밤중에 돌아올 각오를 하고 식구들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급히 길을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 것 같았다.    


“따르릉~~~ 따르릉~~~”        

       

읍내를 향해 한창 숨이 찰 정도로 뛰다시피 급히 걸어가다 보니 갑자기 뒤에서 자전거가 쫓아오며 따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때 마침 마을에 형벌 되는 사람이 읍내에 급히 볼 일이 있어서 가는 길이라며 자전거를 타고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형네 가족들은 서울에서 살다가 한국 전쟁으로 인해 우리 마을로 피란을 와서 아예 자리를 잡고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형은 나를 보자마자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딜 가는 길이냐고 물었다. 내가 읍내에 급히 볼 일이 있어서 간다고 하였더니 인심 좋게 자전거 뒤에 올라타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없어서 걱정을 하고 있던 중이어서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이런 뜻밖의 행운이 또 어디 있을까!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난 그때 난생처음으로 그 형 덕분에 자전거 뒤에 타보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그 시절에는 자전거가 아주 귀한 때여서 자건거 구경하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그러기에 그때 자전거 한 대를 가지고 있는 집이라면 그나마 형편이 꽤 좋은 집이었다. 아마 지금의 벤츠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던 자전거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가보처럼 귀한 취급을 받던 자전거였기에 60여 호나 되는 우리 마을이었지만 오직 그 한 집만 자전거 한 대가 있었다.   

        

나를 뒤에 태운 자전거는 이미 성황당 고개를 넘고 나더니 다시 내리막길을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신바람이 나고 기부이 좋을 수가 없었다. 왼쪽은 낮은 산이 이어져 있고 오른쪽은 길 밑으로 작은 논배미들이 옹기종기 펼쳐져 있는 좁은 길을 바람처럼 빠른 속도로 기분좋게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자전거가 마냥 신바람이 나고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한창 신바람이 나서 기분이 좋은 것도 잠시,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커브 길이 있는 논길 둑을 달리던 자전거가 커브를 틀면서 그만 둑 밑에 굴러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자전거도, 그리고 형도 나도 한꺼번에 짐짝처럼 둑 길 밑에 있는 논바닥으로 보기좋게 나동그라지며 자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은 그때의 일이 자세히 기억이 잘 나지 않아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다행히 그때 그 형도 나도 크게 다치지 않았고, 자전거도 고장이 나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린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몸을 툭툭 털고 난 다음에 다시 자전거를 타고 읍내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읍내에 도착하자 그 형은 그 형대로 볼일을 보러 가고, 나는 그 길로 바로 생선가게로 달려갔다. 가게 앞에 선 나는 우물쭈물하면서 동태값을 물어보게 되었다. 

     

동태 값은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용돈으로는 한 마리를 사기에도 조금 부족한 금액이었다. 이를 어쩌나! 난 금방 울상이 되어 얼른 달란 말을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캄캄한 밤길을 혼자 돌아갈 생각을 하면, 우물쭈물하고만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잔뜩 울상이 된 얼굴로 용기를 내어 가게 주인에게 사정을 하게 되었다. 

     

내일이 마침 어머님 생신이어서 생일 선물로 동태를 사러 온 것이라며 한 마리 줄 수 없느냐고 조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마음씨 좋은 가게 주인은 내가 몹시 딱해 보였던지 동태 한 마리를 선뜻 내주었다.

          

그 순간, 나는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가게 주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에 새끼줄로 동여맨 동태 한 마리를 들고 집을 향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겨울철의 짧은 해는 어느덧 서산으로 넘어가고 사방은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여느 때 같으면 시오리나 되는 컴컴한 산길을 감히 혼자 걸어서 집으로 간다는 것은 엄두조차 내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어머님을 기쁘게 해드릴 생각을 하면 혼자 걷고 있는 산길이 그날만큼은 별로 무섭지도 않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새끼줄에 매달린 동태 한 마리가 손에서 달랑달랑 흔들리는 것을 보며 벅찬 기쁨으로 인해 그런 두려움과 공포를 잊게 해준 게 아닌가 짐작해 보게 된다.     


이윽고 동태 한 마리를 들고 먼 길을 달려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나는 집에 오자마자 부엌으로 들어가서 아무도 모르게 부뚜막 위에 살그머니 올려놓았다. 그때 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시던 어머니가 나오시더니 말도 없이 어딜 갔다가 이렇게 늦게 들어오느냐고 역정을 내며 물으셨다.    


난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부뚜막에 놓인 동태를 가리켰다. 그리고 내일 어머니 생신이기에 저걸 사기 위해 읍내까지 갔다가 오느라고 늦었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어머니는 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그 비싼 동태를 다 사 왔느냐며 몹시 감동하셨던지 그 자리에서 눈물까지 흘리며 좋아하셨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자 나의 눈에서도 덩달아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흐뭇하고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다음날 아침이었다.      


어머니는 아침 일찍부터 어제 내가 사 온 동태를 무를 썰어 넣고 정성껏 동태국을 끓이셨다. 그리고 마침내 정성껏 끓인 동태국을 올려놓은 생일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셨다.    


난 역시 운이 몹시 좋았나 보다. 어제 내가 사 온 통태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알배기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우리 가족은 모두 네 식구였다. 그런데 알이 밴 동태의 가운데 도막은 내 국그릇에 담겨있었고, 그다음 도막은 누님 국그릇에 머리 부분은 아버지, 그리고 가장 안 좋은 꼬랑지 부분은 어머니 국그릇에 나누어 담겨있는 것이 아닌가!      


난 내 국그릇에 있는 가운데 도막을 오늘은 어머니 생신이니까 어머니가 잡수셔야 한다며 어머니에게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한사코 그 동태 가운데 도막을 몇 번이고 내게 도로 내주며 어서 먹으라고 하여 결국은 내가 먹고 말았다. 모처럼 큰마음 먹고 어머니에게 드린다고 사 온 동태의 가장 맛있는 부분을 결국은 내가 먹어치우고 말았던 것이다.  


그 어려웠던 시절이긴 하지만 이 얼마 만에 맛을 보게 된 동태국이란 말인가. 그때의 동태 맛을 지금도 좀처럼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 뒤부터 이웃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두고두고 우리 아들이 생일날 동태를 사다 주어서 잘 잡수셨다고 자랑을 하며 다니시곤 하셨다.   

        

난 그때 깊이 깨닫게 되었다. 부모님에게 작은 효도를 하게 되면 그것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부모님으로부터 결국은 두 배, 아니 열 배로 내게 되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자고로 수욕정이 풍부지자욕양이 친부대‘ 라 하였다나무는 아무리 고요하려 하나 바람이 가만히 있지 않고자식은 봉양하려 하나 부모님은 언제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다.      

    

백번이고 지당한  명언이 아닐 수 없다. 

    

동태 한 마리로 인해 그렇게 행복해 아하시던 나의 어머님이나 아버님은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시고 지금은 이 세상 분이 아니시다.    

 

난 부모님 살아 생전에 더 잘해드리지 못한 일들이 지금은 두고두고 후회가 되면서 가슴이 저려오곤 한다.     


그땐 그렇게 귀하기만 했던 동태가 요즈음에는 어느 시장엘 가나  흔한 게 동태이다.   


난 요즘도 가끔 그때의 생각을 회상하면서 동태를 사다가 국을 끓여 먹어보곤 한다.     

 

하지만 왜 그런지는 몰라도 아무리 솜씨를 발휘하여 끓여 보지만 지금은 절대로 그때의 그 기가 막히게 맛이 있던 통태국의 맛이 나지 않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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