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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Jan 29. 2021

나에게는 힘겨웠던 초등학교 입학 시절

[학교란 누구나 즐거운 마음으로 가는 곳이어야 한다]

’어린이는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이어나갈 새 사람이므로 그들의 몸과 마음을 귀히 여겨 옳고 아름답고 씩씩하게 자라도록 힘써야 한다‘    
  

위에 적힌 글은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의 서문이다.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은 11개의 세부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린이를 받들고 보호해야 해야 할 국가와 사회가 해야 할 당면성과 의무와 책임을 조목조목 명기해 놓았다.     

  

이 어린이 헌장은 1957년, 그 당시 한국동화작가협회에 소속된 아동문학가 마해송, 강소천, 이종항, 임인수, 홍인순, 김요백, 방기환 등 7인이 성문화하여 발표한 것을 그해 5월 5일을 기해 보건사회부가 선포하게 되었다.      


 ※   註 ;  여기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을 올리게 된 것은 어린이들이 이처럼 보호되어야 할 어린 시절에,

            초등학교 고학년에 올라가서는 친구들에게, 그리고 선생님에게까지 끝없는 폭력과 괴로움을 당하면

            서도 어느 곳하나 의지할 곳조차 없는 마치 지옥과도 다름없는 곳이 곧 나의 고통스럽고 부끄럽기 

            그지없는 학교 생활의 한 단면을 회상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은 어린이 헌장이 선포되기 훨씬 전인 40년대 말쯤이었다.  

   

누구나 그렇듯 처음 학교에 입학할 무렵이 가까워지면, 왠지 벌써부터 마음이 설레게 되고 하루라도 빨리 학교에 가고 싶어지는 모양이다. 새로운 친구, 새로룬 공부, 그리고 난생처음 만나게 될 선생님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으로 한껏 들뜨게 된다.      

    

나 역시 학교에 입학할 날짜가 가까워짐에 따라 다른 아이들처럼 마음이 한껏 들뜨고 부풀기는 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에게는 큰 걱정거리가 한 가지 있었다.  

    

언젠가도 잠깐 비친 적이 있지만, 난 출생할 때부터 유난히 잔병치레를 많이 하는 약골로 태어났다. 그래서 같은 또래에 비해 몸도 왜소하고 허약하였으며, 더구나 2대 독자로 남들이 보기에는 몹시 귀한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렇게 약한 체질이어서 자주 잔병치레를 하는 바람에 불행하게도 친구들과 어울려 뛰어노는 시간보다는 자리에 누워 앓고 누워지내는 날이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어쨌거나 마냥 부푼 기대와 꿈을 안고 학교에는 가고 싶었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드디어 입학식 날이 돌아왔다.     

 

막상 입학식 날은 돌아왔지만, 불행하게도 혼자의 힘으로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너무 기운이 없고 약해서 오래 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학교는 집에서부터 십 리가 넘는 내겐 벅찬 거리였다.

     

난 별수 없이 부끄럽고 창피하긴 했지만, 입학식에 참가하기 위해 아버지 등에 업혀 난생처음 학교라는 곳을 가게 되었다. 지금 보면 그렇게 좁아보이는 운동장이 그때는 왜 그렇게 넓고 커 보였는지!     


학교 울타리는 온통 오랜 세월 나이를 먹은 벚나무와 하늘을 찌를 듯이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린 플라타너스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지금도 그때의 광경을 떠올릴 때마다 그렇게 멋진 추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새로 입학할 신입생들과 학부모들은 울타리 부근에 옹기종기 모여 서서 대기하고 있게 하였다. 그리고 운동장 건너편 교무실 쪽에서 선생님이 출석부를 들고 서서 한명씩 호명을 하고 있었다. 키가 후리후리하게 크고 눈에 띌 정도로 잘 생긴 남자 선생님이었다.     

  

자신의 이름이 불린 아이는 ’네!‘ 하고 큰소리로 대답하면서 선생님 앞으로 달려가서 줄을 서게 되어 있었다.        

이때나 저때나 하고 기다리다 보니 마침내 선생님의 입으로부터 내 이름 석 자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네에~~~!!”     


난 목청껏 있는 힘을 다해 큰소리로 대답하고는 급히 선생님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선생님은 웃음 띈 인자한 표정으로 귀엽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그 녀석 참 똘똘하게 생겼다!‘라고 말하고는 줄에 세워 주셨다.      


’그 녀석 참 똘똘하게 생겼다‘란 선생님의 말 한마디를 듣게 된 나는 입학식 날부터 그렇게 날을 것처럼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한마디가 지금도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선생님에게 입학하자마자 그런 칭찬을 받게 된 것은 부모님의 사전 교육 덕분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우리 부모님이 나에게 특히 귀가 닳도록 강조하며 가르친 것이 있었다.     

 

선생님이 네 이름을 부르시면 그때마다 아주 씩씩하고 큰소리로 ’네!‘ 하고 대답해야 한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배웠기 때문이었다.      


그다음 날부터 학교에 갈 때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보다 여섯 살 위인 누나가 나를 등에 업고 번갈아 가며 등하교를 시켜주었다. 그리고 하교할 때도 미리 식구들 중에 누군가가 교문 근처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십 리가 넘는 집으로 나를 등에 업고 돌아가곤 하였다.      

 

그렇게 늘 업혀서 학교에 오가다 보니 어느 때부터인가 난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 이름 석 자 대신 ’다리 병신‘이란 별명이 붙게 된 것이다. 같은 반 남자 친구들은 물론이고, 여자아이들한테도 업신여김을 받고 우습게 여기는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난 아무리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어도, 그리고 창피하기도 하였지만, 내 힘으로 등하교를 할 수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도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외로웠다. 아마 그때 내가 그런 놀림과 조롱거리가 되었음에도 계속 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선생님 덕분이었다.    

  

모두가 나를 업신여기고 놀려도 입학식 날 그렇게 인자하고 좋아 보이고 마음에 들었던 선생님만은 누가 뭐라고 해도 끝까지 항상 내 편이었으며 변함없이 나를 아껴주시고 따뜻하게 대해 주신 덕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만일 선생님마저 나를 우습게 여기며 겁을 주고 야단을 치는 일이 있었다면 아마 난 틀림없이 영영 학교에도 흥미를 잃고 다니지 못하는 무녀리로 남은 채 외톨이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지금도 가끔 그 선생님의 깊은 은혜를 잊지 못하며 가끔 보고 싶고 그리워지곤 한다.  

        

1년 동안 부모님과 누님이 번갈아 가며 힘들게 등하교를 시켜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학교에 늘 빠지지 않고 간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도 자주 잔병치레를 하는 바람에 수업일수의 반을 채우지 못한 채 1학년을 어렵게 그러나 무사히(?) 마치게 되었다.      


난 1학년 때의 선생님이 친필로 작성해 준 통지표를 70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가끔 그 통지표를 보면 거의 절반은 결석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작은 즐거움이 있었다. 그렇게 결석이 잦은 나에게도 선생님은 학년말에 뜻밖의 우등상장까지 주셔서 그 상장도 함께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결석이 그렇게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우등상장을 준 것은 어쩌면 소외되고 있는 나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선생님의 깊고 자상하면서도 따뜻한 배려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보기도 한다.  

     

그렇게 그럭저럭 1학년이 끝나고 2학년이 되었다.      


2학년이 된 뒤에도 건강이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2학년으로 올라가긴 했지만 난 여전히 학교에 업혀 다니고 있는 창피한 무녀리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1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이 다시 우리 반 선생님이 되셨다. 겉으로 표현은 못했지만 난 뛸 듯이 기뻤다. 나에게는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2학년으로 올라온 뒤, 어느 날 미술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미술 시간에 우리들에게 미술책에 나와 있는 그림을 그대로 보고 그려보라고 하셨다. 미술책에 나온 그림은 하얀 여백에 꺾어놓은 감나무 가지에 먹음직스럽게 익은 감이 몇 개 달려 있는 동양화 같은 그림을 그대로 보고 그리는 임화였다.       

  

반 아이들은 그림책을 보면서 신바람이 나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서로 친한 아이들끼리 서로 떠들어 대며 그리고 있었다. 나는 같이 대화를 나눌만한 친구도 없었다. 그래서 나도 따로 앉아서 나름대로 크레용으로 열심히 그리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처음부터 아이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지도를 하고 계셨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선생님이 내 앞으로 오게 되었다. 나는 혹시나 선생님에게 꾸중을 들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기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면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그림만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다음 순간, 선생님이 아무 말 없이 내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슬그머니 빼앗더니 교단 앞으로 들고 나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난 떨리던 심장이 더욱 크게 떨리며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곧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혹시나 선생님이 내가 그린 그림을 가지고 너무 잘못 그렸다고 아이들 앞에서 창피를 주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너무 긴장을 하게 된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되면 아이들한테 그렇지 않아도 놀림감이었던 내가 더욱 놀림감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달래며 숨을 죽이며 선생님의 눈치만 살피고 있을 때였다.      


선생님은 내가 그리던 그림을 아이들이 잘 보이게 번쩍 들더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이야기는 너무나 뜻밖이었다.      


“여려분! 잠깐 주목하고 이 그림을 좀 보세요! 그림을 그리려면 이렇게 그려야 해요. 잘 보세요. 얼마나 색칠도 잘하고 잘 그렸는가를…….”     

선생님은 한동안 내 그림을 아이들에게 보여 주며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난 순간 ’후유~~‘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되었다. 그림을 잘못 그렸다고 꾸중을 듣거나 핀잔을 받을 줄 알았는데 그와는 반대로 칭찬을 받게 되다니…….      


난 그만 하늘로 붕 떠오르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내가 생각해 봐도 잘 그린 것 같지 않은데 이런 칭찬을 받고 보니 솔직히 이제부터는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난 그날 이후부터는 종이가 몹시 귀한 시절이었지만 작은 종잇장만 봐도 틈만 나면 계속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게 되었다. 누가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혼자 열심히 그림을 그리다 보니 내가 그린 그림을 보고 칭찬을 하는 사람들도 가끔 나타났다. 그러면 더욱 용기가 생겨서 더욱 열심히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요즈음 한창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는 말이 유행을 하고 있다.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가 나에게 그렇게 큰 위력과 용기를 주게 될 줄은 예전에는 정말 몰랐던 일이었다. 


그때부터 나의 본격적인 그림 그리기는 중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미술부로 들어가서 그리고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도 미술부 활동으로 계속 이어졌다.      


그때 주로 그린 그림은 수채화였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도 가끔 일요일에도 학교에 스스로 가서 이젤을 버티어 놓고 열심히 그려 나가다가 졸업한 뒤부터는 사정에 의해 오랫동안 이어오던 그림 공부를 아쉽지만 접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나에게 오랫동안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신 선생님은 초등학교 2학년 4월인가 5월경에 갑자기 학교를 그만두고 다른 선생님이 맡게 되었다. 학교를 그만둔다는 인삿말 한마디 없이 헤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나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아쉬운 작별이었다. 얼마 뒤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선생님은 폐병에 걸려 고향인 충청도로 갔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뒤에는 그 선생님에 대해 뜻밖의 청천벽력과 같은 소문을 다시 듣게 되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직까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착하고 인자하던 선생님이 북에서 남파된 간첩이었다는 소문을 듣게 된 것이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난 지금도 그게 사실이 아니기를 빌고 또 비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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