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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Nov 22. 2020

도감골(都監), 돌다리에 얽힌 유래

[내 고장의 전설]

※ (註) 도감(都監); 고려와 조선 시대, 국장이나 국혼 등 큰 국사가 있을 때 임시로 설치하던 관청     


‘도감골’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다. 경기도 파주군(현재 파주시) 월롱면 도내리가 바로 그곳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도감골’이라고 하면 얼른 쉽게 알아들어도 ‘도내리’라고 하면 잘 모르는 시람들이 많다.   

    

이 마을은 현재 1리, 2리, 3리, 4리로 구분되어 있으며 1리를 내도감(內都監), 2.3리를 합하여 외도감(外都監)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이 마을은 에로부터 농사만을 짓고 살아가는 전형적인 농촌으로서 파주에서는 가장 교통이 불편한 곳으로 손꼽히는 산골 마을이기도 하다.      


언제부터 이 마을을 <도감골>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지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려말 또는 근세조선 초기가 아닌가 미루어 짐작하고 있다.     


아득한 그 옛날, 이 마을에는 자식을 공부시켜 출세시키려는 학구열이 남달리 대단한 어머니 한 분이 살고 있었다. 이름도 성도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는 그 어머니는 슬하에 아들 하나를 키우고 있었는데, 이들에게 공부를 시키기 위한 일이라면 물과 불을 가리지 않을 만큼 대단한 열과 성을 다하였다고 한다.     


그 옛날, 글방이 드물던 시절, 이 마을에서 북쪽으로 약 3km 정도 떨어진 '우건리'라는 마을에는 마침 글방이 하나 있었다, 어머니는 그곳으로 이들을 보내면서 공부를 시키게 되었다.     

 

아들이 너무 어려서 미처 걸음을 걷지 못할 때는 어머니가 아들을 등에 업고 글방을 오가곤 하였다. 그리고 아들이 자라 어느 정도 걸음을 걷게 되었을 때에도 사시사철 추우나 더우나 하루도 빠짐없이 아들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뒷바라지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날의 일이다.      


“우르르릉~~ 꽈다당! 우르르릉~~ 꽈다당……!” 


 그날따라 갑자기 새벽부터 천둥과 번개가 요란하더니 마침내 작대기보다 굵은 폭우가 무섭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마을은 삽시간에 온통 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처럼 무섭게 폭우가 내리고 있음에도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글방 길을 나서게 되었다. 이 마을 동구 밖을 나서면 온통 논으로 된 드넓은 들판 길이 나오게 된다. 그 들판 길을 한창 걸어 중간쯤 가다 보면 들판을 가로지른 제법 큰 개울이 하나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글방을 가려면 반드시 그 개울을 건너야만 한다. 그런데 오늘은 사방에서 흘러나온 흙탕물이 혀를 널름거리며 무섭게 개울에 넘쳐흐르고 있어서 그 개울을 건너간다는 것은 엄두조차 낼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한동안 난처해진 얼굴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던 끝에 마침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얘야, 엄마가 잠깐 어딜 갔다가 올 데가 있으니 넌 이 자리에서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으렴.”     


어머니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들판 오른쪽 멀리에 있는 산(오산령, 또는 일명 갓모봉)을 향해 급히 뛰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갓모봉 산꼭대기까지 단숨에 뛰어올라갔다. 


그리고 조금 뒤, 어마어마하게 크고 넓적한 바윗돌을 하나를 캐서 머리에 이게 되었다.      


그야말로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불가사의한 초능력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 바윗돌의 두께는 40 CM 정도, 그리고 길이는 무려 220 CM 정도나 되는 거대한 바위였는데 그렇게 무겁고 육중한 바위를 여자의 힘으로 혼자 이고 왔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어머니는 결국 그 바위를 머리에 이고 아들이 기다리고 있는 개울까지 힘겹게 내려오더니 그 바윗돌로 물이 넘쳐흐르는 개울에 다리를 놓게 된 것이다. 그 덕분에 아들은 결국 무사히 무사히 쉽게 개울을 건너갈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어머니의 불타는 교육열은 그처럼 무서운 폭우와 비바람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들은 그런 어머니 덕분에 그 후로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글방에 다니며 열심히 공부를 지속해 나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 도감골에서 우건동으로 가는 벌판 기운데 있는 그 개울에는 그때의 전설을 간직한 돌다리가 말없이 놓여 오가는 행인들, 그리고 읍내 장에 가는 마을 사람들의 발길을 돕고 있었다.      


그러나 그 뒤, 어느 해, 그 넓은 들판을 모두 농지정리를 하게 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그 돌다리는 철거되어 지금은 그 모습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 후, 아들은 크게 성장하여 어머니가 바라던 대로 마침내 높은 벼슬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식을 가르치는 일에 온갖 열과 성을 다 바친 어머니는 그토록 갈망하던 아들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아들이 벼슬을 하기 얼마 전에 그만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그러나 아들은 높은 벼슬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자나 깨나 늘 어머니를 잊을 수가 없었다. 이토록 자신이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어머니의 뜨거운 사랑과 열정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날이 갈수록 어머니의 정이 더욱 그립고 보고 싶었다.      


일단 어머니의 뜻대로 크게 출세는 하였지만, 아들은 늘 슬픈 표정으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우울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자 그 연유를 눈치채게 된 조정에서는 그 어머니의 거룩하고도 높은 뜻에 탄복하여 어머니의 혼을 다시 국장으로 성대하게 모시게 되었다.     


그렇게 국장으로 성대하게 모시게 된 곳이 바로 아들이 태어난 바로 도감골이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그 누구의 손길이나 보호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외도감골 뒷산 마루에는 그의 어머니의 무덤이 커다란 비석과 함께 겨우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어머니의 높고 거룩한 뜻은 우리들 가슴속에 오래오래 남아 숨쉬게 하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확실한 근거는 알 수 없지만, 이 ‘도감 무덤’이 생긴 후부터 이 마을을 ‘도감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          


                                                                                 - 1978년, 한국교육출판 ’사화찾아 섬천리‘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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