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전투(71)
[김좌진. 독립운동가(1889~1930)]
김좌진은 충남 홍성에서 이름 있는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난히 의협심과 정의감이 강했던 김좌진은 어릴 때부터 김옥균의 영향과 감명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그는 강한 자 앞에서는 항상 강했으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나 약한 사람을 보면 그냥 넘어가지 않고 반드시 도와야만 직성이 풀리는 착하고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삼국지 같은 무협 소설을 즐겨 읽었으며, 소설을 읽은 후에는 친구들 앞에서 소설 속에 나온 옛날 장군들이 용맹스럽게 활약했던 모습과 무용담을 뛰어난 입담으로 실감 나게 들려주기를 좋아했다.
그가 15세 되던 해, '인간은 누구나 차별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 고 생각한 김좌진은 그동안 자신의 집에서 일하던 종들을 모두 풀어주기도 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유의 몸이 된 종들에게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까지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그때가 마침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한창 기울이져 가고 있을 때였다.
”장차 이 나라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늘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던 김좌진은 마침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그때부터 열심히 무술 연마에 힘썼다.
그리고 얼마 후, 을사늑약 조약이란 이름으로 한·일 합병이 이루어지자 울분을 참지 못한 그는 목숨을 바칠 각오로 대한광복단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다가 그만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1917년 더 큰 꿈을 안고 만주로 망명하게 되었다.
만주로 건너간 그는 1920년 ’북로군정서' 라는 독립군 사단을 조직하고 블라디보스톡에서 비밀리에 사들인 무기로 군사들을 무장시키기에 열을 올렸다.
그해 김좌진은 ‘북로군정서’의 독립군을 이끌고 만주 길림성으로 달려가 이범석과 함께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1천여 명의 일본군을 무찌르고 나머지 잔당들을 물리쳐서 크게 승리를 거두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 전투가 바로 그 유명한 '청산리 전투' 이다.
청산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김좌진은 다시 갑산촌에 일본 기병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여세를 몰아 그곳에 있던 일본 기병대마저 보기 좋게 섬멸시켰다.
그러나 그는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갑산촌에서 전사한 일본 기병대대장의 몸에서 나온 비밀 서류에서 많은 일본군이 어랑존에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발견하고는 잠시 쉴 사이도 없이 어랑촌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돌격해 맹렬한 전투를 벌인 끝에 또다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만세!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일본에 대한 증오로 불타고 있던 독립군들은 거듭되는 승리의 감격으로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며 서로 얼싸안고 울부짖었다.
그리고 얼마 뒤, 김좌진은 독립운동가 다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여 부총재가 되었다. 그때 일본은 청산리 전투에서 패망한 치욕을 씻기 위해 철저한 보복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를 미리 알게 된 김좌진은 1921년, 그들의 보복 작전을 피하기 위해 소련으로 건너가 군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 양성에 힘쓰던 중, 뜻하지 않은 소련군과의 충돌로 많은 전사자를 내고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북만주로 건너왔다.
1925년, 그는 김혁과 신민부를 조직하여 신민부의 총사령관직을 맡기도 하였으며, 임시정부로부터 군무총장,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으나 뜻한 바 있어 모두 사양하고 오로지 독립군 양성에만 힘을 기울였다.
그 뒤, 만주에서 성동사관학교를 세워 군사 양성에 힘쓰는 한편, 1929년에는 한족연합회 회장직을 맡았다.
그는 나라를 잃고 만주에서 고통받고 사는 동포들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하나로 단결시키고, 항일 투쟁을 위해 힘을 한데 모으는 일에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던 중 그에게도 불행이 찾아왔다.
뜻하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암살을 당하게 될 줄이야!
그를 암살한 사람은 다름 아닌 김좌진의 과거 부하로 일했던 고려공산청년회 소속의 김일성(金一星)이었다.
김좌진은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을 받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