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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Feb 07. 2020

「교육행정의 유연성」을 읽고

     [정태범 - 전 교원대학교 명예교수]

교육의 최종 목표는 ‘바람직한 행동 변화’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찰스 실버맨>이 쓴 '교실에 서의 위기' 에서 미국 교육은 '읽고, 쓰고, 셈하는 교육에서는 일단 성공하였으나 개개인을 바람직한 인간으로 키우는 교육에서는 큰 실패를 보고 말았다‘ 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학교란 아이들을 질식시키고 즐겁고, 즐겁게 배워야 할 그들의 기쁨과 창의력을 송두리째 파괴하였음은 물론 모두가 따분하고 힘겨운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덧붙여 지적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교육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 

    

이른바 입시 중심의 교육으로 일관 한 나머지 읽고, 외우고, 답을 쓰는 교육은 크게 기여해 왔지만 개성과 창의력을 기르는 일에는 소홀히 하여 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고 하였다. 이 대목을 읽고 크게 공감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줄로 안다.    

  

또한, 지금까지의 이런 교육이 앞으로도 계속 지속된다면 이는 곧 교실에서의 위기뿐만이 아니라 더 크게는 국가의 장래까지도 매우 위험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한 가지 예가 있다.     


몇 해 전, 미국에서의 일례이다.    

 

어느 초등학교 어린이 49명을 대상으로, 그리고 무작위로 19가지나 되는 각종 검사를 실시해 보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대부분 지능검사, 흥미 검사, 적성검사 등을 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 그 49명의 어린이들에게는 19가지나 되는 많은 검사를 적용해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19가지나 되는 많은 검사를 했다는 사실보다 더욱 주목해야 할 놀랄만한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정말 놀랍게도 49명중 47명의 어린이가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천재적인 소질, 그리고 잠재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발견이란 말인가!    

  

이 한 가지 예만 보더라도, 우리 인간은 누구나 각기 자기 나름대로의 남들이 감히 따르지 못할 한 가지씩의 소질을 모두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 소질과 특기를 발견하지 못해서 묻혀 있을 뿐.     


현재 우리 나라 초·중·고등학교의 교과서는 그 과목 수가 무려 열 가지가 넘게 개편되어 있다. 그 이유 역시 그것을 배우는 동안 자신이 어느 쪽에 소질이 있는가를 찾아보기 위한 매우 중요한 과정이라 하겠다. 


그런데 소질도 취미도 보이지 않는 과목 모두 무작정 만점을 받기만을 기대한다는 것은 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교사나 학부모들은 자녀가 과목마다 모두 다 만점을 받아오기를 기대하기보다는 그 어느 과목에 특히 적성과 흥미를 보이는지, 그리고 어느 과목에 소질이 엿보이는지를 꾸준히 관찰하고 그에 따른 과목에 대한 교육을 찾아내는 것이 학생을 가르치는 목적 위주로 가르치는 것이 한층 더 현명하면서도 바람직한 교육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다시 말해서 여러 가지 교과목을 한꺼번에 배워야 하는 가장 큰 목적은 그 수많은 과목을 두루 배우다 보면, 결국은 자기의 개성이나 소질에 맞는 과목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줄 수 있다는 데에 가장 큰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배워야 할 교과목은 많으나 그것들을 지도하는 과정에 있어서 그 방법이 한결같이 천편일률적이며 구태의연하다는 것이다. 

각자 개인의 소질을 전혀 무시한 채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그저 읽고 배우고, 답을 쓰는 이른바 입시 위주의 주입식 교육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앞으로 과연 학생들의 개성과 소질은 언제, 어디서 발견해 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교육은 그 모두가 하나같이 주는 대로 강요받고 받아먹어야만 하는 이른바 꼭두각시와 다를 바 없는 교육이라 하겠다. 


그저 군소리 말고 ’나만 따라라‘ ’나만 닮아라‘를 강요받는 ’나나니‘ 교육에 불과하다면 지나친 표현이 되지는 않을는지?(나나니; 구멍벌과에 속한 곤충으로 날아다니는 소리가 마치 ’날 닮아라, 날 닮아라‘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거듭 언급하는 말이지만, 오늘날, 학교와 가정에서는 자녀의 소질을 외면하고 무시한 채,     


 '그저 점수만 많이 받아라, 1등만 해라.'를 강요하고 있고, 사회에서도 역시 이른바 명문 대학을 졸업 한 사람을 선호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 하겠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일류 기업체에 입사하여 남들이야 어찌 됐든 나만 편한 자리에 앉아 쉽게 돈을 버는 것이 우선주의로 굳어진 오늘날의 현실이 활개를 치고 있다고 하겠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의 각 개인의 소질을 무시한 멍든 교육이요, 엄청난 모순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 매우 심각한 우리 교육의 현주소라 하겠다.       


 여기서 다른 나라의 예를 잠깐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일찍이 이스라엘서는 지식보다는 지혜를 가르치는 교육을 중시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기에 가령, 자녀가 생선을 먹고 싶다고 한다면, 부모는 곧 우리처럼 시장에 나가 생선을 사다가 구워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대신 생선을 잡는 방법부터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생선은 단 한 마리도 사다 준 적이 없지만, 생선을 잡는 방법을 배운 자녀들은 결국 평생 동안 생선을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잡아먹을 수 있는 능력과 기술을 먼저 배울 수 있는 능력을 터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전혀 그렇지를 못한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라 하겠다.      


오직 지식만을 머릿속에 넣어주는 것만이 우선이기 때문에, 힘이 들거나 조금 어려운 일은 전혀 시킬 생각조차 아예 포기하기 때문에 저학년이건 고학년이건 간에 행동의 변화만은 별로 차이가 없는 결과를 양산해 온 것이 사실인 것이다.  

     

그래서 만일 생선이 먹고 싶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당장 시장으로 뛰쳐나가 맛있고 먹음직스럽게 생긴 생선을 사다가 구워 먹이는 것이 그 예라 하겠다.      


어디 그뿐인가.      


맛있게 구워진 생선을 식탁에 올려놓고, 그것도 모자라 가시를 발라서 살점만 입에 까지 손수 직접 넣어주는 친절을 베풀고 있는 것이 요즈음의 부모들이라 하겠다.  심하게 말하자면 헛똑똘이들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다음 날 또 생선을 먹고 싶다고 하면 또 시장으로 달려가서 사다 주곤 하는 일이 언제까지나 반복되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자식을 아무 쓸모도 없고 융통성도 없는 인간으로 만드는 일에 부모들이 우선 일조를 하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것은 진정 자식을 사랑하는 참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지 아니면 알고도 그러는 것인지는 그 누구도 모를 일이라 하겠다.  


모든 동물들이 다 그렇듯이 그들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특기나 소질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우리 인간들의 특기나 소질은 동물들보다 더욱 뛰어날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이 세상에 아무리 못 생긴 사람, 그리고 아무리 바보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제 나름대로의 소질을 하나씩은 누구나 가지고 태어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되겠다.   

     

 다만, 그런 소질과 특기를 자신이나 타인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 그저 안타까운 일인 것이다. 그러기에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의 소질과 특기를 마음껏 발휘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사람들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증거로는 앞에서 언급한 미국에서의 검사 결과만 보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런 소질과 특기는 전혀 무시하고 외면을 한 채, 앞으로도 여전히 읽고 외우고 답을 쓰는 교육으로만 일관한다면 과연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모든 학생들의 장래가 하나같이 개성이나 창의력, 그리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소질과 특기가 모두 슬며시 사라지게 될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마치 판에 박아 찍어놓은 판화처럼 모두가 똑같은 인간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불을 보듯 뻔한 일이라 하겠다. 마치 학교라는 큰 공장 안에서 똑같은 날에 똑같은 모양으로 찍혀 나온 제품들처럼 ….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태범 교수는 「교육행정의 유연성」이란 제목하에 다음과 같은 아주 흥미롭고도 적절한 우화 한 토막을 소개하였다.   

   

 “사람들은 얼른 보기엔 아주 약하고 보잘 것도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그렇게 잘 살    수 있게 된 걸까?”    

 

“그럴 몰라서 묻니? 그건 학교라는 걸 세워서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이라구. 그래서 생활할 때 필요한 지식은 물론 지혜도 높아지게 되고.”     


“그래? 그럼 우리도 사람들처럼 학교 하나 세워서 공부를 해볼까?”    

 

“그래, 그래. 그게 좋겠다!”     


의논 끝에 동물들은 마침내 학교 하나를 세우게 되었다. 그 다음에는 어떤 것을 가르칠 것인가를 다시 의논하게 되었다.    

   

여기서 토끼는 자신의 특기인 달리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래야 만일 사나운 적을 만났을 때 잡히지 않고 재빨리 망을 쳐서 화를 면할 수 있어서 달리기를 배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였다.      


두더지는 땅을 자신의 특기이며 소질인 땅을 파는 것이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래야 추운 겨울이면 따뜻한 땅속에서 지낼 수 있고, 아무리 무서운 맹수가 나타나도 바로 땅을 파고 들어가 숨으면 화를 피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 다음에는 독수리가 나섰다.      


독수리는 뭐니뭐니 해도 하늘 높이 날아다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야 높은 하늘은 물론 저 멀리 바다 건너에도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 있다고 하였다.    

  

결국, 그들은 달리기와 땅파기, 그리고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그 세 가지를 모두 교육과정에 넣고 그것을 다 같이 열심히 배우기로 하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기간이 흘렀다.    

  

그들 모두가 그 어려운 이론 수업을 모두 마치고 마침내 실기 시험 날짜가 돌아왔다.      


맨 먼저 순서로 토끼가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간 다음 하늘로 높이 날아가기를 시도해 보게 되었다.      


“오매야, 나 죽네!”     


이론에 따라 어느 정도 하늘로 날아오르던 토기는 그만 곤두박질을 치면서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 사고로 인해 토끼는 결국 하늘로 날기는커녕 특기라고 자랑하던 달리기조차 영영 못하게 되는 큰 불구가 되고 말았다.      


그다음에는 독수리 차례였다. 독수리는 지금까지 배운 대로 실제로 땅을 파는 실기를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한동안 날개와 부리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땅을 열심히 파 헤집던 독수리도 그만 땅을 파기는커녕 날개와 부리를 모두 심하게 다치고 말았다. 


그래서 더 이상 하늘을 영영 날을 수도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결국 아무리 훌륭한 교육과정이라 해도 그것을 배우는 학생들의 흥미와 소질, 그리고 자신의 신체적인 특성에 맞지 않는다면 그 교육 과정은 결코 성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작금의 학교 교육은 개인마다의 지적 능력을 향상시키는 일에는 공헌한 바는 크게 인정하지만, 학생들 각자의 적성과 흥미에 맞는, 그리고 각자의 천재적인 소질 과 특기 발굴을 위한 교육은 소홀했기 때문에 학생들 모두가 공장에서 갓 만들어진  부품이나 빵처럼 모두가 개성과 소질을 잃고 말았다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앞으로의 교육은 모름지기 어떤 사람을 기를 것인가에 달려있기 때문에 교육행정은 학교 교육의 효율성 제고에 역점을 두고 이를 시급히 실천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끝으로 정태범 교수는 이와 같이 ’교육행정의 유연성‘을 바탕으로 하여 지금부터라도  


철저하고도 확고한 계획하에 지금처럼 학생 모두에게 똑같은 일률적인 교육이 아닌 개개인의 소질과 특기 개발에 역점을 두고 이를 실천했을 때 우리의 교육은 반드시 서광이 보일 것이라고 역설한 바 있다.( * )     

 * 너무나 가슴에 와 닿는 감명 깊은 내용이란 생각에서 일단 소개는 했지만 독자들께서는 과연 어떻게 생

    각할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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