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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Mar 27. 2021

요관 결석 수술 후기(3)

[나에게는 차라리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마지막 4시간!     


지금까지 두 눈을 뜨고 멀쩡히 살아있으면서도 마치 석고상처럼 되어 8시간을 그 자리에 누워있던 나에게는 그 나머지 4시간이 마치 지옥을 가는 것만큼이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머리를 조금만 움직이거나 들어도 뇌출혈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말이 나를 옴짝달싹도 못하게 하는  족쇄가 되고 말았다. 너무 답답해서 울화가 치밀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바에야 차라리 고개라도 한번 번쩍 들어본 다음에 뇌출혈이라도 일으켜 죽어 버리고 말까 하는 막다른 생각이 문득문득 용솟음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용케도 마침내 나머지 4시간을 모두 채우고 난 다음에야 자리에서 일어나 앉을 수 있었다. 나에게 그것은 8.15 광복절보다 더 큰 해방이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너무 지친 나머지 기진맥진하여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 동안인가 안정을 취한 뒤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수술로부터 미동도 하지 않고 12시간을 견디고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2백3일간의 입원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올 때의 그 기분과 환희, 그것은 해방의 기쁨이나 환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8.15 해방은 아주 어렸을 때 겪었기에 해방의 기쁨을 별로 느낄 수는 없었지만…….  


병원에서 수술을 마치고 일생일대의 12시간을 석고처럼 누워 있어야 하는 그런 막심한 고생을 하다가 퇴원을 할 때 병원에서는 1주일 뒤에 경과를 보러 다시 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뒤, 안정을 취하며 오랜만에 통증이 전혀 없는 비교적 평온하도고 꿀맛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낸 그 이튿날 아침 무렵이었다.  


그런데 이건 또 뜻밖의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2) 두 번째 죽을 고비     


이번에는 요관이 아니었다. 요관에서 한참 아래로 내려온 위치인 요로인 바로 그곳(?)이 마치 날카로운 송곳으로 계속 찌르고 있는 것 같은 통증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통증은 잠시 동안 멈추는 법도 없었다.

      

도무지 참을 수 없는 통증이었다. 앉을 수도 서 있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아픈 통증을 경험하기는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러다가 언젠가는 통증이 멈추겠지, 하는 믿음을 가지고 이를 악물고 참아 보았지만, 통증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그렇게 두세 시간을 통증에 시달리다 못해 급기야 병원으로 전화를 하게 되었다. 너무 아파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다고…….       

  

그러나 병원 측의 대답은 냉담하고 태연했다. 수술이 끝난 후유증으로 어딘가가 좀 통증이 일어났을 것이라며 조금만 더 참았다가 예약했던 1주일 후에 내원을 하라는 것이었다. 막막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죽을 것만 같았다.


환자의 고통과 아픔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것 같은 의사의 답변에 그때처럼 의사가 야속하면서도 무정하다고 느껴질 수가 없었다. 누구나 의사가 되면 냉혈인간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억지스러운 생각도 들었다.   

    

별수 없이 그대로 참고 견디기로 하고 방바닥에 조심스럽게 앉아보았다. 너무 아파서 입에서는 연신 신음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일어서기도 어려웠지만, 가만히 서 보았다. 마찬가지였다. 그곳(?)이 너무 아팠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곧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끼니때마다 식탁이 아닌 밥상을 내 앞에 정성껏 바치고 있었지만, 지금 제대로 밥이 입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 숟가락질을 하려고 조금만 몸을 앞으로 기울여도, 조금만 몸을 펴도 통증은 더 심했다. 누워 있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어도 통증은 여전했다.      


할 수 없이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그곳(?)을 손으로 꼭 쥐고 견디어 보았다. 그래도 극심한 통증은 마찬가지였다. 놓고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진통제를 먹어보았다. 하지만 진통제도 이럴 때는 아무 효과도 없는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그런 중에도 더욱 힘이 들고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소변을 보고 싶을 때였다. 어쩌다 조심스럽게 일어나서 소변을 좀 보려면 한 방울이 나올 때마다


그곳이 마치 예리한 칼로 찢는 듯한 통증이 오기 때문에 소변을 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저절로 나오는 소변을 안 볼 수도 없어서 미 지경이었다. 게다가 어쩌다 소변이 한 방울이라도 나올 때마다 소변과 같이 피가 섞여 나왔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병원에서 12시간을 꼼짝없이 누워있을 때의 고통은 지금 생각하니 아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큰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히야아! 요놈의 요관 결석 수술이 이렇게 어렵고 힘들며 죽을 맛이라니!”     


화장실은 자주 가고 싶고, 그렇다고 소변을 볼 수도 없고 안 볼 수도 없는 비참한 꼴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화장실 앞에 기댄 채 그대로 가만히 서 있게 되었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통증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아 앉을 수도 설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무려 나흘간의 낮밤을 꼬박 새우며 화장실 문에 기대로 의지한 채 서 있게 되었던 것이다. 나에게 그런 고문은 또다시 없었을 것이다. 아마 모르긴 해도 누구나 거짓말이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병원 예약 날짜까지 견디어 내려면 아직도 이틀이나 남았다. 그러나 난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여서 더 이상 참고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병원으로 구원을 청했다. 도무지 견딜 수가 없으니 상태를 다시 좀 확인이라도 해 달라고…….     


그랬더니 이번에는 아주 반가운 대답이 왔다. 그렇게 못 견디게 아프면 오늘 한번 와 보라는 것이었다.     

  

난 그나마 반가운 마음에 지치고 지친 몸을 간신히 이끌고 병원으로 달려걌다. 병원에서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를 맞이하더니 나를 어느 으슥하면서도 비교적 협소해 보이는 방으로 안내했다.       



(3) 세 번째 죽을 고비     


그 방에는 산부인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의자 즉, 산모가 출산용으로 쓰이는 의자와 흡사하게 생긴 의자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순간 난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고통스러운 중에도 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병원에 올 때는 이런 거창한 곳이 아닌 간단한 곳에서 경과만 알아보고 약을 주거나 간단한 치료만 받으면 될 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일은 또 벌어지고 말았다.      


의사 두 명과 간호사 하나가 오더니 팬티까지 벗고 의자 위에 누워 있으라고 하였다. 난 시키는 대로 팬티를 벗고 의자 위에 누워서 처분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벌거벗은 내 아랫도리에는 곧 커다랗고 두꺼운 천으로 덮어졌다.   

   

그것은 중요한 나의 중요한 그 부분만 둥그런 원으로 뚫린 두꺼운 천이었다. 민망하면서도 수치심에 부끄럽기 그지 없었다. 더구나 옆에는 처녀로 보이는 앳된 간호사도 같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는 참아야 한다는 생각에 입을 꾹 다물고 다음 처분만 기다리고 있었다.     

   

난 너무 궁금함을 참다못해 그리고 겁도 나고 궁금하기도 하여 앞으로 어떤 검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리 의사에게 물어보게 되었다.  

   

그러자 의사는 덤덤한 표정으로 어느 쪽에 무엇이 걸려서 통증이 유발하고 있는가를 검사해  보아야 통증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의사 한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요관 어느 쪽에서 결석을 제거해 냈느냐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의사의 그 물음이 너무나 한심하고 답답했다. 수술은 본 병원에서 했으니 당연히 병원 측에서 나보다 더 잘 일일 텐데 나에게 묻고 있는 것이 그건 너무나 엉성한 질문이 아니든가.   

   

그러나 난 왼쪽이라고 순순히 대답했다. 그리고 제발 아프지 않게 마취를 잘 해달라고 하였다. 그랬떠니 잘

알겠다며 엉덩이에 마취제 주사 한 대를 놓았다.     

      

그리고 조금 뒤, 마치 스테인레스처럼 생긴 약 5,60Cm 정도 길이의 대롱을 들고 나의 그것을 손으로 잡더니

난생처음 보는 그것을 요도구를 통해 그 긴 대롱을 끼우고 있었다. 내가 아프다고 몸서리를 치자 마취제 주사 한 대를 더 놓았다.     

 

그리고는 그 긴 대롱 같은 것을 쥐고 이리저리 휘저어 보고 있었다. 왼쪽 요관까지 넣어서 휘저어 보다가 그다음에는 오를쪽 요관으로 넣어 휘저어 넣고 휘젓기를 여러번 되풀이하고 있었다.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의 그것(?)은 흡사 핫도그 모양이 되어 의사가 이리 젓고 저리 휘젓는 대로 흔들리고 있었다. 한참 이리저리 젓고 있던 의사가 고개를 가웃거리며 다시 나에게 물었다. 한심했다.

     

“분명히 왼쪽을 수술했다고 했죠?”     


난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의사는 잘 보이지 않는다며 계속 이리 젓고 저리 젓더니 결국, 다른 의사에게 지시했다. 몇 층에 올라가서 차트를 가지고 오라고.     


그리고는 명령을 한 의사나 차트를 가지러 간 의사나 모두 자리를 비우고 이 방에는 간호사 한 명만 남아 있었다. 난 그대로 극심한 통증이 계속 오고 있는 것을 참아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간호사는 가끔 창밖을 바라보다가 나의 그것(?)을 바라보곤 하여 극심한 통증중임에도 여간 수치스럽고 민망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보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차트를 가지러 간 의사는 그렇게 약 15분이 지나서야 차트를 들고 나타났다. 그동안에도 나 혼자만 고통스러워 쩔쩔 매고 있었지 모두가 태연하고 여유가 있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는 또 다시 다른 의사 한 사람이 급히 왔다.  소위 대한민국에서 가장 이름난 큰 병원이라는 곳이 이 지경이니 참으로 엉성하면서도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트를 자세히 살펴본 의사는 조금 전처럼 다시 긴 대롱을 잡더니 이리저리 휘젓고 있었다.


그러더니 확실하지 않다며 이번에는 간호사를 시켜 어느 층에 가서 엑스레이 사진을 찾아오라고 하였다.


세상에 이런 병원이 어디 또 있을까. 남 몹시 불만스러웠다. 아마 그때만 해도 병원 체계가 그만큼 허술했다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을만 한 것 같다고 느껴보는 순간이었다.      


한참 엑스레이 사진을 들여다 보던 의사는 그제야      


“아아, 왼쪽이 분명히 맞긴 맞는 것 같은데……!”       


하더니 이번에는 그 이상하게 생긴 대롱을 한동안 왼쪽 요관에 쑤셔 넣고 휘젓다가 결국 지금까지 극심한 통증 원인을 불러일으켰던 문제의 물체를 쑥 빼내고 말았다. 그리고는 그것을 내 눈앞에 들어 보이며 설명했다.       


 “아아, 이게 그렇게 말썽이었네요. 이게 꼬여서 살을 찌르고 있었네요.”     


의사가 내밀어보이는 그것은 약 10Cm의 길이쯤 되는 아주 가늘고 빳빳한 용수철처럼, 그리고 돼지 꼬리가 아니면 용수철처럼 꼬불꼬불하게 생긴 플라스틱 같아 보였는데 어떤 재질인지는 지금도 자세히 모른다. 난 지금까지 그런 것이 요관에 끼워져 있었는지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 요관에 있는 결석 수술을 하고 나면 반드시 그것을 요관에 삽입하게 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요관 수술을 할 때 요관에 상처가 많이 나 있어서 소변을 볼 때 소변이 상처 난 곳에 직접 닿게 되면 염증이 일어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내가 통증을 남달리 극심하게 겪게 된 이유는 운이 나쁘게도 어쩌다 그것이 요관에서 흘러내리면서 요도구까지 내려와서 요도구 한 곳을 찌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극심한 통증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결과가 의사의 실수였는지 내 잘못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대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런 걸 모르고 무려 나흘간이나 화장실 앞에 기대선 채 저절로 낫기를 기다리며 그런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니!     


지금 생각해 봐도 그때의 기억은 내 일생일대의 가장 끔찍하면서도 넌덜머리가 나는 고문이었으며 고통으로 각인이 된 채 다시는 돌이켜 생각해 보기도 싫은 추억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난 그 후로 비록 넉넉하게 살아가는 형편은 아니지만, 어쩌다 사람들을 만나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누군가가 천만 금을 준다 해도 그 병만큼은 다시 앓기 않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만일 또다시 그 병에 걸리게 되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자주 하곤 하였다.     


어쨌거나 병원에서 그 웬수 같은 꼬불꼬불하게 생긴 물체를 삐놓고 난 뒤부터는 다행히도 전혀 통증을 모르고 평온한 날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요관 결석이 발생한 뒤부터 약 9~10일간 마치 지옥에라도 갔다가 온 것 같은 악몽 같은 나날을 보내고 나서야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 두 번째 요관 결석 발병     


약 5년 전, 그러니까 처음에 요관 결석이 생겨 그토록 고생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고 끔찍하기만 한데 또다시 그로부터 약 20년 뒤에 다시 요관 결석이 발병하고 말았다.

     

운이 좋은 사람들은 평생 한 번도 걸리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는 병을 두 번이나 걸리게 된 것이다. 결석이 생기자 난 겁부터 나기 시작했다. 또 지난번처럼 죽을 고생을 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동네 병원으로 급히 달려가서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보더니 이번에도 요관 결석이 분명한데 결석이 너무 커서 문제라고 하였다. 이제는 의학이 발달하여 웬만한 결석은 요관 주위를 그냥 두드려서 결석이 부서지는 대로 소변으로 나올 수도 있게 된다는 희망적인 설명을 하였다.     

 

그러면서 엑스레이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내 눈으로 보기에도 마치 눈사람처럼 생긴 커다란 결석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윗부분은 작고 아랫부분은 큰 눈사람 모양 그대로였다.      


병원에서는 일단 두드리는 치료를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설명을 들은 나는 벌써부터 벌벌 떨고 있었다. 또다시 지난번처럼 고통을 받을 바에야 차라리 수면제라도 많이 먹고 당장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병원에 간 처음 날, 난 두드리는 치료를 받게 되었다. 약 3,40분간의 두두림 치료를 받은 뒤에 바로 결석이 어느 정도 부서졌나를 알아보기 위해 엑스레이 촬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석은 조금도 부서지지 않은 처음 그대의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불안하고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통증은 여전히 견딜 수 없이 심하게 오고 있어서 진통제 주사 한 대를 맞고 내일 다시 오기로 하고 병원을 나섰다.          


그다음 날, 오늘은 부디 부서지기를 간절히 비는 마음으로 다시 병원으로 가서 어제처럼 두 번째 두드리는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 결과 또 그대로였다. 의사는 내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해 보고 그래도 안 되면 수술을 해야 된다고 하였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서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마음은 더욱 무겁고 아팠다.  

    

그다음 날, 다시 세 번째 병원으로 갔다. 나로서는 수술을 하게 되느냐 마느냐가 달린 운명의 날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간절히 비는 마음으로 또 약 3, 40분간의 두드리는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다음에는 엑스레이 촬영을 했다. 그 결과 꿈속에서도 그렇게 빌었건만, 야속하게도 그 눈사람처럼 생긴 결석은 조금도 부서지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의사는 바로 큰 병원으로 의뢰서를 써주겠다고 하였다. 난 내일 한번만 더 두드리는 치료를 받아보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을 해보았다. 그러나 의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렇게 세 번이나 치료를 해도 안 되는 것은 네 번을 해봐도 마찬가지라며 결국 의뢰서를 써주고 말았다.   

   

병원에서 나온 뒤 나는 정말 두려운 마음에 울고만 싶었다. 죽기보다 더 싫은 그 끔찍한 수술을 또다시 받을 생각을 하니 기가 막히고 눈앞이 캄캄했다.  끔찍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의 눈에 문득 한의원 건물이 보였다. 언젠가 침을 맞으러 그 한의원에 갔을 때 전신 마사지를 하는 기구가 있었다는 것을 갑자기 떠올렸던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난 곧 한의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온몸이 쑤시고 아파서 전신 마사지를 하고 싶어서 왔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곧 죽을 것만 같은 통증을 이를 악물고 견디어 내면서 전신 마사지를 하게 되었다.


그냥 멀쩡했을 때도 그 전신 마사지기는 전신을 흔들며 두드리는 바람에 너무 아팠다. 하물며 요관 결석으로 인해 통증이 심한 상태에서 전신 마사지를 하자니 이만저만 고통이 따르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난 두 번 세 번 연거푸 살아야 되겠다는 각오로 마사지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건 또 웬 기적 같은 일이란 말인가! 그리고 이런 행운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전신 마사지를 세 번째 하고 난 뒤부터 요관의 통증이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치 봄바람에 눈이 녹듯 통증은 사나브로 점차 사라지는가 했던 약 한두 시간이 지나자 통증을 아예 없어지고 말았다.     

 

참으로 신통하고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이튿날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결석 치료를 받던 병원으로 달려 갔다. 그리고 어제 한의원에 가서 안마를 했다는 말은 하지 않고, 지난 밤에 통증이 말끔히 사라졌으니 엑스레이를 다시 찍고 싶어서 왔다고 하였다.   

   

엑스레이 촬영 결과 의사도 참 신기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큰 결석이 무슨 일로 저절로 말끔히 사라졌는지 모르겠다며 웃고 있었다. 난 그런 의사에게 끝까지 어제 한의원에 가서 마사지를 했다는 말은 끝까지 하지 않았다.    

  

난 다시 해방을 맞은 기쁨에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렇게 해서 나의 두 번째 요관 결석은 기적처럼 쉽게 지나가고 말았다. 나에게는 그야말로 큰 행운이요,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 )          


* 결석에 대한 부끄러운 이야기를 이것으로 마치고  다음번에는 침을 맞으러 여기저기 다니면서 남다른 고생     을 했던 갖가지 경험담을 들려드릴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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