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비극, 그리고 달라진 언어의 비극(64)]
성길 씨가 문득 생각이 난 듯 뜬금없이 아내에게 옛날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당신 김신조 ① 북한공작원 사건 기억나지?”
“얘기만 들어서 대충 알고 있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요?”
“그게 아니라 나도 갑자기 그때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너무 어이가 없고 아찔해서 그러지. 어떻게 기관총을 든 31명이나 되는 무장공비가 한꺼번에 청와대 앞에까지 가도록 아무도 모르고 있었느냐 이 말이야. 1968년 1월 21일 겨울에 일어난 일이니까 벌써 50년이 훨씬 지난 옛날의 이야기가 되었지만 말이야.”
“그건 그렇고 왜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떼로 넘어왔던 거죠?”
“나도 잘 모르지만,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공산당들을 무찌르고 말겠다고 ② 웰남에 파병을 했잖아. 그리고 미국으로부터 신식 무기를 사들였잖아. 그래서 지레 겁을 먹고 먼저 선수를 친 거라고 하더라구. 그리고 그땐 도로에 ③ 차단소도 많았다는데 어떻게 서울까지 들키지 않고 들어오게 되었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때 무장공비들이 도로를 통해서 왔나요. 산과 산을 넘으며 왔으니까 그렇겠지요. 그리고 그때 파주군 법원리 삼봉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던 나무꾼들이 아니었으면 더 큰 일 날뻔 했지 뭐예요. 그 사람들이 다행히 신고를 해서 그나마 일찍 대처하게 된 거 아닌가요?”
“그야 그렇지. 그래서 우리는 곧 ④ 직승기로 정찰을 하게 된 거고. 그리고 우리 국군 복장을 하고 차단소를 그대로 통과했다고 하더라고. 그들이 모두 트럭을 타고 국군 장교복을 입고 있었으니까 차단소에서도 그대로 속아서 무사통과 시켰다고 하더라고.”
“그때 몇 명이 내려왔다고 그랬죠?”
“조선 인민군 124부대 소속 31명이었지. 그리고 격전 끝에 김신조 한 명만 생포하고 두 명은 그대로 북한으로 도주했고, 29명 모두 사살되었던 사건이지.”
“그럼 우리나라의 피해는요?”
“종로 ⑤ 보안부 부장과 대령 한 명 국국장병 24명, 그리고 민간인 4명 등 모두 32명이 사망하고 52명이 부상을 당하는 엄청난 사고였지.”
“정말 대단했네요. 그럼 그때 생포된 김신조는 그 뒤로 어떻게 됐죠?”
“그 당시 김신조는 박정희 대통령 목을 따서 김일성 앞에 바치기로 하고 남파되었다고 하여 모두들 총살을 당할 줄 알았는데 그 뒤로 사상 전향하여 지금은 버젓이 목사로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하더군.”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회개하며 좋은 일을 하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네요.”
“한참 이야기를 하다 보니 목이 컬컬하군. 우리 이쯤에서 ⑥ 미제슝늉 한 잔씩 마셔볼까?”
“네, 알겠어요. 나도 마침 생각이 나던 참인 걸요.”
아내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바로 ⑦ 부엌방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내가 부엌방으로 가자 성길 씨가 벌렁 자리에 누우며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허어, 우린 언제나 ⑧ 하바닥을 벗어날 수 있으려나!‘
주방에서는 이미 아내가 끓이고 있는 커피의 구수한 향이 ⑨ 아랫방까지 진동하고 있었다.( * )
① 남파간첩 ② 월남 ③ 검문소 ④ 헬리콥터 ⑤ 경찰서장 ⑥ 커피
⑦ 주방 ⑧ 더할나위 없이 낮은 생활 처지 ⑨ 거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