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겨울나무 May 28. 2021

아내가 갑자기 이상해졌다

[아무리 천하장사라 해도 건강만큼은 자신할 수 없다]

※ 그 어떤 경우라도 방심은 금물이다. ‘베르티게’는 ‘불행은 오직 방심에서 생겨난다’ 고 하였다.
    그리고 ‘A. 아우구스티누스’는 ‘작은 모래알이 어떤 것인가를 아는가? 그것을 배에 쌓으면 큰 배를
    가라앉힌다’ 고도 하였다.


유비무환!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아무리 미리미리 철저한 준비를 한다 해도 누구나 언젠가는 예기치 못했던 뜻밖의 깜짝 놀랄 만한 날벼락 같은 일을 당하기도 한다. 그것은 누구나 안심하거나 방심할 수도 없으며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할 수도 없는 일이다.  

    

내가 바로 이번에 그런 아찔하고도 황당한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하마터면 큰 불행을 당할 뻔한 경험이었기에 이 글을 통해 누군가에게는 조금이라도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일기 형식으로 시작해 보려 한다.   






아내는 나보다 여덟 살 아래인 금년에 일흔두 살이다.    

  

아내는 나이가 제법 많은 편이긴 하지만, 그 나이가 되도록 지금까지 나보다 잔병치레도 별로 없이 매우 건강하게 살아온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어쩌다 두 사람이 어디 볼 일이 있어 같이 걸어갈 때에도 아내는 절대로 내 뒤를 따라오는 법이 없다. 난 오래전부터 허리와 다리의 지병이 있어서 잘 걷지를 못하지만, 아내는 나보다 항상 저만큼 앞서서 젊은이들 못지 않게 발걸음도 가볍게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사뿐사뿐 앞서서 혼자 잘 걷곤 한다.  

     

아내는 천성이 워낙 활동적이어서 잠시라도 짬이 나면 집 안 청소, 빨래 음식 장만 등, 일을 만들어서 하는 성격이어서 잠시도 자리에 앉아 있지를 못하는 동적인 사람이다.


그런 아내 덕분(?)에 가정 분위기는 한 마디로 차분하고 안정적이지 못하고 항상 어수선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난 그런 아내와는 정반대이다. 어렸을 때부터 저녁형 인간이기에 아침에는 어지간한 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일어나지를 못한다. 가령 누가 매로 때린다 해도 차라리 그대로 매를 맞을지언정 좀처럼 일어나지를 못하는 특별한 습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아내는 그렇지 않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집 근처 낮은 산을 혼자 등산하고 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그리고 아내가 산을 올라갔다 온 뒤에야 겨우 일어나서 차려놓은 늦은 아침을 같이 먹곤 한다.

     

난 가끔 독서를 즐기는 편이지만, 아내는 책과는 거리가 멀다. 오죽하면 언젠가는 한번  이 책은 아주 감동적인 책이라며 아무리 읽어보라고 권해 보았지만,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아예 흥미가 없다며 책 표지부터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어떤 책이든 5분만 읽다 보면 저절로 눈이 감긴단다.


참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상한 병이다. 책만 펼치면 잠이 온다니 효과가 탁월한 수면제가 따로 필요 없을 것 같다.     



 

해마다 봄이 오면 아내는 그 누구보다고 신바람이 나고 생기가 난다. 나물 캐는 일을 몹시 좋아해서 냉이며 달래, 씀바귀, 미나리, 쑥, 뽕잎, 두릅, 돈나물 등, 나물이란 나물은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모조리 캐러 다니기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오후부터 밤중까지는 한 보따리 캐온 나물들을 다듬고 삶고 말리기에 바빠서 집 안 분위기가 늘 어수선할 수밖에 없다.

      

어디 그뿐이랴. 해마다 4월부터는 집에서 자동차로 10분 정도 달려가면 그리 높지 않은 산에 튼실하게 솟아올라오는 고사리가 많이 자란다. 아내는 이틀이 멀다 하고 고사리 꺾으러 가자고 자주 졸라대기도 한다. 아내는 운전을 못하기에 고사리를 꺾으러 가자고 조를 때마다 난 전용 기사가 될 수밖에 없다.   

    

고사리를 꺾어오고 이틀이나 사흘이 지나면 다시 고사리가 새로 솟아올라온다. 그러기에 이틀이 멀다하고 또다시 가자고 졸라댄다. 내가 좀 바쁜 일이 있으니 오늘은 좀 쉬고 다음에 가자고 해도 그런 말은 우이독경이며 귓등에도 들리지 않는다. 네가 바쁠 게 뭐가 있느냐는 눈치다. 그저 아내에게는 그 어떤 일보다도 급한 일이 고사리나 나물을 캐러 가는 일만이 최우선인 것이다.      




아내는 낚시도 좋아한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곳에는 작은 강이 있다. 그러기에 나물을 캐러 가지 않는 날에는 낚시를 하러 가자고 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생기는 것은 별로 없이 그렇게 정신없이 바쁠 수가 없다.     

 

그렇던 아내가 갑자기 달라졌다


지난 2021년 5월 3일, 그날은 미나리를 캐러 강가로 가자고 하였다. 틈틈이 돈나물을 뜯어온 게 많이 있는데 미나리까지 넣어 돈나물 김치를 만들면 더욱 맛이 있다며 가자고 하는데 용빼는 재주가 없다. 보나마나 이번에도 또 나에게 기사 노릇을 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아내와 같이 자동차를 몰고 강가로 갔다. 아내의 말대로 미나리는 제법 많았다. 한동안 미나리를 뜯더니 뜯을 만큼 뜯었는지 그만 집으로 가자고 하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날 저녁때부터 아내가 머리가 아프다며 이마에 손을 자주 대며 오만상을 찡그리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난 잠깐 그러다가 나으려니 하고 우선 집에 있는 두통약 타이레놀을 한 알 먹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말끔하게 나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다음 날에도 여전히 머리가 아프다고 하였다. 난 다시 타이레놀을 먹어보라고 하였다. 약을 먹고 나더니 또 그런대로 괜찮아진 것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다음 날도 다시 머리가 아프다고 하였다. 할 수 없이 이번에는 동네 내과로 같이 가서 아내의 증세를 설명하게 되었다.      


증세를 들어본 의사는 대부분 두통의 원인은 주로 90% 이상이 편두통이나 긴장성 두통이니 큰 걱정말고 우선 약을 처방해 주며 먹어보면 가라앉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복용해 보았지만 타이레놀보다 효과를 전혀 느낄 수 없다며 여전히 아파서 쩔쩔 매고 있었다.      




난 거의 거의 5,60년간이나 긴 세월을 원인 모를 두통에 시달리며 진통제로 그날그날을 살아온 두통에는 일가견이 있는 경험자의 한 사람이다. 그러기에 저러다가 언젠가는 슬그머니 나으려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기에 다음 날에는 약국에 가서 아내의 증세를 설명하고 약을 다시 지어다 복용해 보았다. 그래도 전혀 듣지를 않고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한의원에 가서 약을 지어다 복용해 보았다. 증세를 들어본 한의원에서는 틀림없이 감기 기운 때문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약을 먹고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쓴 다음 땀을 흠뻑 쏟아내고 나면 개운해질 것이라고 하였다.     

 

한의사의 말대로 약을 먹고 땀을 흠뻑 흘리게 해보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결과는 여전히 차도가 없었다. 그런데 그 뒤로 아내에게 이번에는 더욱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난 지병이 있어서 식사 전에 미리 복용해야 할 약이 있어서 그 약을 먹으려고 약을 꺼내자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던 아내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펄쩍 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아까 밥 먹기 전에 약을 먹었는데 왜 또 약을 먹어요?”     


난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아직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으니까 미리 약을 먹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아내는 다시 펄쩍 뛰면서 조금 전에 아침을 먹었는데 무슨 아침을 또 먹느냐며 오히려 의아해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그 순간 아하, 이게 바로 치매의 초기가 오는 게 아닌가 하는 예감에 가슴이 그만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세상에 암보다 더 무서운 병이 치매라고들 하던데…….   

 

난 갑자기 불안한 마음에 조용히 아내 곁으로 가서 어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오늘 날짜, 요일 등, 이런저런 것들을 천천히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답하는 것마다 모두가 맞지 않고 엉터리였다.


이런 변이 또 있나! 난 더욱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여전히 정수리 부분(전두엽)과 뒷덜미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고 하였다. 정말 점점 더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2,3일이 지난 뒤, 이번에는 그 소문을 들은 자식들이 급히 달려왔다. 그리고 아내와 조심스럽게 대화를 해보고 나더니 슬그머니 나에게 오더니 하나같이 머리를 흔들며 치매에 걸린 게 틀림없는 것 같다고 하였다.


물론 아내에게는 최대한 안심을 시키며 누구나 머리가 아프면 순간적으로 그럴 수 있다며 전혀 치매 비슷한 말도 꺼내지 않고 전혀 그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2,3일 뒤, 자식들이 서둘러 큰 병원에 예약해놓았으니 그곳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자고 서두르고 있었다. 난 그런 자식들이 마냥 고맙기 그지없었다.      



드디어 큰 병원으로 가다     


드디어 5월 11일(화)      


아내가 두통을 호소하기 시작한 지 약 9일 만에 아이들과 같이 서울에 있는 제법 큰 병원으로 진찰을 받으러 가게 되었다.


당초에는 서울 삼성병원으로 갈 생각이었으나 그 병원은 내년에나 예약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세브란스나 서울대학교 병원 등은 7월 이후에나 예약이 가능하여 그나마 가장 빠른 병원으로 예약을 잡게 된 것이다.      

 



병원에 예약된 시간은 오전 11시였다. 병원으로 가면서 나는 오래전의 지난 일을 떠올리며 가만히 회상해 보고 있었다.    

 

나 역시 5,60년 가까이 거의 평생 가깝게 두통으로 시달려본 사람이다.


그러기에 그 옛날 80년도 초, 어느 날, 머리가 두 쪽이 나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두 눈이 곧 튀어나올 것처럼 아프고 충혈이 되는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세브란스로 MRI 촬영을 하러 간 적이 있었다. 그땐 MRI 가 처음 보급되었을 때여서 큰 기대를 가지고 수십 년간 두통을 앓다가 큰마음 먹고 MRI 검사를 하러 갔던 것이다.      


그날, MRI 촬영을 무사히 마치고 다시 1주일이 지나서야 결과를 보는 날, 막상 오늘은 마침내 두통의 원인이 밝혀질 것이라는 큰 기대를 가지고 갔으나 결과는 뇌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혹자는 이상이 없다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하겠지만, 난 그게 아니었다. 실망이 컸다. 그렇게 안구가 모두 쏟아져 나올 것처럼 두통이 심할 때 촬영을 했는데도 정상이라니? 그럼 난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원인을 알아야 두통을 고치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닌가!  참으로 답답하고 난감했다.     


그때의 기억을 돌이켜 더듬어 회상해 보면서 과연 오늘 병원에서 MRI 촬영 결과 원인이 밝혀질 것인가, 그리고 치매는 여간해서는 MRI 로는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았기에 미리 그런 걱정부터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약된 11시, 드디어 예정대로 간호사의 호명 소리에 얼른 진료실로 들어가게 되었다.      

진료실로 들어가자 의사가 아내에게 이것저것 묻고 있었다. 아내는 의사의 물음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여전히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대신 대답해 주기도 하였다. 그렇게 불과 3,4분간 가량 머물렀을까, 결국 MRI 촬영부터 해보자고 하였다.   

   

난 급한 마음에 오늘 촬영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의사는 그런 건 밖에 나가서 간호사에게 물어보라는 대답만을 듣고 쫓기듯 진료실을 나오게 되었다.  

    

진료실에서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간호사가 어디로 가라고 안내해 주었다. 안내해 준 곳은 수간호사실인 것 같았다. 수간호사는 곧 MRI 촬영 날짜와 결과를 보러 오는 날짜를 마치 녹음기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기계적이며 사무적으로 안내해 주고 있었다.


설명해주는 속도도 마치 보험회사 광고처럼 어찌나 빠른지 얼른 알아듣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정확한 것은 촬영 날짜였다. 6월 21일이 촬영 예약 날짜가 잡히고 그 결과는 다시 6월 30일이라 했다. 이건 너무 했다.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당장 두통으로 쩔쩔매고 있는 위급한 환자를 거의 40일 후에 촬영을 하고 그 결과는 다시 열흘 뒤에나 알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다시 물어보게 되었다. 사정이 급한데 조금 더 빨리 촬영해 줄 수 없느냐고…….     


러나 그는 묻는 사람의 얼굴도 바라보지 않은 채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고…….    

   

같은 말이라도 어쩌면 이렇게 인정머리가 없고 태연하게 하고 있을까? 자신의 부모가 그렇게 아플 때도 그렇게 태연할까? 문득 백의의 천사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았다. 냉혈 인간이 따로 없었다. 진료비 2만4천여 원만 내고 쫓겨나듯, 그리고 허탈한 기분으로 병원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만 가면 급한 일이 해결될 줄로만 알았는데 결국 불안감만 더 풍선처럼 커지고 말았다.   

   

허탈한 상태로 그대로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앞으로 MRI 촬영을 하기 위해 40일에 가까운 날을 이대로 집에서 견딜 수는 없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크게 벌어지고야 말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에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날 오후, 한동안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곰곰이 생각하던 중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바로 내가 오래 전에 홍제동에 살 때 가끔 갔던 곳, 바로 녹번동에 있는 한국영상의학과의원(종전, 한국방사선과의원)이 머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난 급히 그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를 해보니 반갑게도 13일(모레) 오전 11시에 올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난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바로 가겠다고 대답했다. 답답하다 못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 어디에 또 있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다시 하루가 지나고 5월 13일 오전 11시.     


서둘러 한국영상의학과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 MRI 촬영이 시작된 지 약 30분 만에 촬영이 끝나고 12시쯤 되자 판독이 끝났다며 설명을 들으라고 안내하기에 혹시나 치매 진단이라도 나오면 어찌해야 하는 불안하고 궁금한 마음이 고조된 상태로 원장실로 들어갔다.   

   

원인은 예사 두통이 아닌 뇌출혈이었다

 


원장실로 들어가자마자 원장이 아내를 바라보며 언제 머리에 충격을 받은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내는 전혀 그런 적은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원장이 MRI 화면을 가리키며 심각한 표정으로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현재 뇌에 출혈이 심해서 그 출혈된 피의 양이 너무 많아 그 피가 뇌를 누르고 있어서 뇌가 한쪽으로 쏠려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피가 조금만 더 뇌를 압박하면 뇌의 손상이 와서 바로 사망하게 된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직까지 뇌는 다치지 않은 것 같댜고 하였다.


그리고 지금 어물어물하고 있을 시간이 없으니 당장 응급실로 가라며 진료의뢰서를 써

주었다.   

   

뇌출혈이라니?


이런 청천벽력같은 일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일은 어찌 됐든 그나마 원인을 시원하게 발견하게 되었으니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아찔했다.      

 

우리는 바로 집에서 다니기가 용이한 일산 백병원 응급실로 들어가기로 마음을 정하고 급히 일산으로 향했다. 응급실로 들어가기 전에 음식점으로 가서 우선 점심을 시켰다. 도가니탕이었다. 아내는 입맛이 없다며 평소에는 가끔 그 집 도가니탕이 입맛이 당긴다며 전에는 그렇게 잘 먹더니 그날은 겨우 몇 숟갈 뜨고는 아깝게 그대로 남기고 그 집을 나왔다.  



   

음식점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바로 백병원 응급실로 들어가서 일단 접수를 하였다. 그때가 정확히 오후 1시 반경이었다. 응급실로 들어가면 곧 어떤 조치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들어간 응급실 역시 모든 일이 척척 해결되는 곳은 아니었다.    

아픈 사람들, 그리고 응급환자가 왜 그렇게 많은지 응급실 역시 환자와 보호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며 북적이며 자기 차례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아파 대기실 한쪽에 엎어진 채 신음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119구급대로 실려 와서 침대에 누운 채 의식을 잃고 생사의 기로에서 마냥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     


그렇게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약 두세 시간을 기다려서야 겨우 우리 차례가 되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차례는 되었지만, 아내만 ‘집중치료실’이라는 곳으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그다음부터는 다시 무슨 응급조치를 하고 있는 중인지, 한마디 설명조차 없어서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답답해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보호자는 마냥 응급실에 있는 대기실에서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설명을 해주는 사람도 없고 답답함을 견디다 못해 물어봐도 모른다고만 하였다. 그렇다고 어딜 잠깐 가고 싶어도 갈 수도 없었다. 어딜 나간 사이에 갑자기 보호자를 부를 것만 같기 때문이었다. 그런 중에도 응급환자는 속속 꼬리를 물고 들어오고 있었다.


세상에는 왜 그렇게 아픈 사람들이 많은 것인지!     


그러기에 배가 몹시 고파도 마음대로 밥을 먹으러 나갈 수도 없었다. 병원에서 언제 어느 때 갑자기 보호자를 부를지 모를 일이어서 저녁때가 넘었지만, 밥도 못 먹고 쫄쫄 굶은 채로 그저 불안하고 답답하고 초조한 상태로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결국, 13일 오후 1시 반경에 응급실로 서둘러 왔지만, 14일 새벽 1시 반경이 되어서야 겨우 8층 입원실로 들어가게 되었다. 아내는 곧 MRI 촬영도 해야 하고 어쩌면 바로 수술도 하게 될 수 있다며 금식이라며 물 한 모금도 마시면 안 된다고 하였다.    

  

코로나 때문에 보호자는 단 한 명만 허용되었다. 다른 가족들은 환자를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다. 보호자가 간병 교대를 하려면 코로나 검사를 한 뒤에 음성일 경우, 하루나 이틀 뒤에나 교대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코로나 검사 결과 음성이 나왔다 해도 48시간만 유효하기 때문에 간병 교대를 하려면 다시 검사를 받아야 하고 그다음 날에나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간병 교대하기도 여간 까다롭고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러기에 아무리 간병을 할 수 있는 가족이 많다고 하여도 마음대로 교대를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별다른 특이 사항이 없이 무작정 응급실 대기실에 앉아서 기다리다 보니 이미 자정이 넘어 새벽이 되고 말았다. 배가 몹시 고팠지만, 그땐 이미 모든 음식점들도 이미 모두 문을 닫은 상태여서 요기를 하러 어디로 갈 곳도 없었다.      


구내 음식점도 마찬가지였다. 편의점으로 갈까 하다가 너무나 지쳐 걷기도 귀찮아서 미리 가지고 다니던 빵 몇 조각으로 겨우 끼니를 해결하고 말았다. 그리고 입원실에서 꼼짝도 못한 채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다. 남달리 신경이 민감해서 조그만 잡음만 들려도 잠을 못 자는 성격이었기 때문이었다.  


14일 새벽이 밝았다. 


그러나 날이 밝았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또 다시 피곤함을 무릅쓰고 기다림의 연속이 시작되었다. 응급실로 들어오면 어제 바로 곧 어떻게 문제가 해결되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병원 측에서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만, 보호자 입장에서는 응급실이 응급인 줄 알았더니 그곳 역시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완행열차였다. 답답하다 못해 짜증스러웠다. 역시 아픈 게 죄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 8층 병동은 코로나 선별 검사결과가 나오지 않은 사람들만 임시로 수용하고 있는 수용 병동이었다. 그리고 오늘 코로나 검사결과가 나와야 정식 병동으로 다시 옮기게 된다고 하였다.       


5월 14일 아침이 밝았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했던가.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난 혼자 부근에 있는 콩나물 해장국집으로 가서 하룻만에 겨우 아침을 해결했다. 병원을 출입할 때마다 코로나 때문에 그때마다 일일이 검사를 받아야 하고 여간 번거롭고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오후 2시경 드디어 의사가 나를 불렀다


그리고 서약서를 작성하고 사인을 하라고 하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뇌가 손상을 입지 않아 머리를 절개하지 않고 일단 머리에 동전 만한 구멍을 뚫은 다음 관을 집어넣고 튜브를 달아 피가 나오게 하는 수술이라며 출혈이 너무 심해 수술 중에 사망할 수도 있다는 서약서였다.     

 

드디어 수술을 받다      


14일 오후 1시반


어제 코로나 선별검사 결과가 문자로 왔다. 아내와 나 모두 음성이었다. 그제야 8층 임시 대기 병동에서 7층 병상으로 옮겨주었다. 7층은 신경과 병동이라고 하였다.


7층으로 내려와서 다시 MRI 촬영을 하기 위해 또 기다리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오후 4시가 되어서야 겨우 차례가 되어 MRI 촬영실로 가서 촬영을 하게 되었다.       

 MRI 촬영이 끝나자 곧 5시에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전광판을 바라보니 1시간 가까이 수술이 진행된 뒤 회복실로 갔다가 6시 20분경에 나왔다.


머리는 온통 붕대로 감겨져 있고 구멍을 낸 머리에는 호스가 달려있었다. 호스 끝에는 머리에서 피가 나오는 대로 쌓이는 풍선처럼 생긴 사각형 모양의 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양쪽 손과 팔에는 영양제와 진통제 등, 주사기가 달린 줄이 여기저기 복잡하게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수술실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X-rey 촬영을 하였다. 그리고는 바로 입원실로 옮겨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의식이 돌아와서 묻는 말에 조금씩 대답을 하고 있었다.     

 

5월 15일 아침,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환자는 꼬박 이틀을 굶은 뒤에야 죽이 나왔다. 아내는 입맛은 없었지만, 먹여주는 죽을 억지로 먹기 시작했다. 살아서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입맛이 없어도 억지로라도 먹어야 한다며 일어날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고마웠다.    

  

입원실로 들어온 뒤부터는 소변이나 대변 배설량을 그때마다 측정해서 기록해 달라고 하였다. 섭취하는 밥이나 그 밖의 간식 하나라도 모두 적으라고 하여 신경이 쓰였다. 머리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으며 팔에는 여전히 여러 가지 주삿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렇게 다시 이틀을 죽만 먹던 환자가 죽만 먹으니까 기운이 없다며 밥을 먹겠다고 하자 밥이 나왔다. 먹히지 않는 밥을 억지로 조금씩 입으로 꾸역꾸역 구겨 넣고 있었다.       

나흘이 지나자 그만하면 피가 제법 많이 나왔다며 머리에 달린 호스를 제거하며 더 두고 보자고 하였다. 그리고 이틀 만에 한 번씩 머리 수술 부위를 소독해 주곤 하였다. 머리가 흔들리면 안 된다며 걷는 일도 삼가라고 하였다.


그렇게 1주일이 지나자 팔에 달려 있던 링거 등 모든 줄도 뽑아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상태를 봐야 한다며 이틀이 멀다 하고 CT 촬영을 하면서 관찰하고 있었다.      


수술 후의 나의 좁은 소견      


나의 좁은 소견으로는 오늘날 의학 기술이 아무리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해도 아직 먼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곤 하였다.      


첫째, MRI를 그렇게 수차례 찍었으며, 또한 그래서 머리에 피가 어디어디에 고여 있는가를 발견했다면 호스를 넣고 피가 있는 곳을 이리저리 옮기며 흡입해서 쉽게 뽑아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랑 호스 하나만 꽂아놓고 피가 며칠을 두고 저절로 흘러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나의 좁은 소견으로서는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답답한 나머지 의사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보았더니 그렇게 하려면 머리를 절개해야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다음에는 어디서 혈관이 터져서 출혈이 되었는가를 알아서 그곳을 막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것을 원한다면 그 역시 절개를 해야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결국, 수술은 하였지만 앞으로 어느 곳에서 다시 출혈이 될지 모른다는 결론이어서 여전히 불안하기만 하였다.       


둘째, 누구나 건강을 장담할 수는 없다. 그토록 건강했던 아내도 어느 날 갑자기 두통을 호소하기에 예사로 알고 그냥 나으려니 했더니 알고 보니 단순한 두통이 아니라 뇌출혈이 아니었던가!      


누구나 건강 앞에서는 장담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의사는 언제 머리를 심하게 부딪친 적이 없느냐고 몇 번이고 묻곤 하였다. 그런 건 절대로 아니었다.


그러기에 이번의 경우, 누구나 흔히 겪을 수 있는 예사 두통이려니 하고 만일, 먼저 예약한 병원에서 MRI 촬영을 6월 21일 예약한 날까지 두통약만 복용하며 서두르지 않고 마냥 기다렸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사이에 큰일을 당했을 수도 있는 아주 특별하고도 아찔하면서도 값진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또 어떤 일이 생기게 될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며 아직도 그 불안한 나날은 지금 이 시각에도 끝나지 않은 채 진행형인 것이다. ( * )            

매거진의 이전글 운전대 잡기가 겁난다(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