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언 60년 전의 이야기이다. 난 지금도 가끔 학창 시절의 그 여학생의 모습과 행동이 문득 머리에 떠오르곤 한다.
그때 그 여학생은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누구나 글을 쓰거나 그 밖의 어떤 일을 열심히 하다가 갑자기 일의 진척이 더디거나 싫증이 나서 싫을 때가 종종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럴 때가 있다. 그런데 그때마다 이상하게도 문득 그 여학생의 모습과 행동이 저절로 떠오르면서 잠시 흐트러졌던 마음을 다시 추스르며 나도 모르게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 여학생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잠깐 나태해졌던 마음에 새로운 힘이 솟아오르며 나 자신도 모르게 새로운 긴장과 채찍의 역할을 해주게 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그 여학생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은 대학 시절이었다.
그 학생을 만났다고는 하지만, 단 한번도 서로 눈인사를 나눈다거나 간단한 말 한마디조차 나누어 본 적도 없다. 그저 가끔 학교에 오가는 길에 서로 마주치거나 고작 먼 발치에서 걸어가는 모습만 보았을 뿐이다.
더구나 그 여학생은 나와는 배우고 있는 과가 달랐다. 그는 음악과를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학생과 그렇게 말없이 지낸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학생들 모두가 다 그랬었던 것 같다.
소문에 의하면 남학생들만 그런 게 아니라 그와 같은 과에 다니는 여학생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고 늘 혼자 다니며 혼자 조용히 지내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내가 가끔 그 여학생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남달리 미모가 뛰어나게 아름답거나 이성 간의 어떤 특별한 관심이 있어서 그런 것은 전혀 아니었다.
가령 관심이 있었다 해도 아마 그 여학생은 감히 나 같은 별볼 일 없는 하찮은 학생과는 상대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 불을 보듯 뻔했으리라.
그 여학생은 보통 학생들과 달리 특별히 다른 점이 너무나 많았기에 누구나 더욱 특별하게 보였으리라 생각한다.
우선 그 여학생은 다른 학생들에 비해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나이가 많아도 너무 많아 보였다. 아마 얼른 보기에도 30대 중반쯤은 되었지만, 아직 미혼이라고 하였다.
그 학생은 몹시 조용하면서도 모든 행동거지가 남달랐기 때문에 나 같은 보잘것없는 학생은 감히 말조차 건네기가 어려울 정도로 우러러 보이기도 하였다.
그가 나이가 그렇게 많도록 미혼인 것은 오직 음악에 대한 학구열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기에 그는 이미 놀랍게도 이른바 명문 대학 음악과를 두 곳이나 졸업한 다음에 다시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에 입학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 번째 우리 학교를 다시 다니고 있는 대단한 학생이었다.
그가 우리 학교에 다시 입학하게 된 것은 아마 그 당시에 우리 학교 교수진들이 너무나 유명한 사람들이 있어서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음악과 교수로는가곡 ’바위고개‘를 작곡한 이흥렬 교수, 그리고 ’가고파‘를 작곡한 김동진 교수가 재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창과 교수로는 김동리 소설가와 박목월 시인 등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쟁쟁한 교수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 여학생은 행동 또한 남달랐다. 그는 혼자 조용히, 그리고 얌전히 길을 걸어갈 때마다 늘 알 수 없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항상 미소 띤 표정으로 조용히 다니고 있는 모습이 왠지 인상적이었다.
내가 그 여학생을 지금까지 더욱 잊지 못하는 것은 그 여학생의 특별한 행동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책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학생들이 별로 없었다. 책가방이 없는 대신 대부분 책과 대학노트를 손에 들고 다녔다. 아마 그것도 한때 유행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여학생 역시 항상 몇 권의 책과 노트를 한쪽 팔에 든 채 가슴에 꼭 안고 다니곤 하였다. 그리고 그 여학생의 특별한 행동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그리고 그의 그런 행동을 은근히 본받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지금까지 그를 잊지 못하게 된 솔직한 이유였들 것이다.
그는 조용히 콧노래를 부르며 길을 가다가도 문득 어떤 악상이 떠올랐는지 땅바닥에 오선지를 펼쳐놓고 급히 악보를 그리다가 벌떡 일어나서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던 길을 걷곤 하였다. 누군가가 보면 꼭 미친 사람 같은 행동이었다. 맞는 말이다. 음악에 미친 것이 틀림없었다.
어떤 때는 땅바닥에서 또 어떤 때는 어느 집 대문이나 악보를 그리기 편한 계단 등에서 악보를 그려나가는 모습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얼마나 음악에 도취되어 있으면 길을 가다가도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그와 같은 행동은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문득 어떤 글의 소재와 구상이 떠올랐을 때 메모를 하듯이 그때그때 메모를 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아 안타까워 할 때가 있지 않던가!
아무튼 그 여학생의 행동과 그런 특이한 태도, 그리고 음악에 불타는 열정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본받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아무튼 대단한 여학생이라는 생각에 지금도 그를 좀처럼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나 자신이 조금 나태해질 때마다 그 여학생 생각을 돌이켜 생각해 보며 나 자신에게 스스로 채찍질을 해보곤 한다.
난 가끔 그 여학생 생각을 하며 이런 생각을 해보곤 한다.
지금쯤 그 여학생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마 지금쯤 우리나라 아니, 세계적인 음악가로 맹활약을 하고 있지 않을까. 가령 그렇게 유명한 인사가 되었다 해도 그 여학생의 이름조차 모르니 안타깝게도 전혀 그 후 소식을 알 도리가 없다. 그리고 그의 나이 이미 90이 훨씬 넘었을 테니 모르긴 해도 이미 오래 전에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집념을 불태운 대단한 사람들
♣ 아동문학가 이원수 선생의 일화
평생 아동문학에만 몸을 바친 이원수 선생은 그의 나이 6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 하였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병원 침상에서 임종하기 20분 전까지 지독한 고통을 이겨내며 글을 썼다고 한다. 이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단 한 줄이라도 더 남겨보고 싶은 그의 욕구와 글에 대한 집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난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감동스럽고 존경스러운 마음에 그 이야기를 언젠가 가까이 지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그리고는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처럼 크게 감동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난 사람들의 반응은 그게 아니었다. 뜻밖이었다. 곧 죽을 사람이 매쳤다고 그런 와중에 그까짓 글 하나를 더 이 세상에 남겨서 무얼 하느냐며 미친 사람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이었다.
어찌 같은 사람들인데 감정과 생각이 이토록 다를 수가 있단 말인가!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다음부터 다시는 이원수 작가의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나만 바보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 추리소설의 거장 김성종 작가의 일화
김성종 작가는 오래 전에 ’국제열차살인사건‘이란 추리소설을 상하권으로 낸 적이 있다.
실로 실감이 나고 손에 진땀이 나게 하는 박진감이 절로 나는 걸작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소설의 무대는 스위스의 ’취리히‘였다. 작가는 그 장편 소설 하나를 쓰기 위해 보통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참으로 많은 고생을 몸소 겪어가며 썼음을 알 수 있 었다. 그 소설을 쓰기 위해 스위스의 ’취리히‘를 무려 여섯 차례나 직접 가서 직집 열차도 타보고 많은 취채를 하면서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다는 뒷 이야기이다.
그런 걸 보면 뛰어난 걸작을 쓰기 위해서는 직접 움직이며 써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 었다. 그저 방 안에 편안히 가만히 앉아서 상상만으로 글을 쓴다면 절대로 그런 실감나는 글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 어느 시나리오 작가의 이야기
오래 전, 어느 시니리오 작가의 이야기이다. 그가 앞으로 쓸 시나리오의 배경은 주로 채석장이 나온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이 몸소 체험을 한 다음에 글을 쓰기로 유명한 작가였다. 그러기 에 그냥 상식적으로 채석장에 가서 취재를 하고 난 뒤에 시나리오를 쓰는 게 아니었다. 채석장에 몇 달간 직접 취업을 하고 그들과 함께 힘들게 일하고 먹으며 그들의 생활상을 파악한 뒤에야 비로소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사창가가 나오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직접 사창가에 가 서 며칠간 그들과 같이 동거도 하고 살아본 뒤에야 글을 썼다고 한다.
역시 글이란 가만히 앉아서 써지는 것은 아니란 생각을 해보게 된다. 어쨌든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 신춘문예에 목숨을 걸었던 친구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기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뒤, 깜짝 놀랄 만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 놀랄만한 소식이란 대학 동기 중에 한 친구가 머리를 삭발하고 절로 들어갔다는 소문이었다. 그가 절로 들어간 사연은 소설을 써서 신춘문예에 응모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혹자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라면 집이나 도서관 같은 곳에 가서 쓰면 될 게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친구는 그렇게 하다가는 이 사람 저 사람과 본의 아니게 자주 접축을 하게 된 것을 염려해서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것 같다. 한마디로 시간이 아까웠던 것이다.
그게 바로 보통 사람들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대단한 집념이며 결심이란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그렇게 10년 동안 틀어박혀 신춘문예에 응모하다가 10년 뒤에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자살을 하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절로 들어갔다고 한다.
과연 신춘문예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토록 목숨과 바꿀 정도로 대단한 것일까!
그 친구에게는 소설과 신춘문예가 인생의 전부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친구가 10년 뒤에 과연 그 사람이 뜻을 이루었는지, 아니면 자살을 하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 바르고 정확한 문장에 집착하던 친구
이 이야기는 전에도 잠깐 소개했던 글이다.
대학 시절 어느 친구 하나가 여름방학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 히 글을 썼다고 한다. 대학교에서 여름방학이란 두 달이란 긴 기간 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두 달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썼다는 글은 고작 대학 노트로 두 줄 뿐이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한번 썼던 글 을 또 읽어보고 다시 정정하고 다시 쓰고를 거듭한 끝에 마지막으로 정리해서 정서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의 설명을 듣고 난 많은 것을 느끼고 반성하게 되었다.
아아! 글을 쓸 때 이처럼 자신이 ’쓴 글을 또 읽고 또 읽으면서 가장 어울리는 말, 가장 적합 한 말을 찾고 또 찾으며 글을 쓰는 친구도 있 구나!‘ 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