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그때는 지금 같으면 감히 상상도 못할 정도로 배꼽을 잡고 웃지 않으면 안될 일들이 심심치 않게 많이 벌어지곤 하였다. 그 몇 가지 재미있는 예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 쥐잡기 운동
그 시절에는 쥐 떼들이 너무 많아 일반 국민들은 물론 국가적으로도 큰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쥐 떼들은 논과 밭에 농민들이 애써 가꾸고 있는 곡식이란 곡식은 모두 갉아먹거나 훑어 먹었음은 물론 채소까지 남아나는 게 없었다.
들판뿐만이 아니었다. 쥐 떼들은 집안까지 쳐들어와서 잘 간직해 둔 곡식은 물론이고 부엌까지 들어와서 저희들 마음대로 활개를 치며 다니곤 하였다. 이를테면 집안이 그들의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운동장이며 그들이 집주인 행세를 하여 주객이 바뀐 시절이었다.
부뚜막에 둔 음식은 물론이고 찬장에 둔 반찬거리도 이리저리 다니며 모두 먹어치우곤 하였다. 장롱이나 궤짝도 있는대로 그들의 이빨로 갉아놓곤 하여 남아나는 게 없었다. 밤에도 쥐들이 요란스럽게 돌아다니는 바람에 잠을 제대로 이룰 수도 없었다.
쥐들이 그렇게 어디나 활개를 치고 다니며 먹을 것이란 먹을 것은 모두 휩쓸어 가는 바람에 사람들은 애써 장만한 음식 모두를 그들이 먹다 남은 것만 얻어먹을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그것은 결국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국가에서도 이를 보고 견디다 못해 급기야 쥐잡기 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범죄와의 전쟁이 아닌 쥐와의 전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우선 집집마다 쥐약을 놓거나 쥐덫을 이용하여 쥐 섬멸 작전에 만전을 기하기에 이르렀다. 쥐약과 쥐덫은 읍내 장에 가면 어느 가게에서나 팔았다. 그렇게 해서 각 가정마다 잡은 쥐들을 여기저기 아무 데나 버리곤 하였다.
어쩌다 동네 개울이나 길을 거닐다 보면 죽어 자빠진 쥐들의 시체가 너저분하게 눈에 띄기도 하였다. 그렇게 각 가정마다 잡고 또 잡아도 쥐의 숫자는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수많은 쥐 떼들이 극성을 부렸던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학교 학생들에게도 불똥이 튀게 되었다. 집에서 매일 쥐를 잡는 대로 꼬랑지를 잘라서 가지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쥐꼬리를 가지고 가는 게 학과 숙제보다 더욱 중요한 숙제가 되었던 것이다.
학생들은 각각 집에서 쥐를 잡는 대로 쥐꼬리를 잘라서 학교로 가지고 가는 일이 큰 일과 중의 하나가 되고 말았다. 선생님은 학생들이 가지고 간 쥐꼬리를 일일이 세어 수첩에 적어놓곤 하였다. 그렇게 적어 놓았다가 아마 성적에 반영하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쥐꼬리를 많이 가지고 간 학생에게는 대단한 칭찬을, 이와 반대로 적게 가지고 가게 되면 심한 꾸중을 받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아무리 쥐가 많다고는 하지만, 무슨 재주로 매일 쥐꼬리를 잘라갈 수 있단 말인가. 학생들은 할 수 없이 동네방네로 쏘다니며 남들이 잡아서 버린 쥐를 보는 대로 꼬리를 잘라가기에 혈안(?)이 되고 말았다. 그러기에 죽은 쥐만 보았다 하면 눈이 번쩍 띄곤 했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기만 하다.
공부보다는 쥐꼬리에 혈안이 된 학생들은 결국 기가 막힌 묘안을 생각해 내게 되었다. 그 기가 막힌 묘안이란 무의 꼬리를 잘라 흙바닥에 놓고 발로 몇 번 문질러 쥐꼬리에 섞어서 가지고 가게 되었던 것이다.
선생님이 막대기로 뒤적거리며 쥐꼬리를 세어보곤 했지만 무 꼬리까지 분간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소문이 퍼지게 되자 나중에는 너도나도 무 꼬리를 잘라 섞어가자고 가게 되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처럼 기막힌 묘안도 결국은 들통이 나고 말았지만…….
▶ 괘종시계와 태엽
요즈음에는 흔한 게 손목시계이며 벽시계이다. 그리고 요즈음 나오는 시계들은 그 모두가 전자의 힘으로 가거나 배터리를 사용하여 움직이게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요즈음에는 누구나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고 있기 때문에 시계에 대한 중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1950년대만 해도 시계가 아주 드물었다. 우리 마을만 해도 5,60채가 넘는 집이 있었지만 가정에 벽시계를 가지고 있는 집이 불과 열 집 안팎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회중시계를 소지하고 다닌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그 사람은 마을에서 그나마 넉넉하게 잘 사는 집의 어른들뿐이었다. 그러기에 그 시계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일종의 사치품 못지않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기에 시계가 없던 그 시절에는 현재 시각을 해를 보고 대충 짐작을 하거나 정확한 시간을 알기 위해서는 시계가 있는 집으로 가서 현재의 시각을 알아보곤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다음은 그 시절에 벽시계가 있는 어느 집에서 벌어진 재미있는 이야기의 한토막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읍내로 급히 볼일을 보러 가기 위해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부탁을 하게 되었다.
“얘야, 읍내에 급히 다녀올 테니 시간이 나는대로 시계에 밥을 좀 주려무 나. 시계가 배고 고파서 금방 설 것 같구나.”
”네, 알겠어요. 걱정말고 다녀오세요.“
얼마 뒤 읍내 일을 다보고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가 집에 오자마자 벽에 매달린 시계를 바라보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들에게 물었다.
”아니 너 시계에 밥을 주라고 했더니 아직도 안 준 모양이구나?“
”밥을 안 주다니요? 아까 가지자마자 제가 분명히 밥을 배부르게 잔뜩 준 걸요. 아버지가 확인해 보세요.“
이상하게 생각한 아버지가 시계의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 본 순간 아연실색하며 놀라게 되었다. 정말 기가 막힐 일이었다. 벽시계 안에는 아침에 먹다 남은 밥이 가득하게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왜 그렇게 놀라세요?“
”……!!“
아버지는 그만 말문이 막혀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어 입만 벌리고 있었다.
밥을 주라는 말에 그만 태엽을 감으라는 말을 못 알아들은 아들은 곧이곧대로 먹던 밥을 그대로 가득 넣었던 것이다.
▶ 현충일의 조기 게양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우리나라 국기에 대한 존엄성이 대단했다.
이른 아침에 국기를 게양할 때, 그리고 해가 질 무렵에 국기를 하강할 때마다 각 관공서에서는 어김없이 애국가가 울려퍼지곤 하였다.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는 길을 가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각종 일터에서 일을 하던 근로자들 모두가 일손을 멈추고 바른 자세로 서서 손을 가슴에 얹고 태극기를 향한 채 애국가가 끝날 때까지 부동자세로 서 있어야 했다. 그것이 누구나를 막론하고 매일 습관으로 정착되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국경일이 돌아올 때마다 각 가정에서는 반드시 태극기를 게양해야 했다. 그리고 관공서에서는 마을마다 다니며 국기 게양 여부를 조사하러 나와서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은 집은 게양해 달라고 독려하기도 하였으며 어느 마을이 가장 많이 게양하고 어느 마을이 가장 적게 게양했는지의 여부를 상부 기관에 보고하기도 하였다.